68화
탁-!
고요한 촬영장 분위기 속으로 떨어져 버린 하준의 휴대폰.
주변 스태프들의 시선이 소리의 방향을 따라 달라붙었지만, 하준의 시선만은 VCR에서 거둬지질 않고 있었다.
[우와, 이거 나 주려고 사온 거야? 너무 예쁘다!]
안개꽃을 들고선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화면 속 그녀.
하준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눈앞의 장면들에 어떠한 반응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눈앞의 장면들이 믿어지지가 않고 있었다.
‘대체 왜.’
대체 왜 그녀가.
‘대체 왜 엄마가…….’
대체 왜 자신의 모친이 화면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걸까.
분명 이번 VCR 영상은 추억의 영화 속 한 장면을 보여주는 거였는데.
그런데, 대체 왜.
“저, 대표님?”
하준을 대신해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서는 안철호가 하준에게 건네왔다.
하준도 그제야 자신의 휴대폰이 떨어졌다는 걸 인지하고는 천천히 고갤 돌려왔다.
“아, 감사합니다.”
“허허, 문제에 너무 집중하신 거 아닙니까, 대표님? 휴대폰이 떨어진 것도 모르시고.”
하준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마음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며 안철호에게 물었다.
“PD님. 저 영화, 언제 나왔던 건가요?”
“저거요? 흠, 벌써 20년도 더 됐죠? 제가 고등학생 때 처음 나왔던 거니까.”
안철호가 꽤나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듯 말을 이어왔다.
“대표님은 잘 모르실 수밖에 없긴 할 거예요. 워낙 대표님이 어릴 때 개봉된 영화이기도 하고, 또 그렇게 흥행을 했던 작품은 아니라.”
“…….”
“크흐, 그래도 한때 저한텐 인생 영화나 다름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처음 봤을 때 어찌나 설레고 좋던지. 저 여주인공 보려고 똑같은 영화를 다섯 번은 넘게 봤다니까요? 가뜩이나 없는 돈 탈탈 털어서 말입니다. 하하, 다 추억이죠 뭐.”
추억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안철호와는 달리, 하준은 좀처럼 떨리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고 있었다.
무엇보다, 화면 속 그녀의 정체를 아직까진 정확히 확인한 상태가 아니었기에.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저 영화 속 여주인공 이름이.”
“아이구, 우리 유 대표님도 반하셨나보네요? 하긴, 저도 문제 내면서 오랜만에 다시 돌려보는데 여전히 설레긴 하더라고요? 참, 계속 배우 생활 했으면 아주 영화판을 휩쓸었을 수도 있는데.”
아쉬움과 씁쓸함이 묻어나는 듯한 표정과 함께 그가 하준의 질문에 답을 해왔다.
“이수연이에요. 영화 속 여주인공 이름이랑 똑같죠? 나중에 그거 알고 나니까 더 감정 이입이 돼서 봐지더라고요. 꼭 저 영화 속 이야기가 이수연의 이야기인 것처럼. 허허.”
이수연.
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이름이 흘러나오자 하준의 눈동자가 또 한 번 일렁였다.
“이수연이요? 확실한 건가요?”
“아, 그럼 확실하죠. 세상에 자기 첫사랑 이름도 못 외우는 사람이 있으려고요? 허허, 그때 참 많이 좋아했는데.”
추억을 회상하는 안철호를 일별하곤 하준은 다시 VCR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자신의 기억 속 엄마의 이미지와는 꽤나 이질감이 느껴지고는 있었지만, 분명 모친 이정화가 확실했다.
아무리 20년이 지났다고는 해도 엄마의 얼굴을 못 알아볼 리는 없으니까.
그런데 대체 왜.
‘이수연…….’
왜 안철호는 그녀를 이수연이라고 하는 걸까.
[수연아, 너 안개꽃의 꽃말이 뭔 줄 알어?]
[안개꽃? 글쎄? 뭐 영원한 사랑 같은 그런 거 아니야?]
[안개꽃은 각 색깔마다 꽃말이 다 다르대. 붉은색은 행복한 순간, 노란색은 기쁨과 성공의 순간, 그리고 보라색은 영원한 우정. 각 색깔마다 꽃말이 다 다른 게 신기하지?]
[우와, 정말? 그럼 오빠가 준 이 분홍색은 무슨 꽃말인데?]
[죽을 만큼 널 사랑한다는 의미야. 지금까지도,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고 앞으로 미래에도.]
[……오빠.]
세상 가장 행복한 얼굴과 함께 눈물을 글썽이는 그녀, 수연.
VCR 화면 속으론 두 사람의 애틋한 감정 신이 이어졌고, 잠시 후 수연의 대사가 다시 내뱉어졌다.
[근데 오빠. 그럼 하얀색 꽃말은 뭐야? 나는 흰색 안개꽃이 참 예쁘던데.]
그리고 그녀의 대사와 함께 멈추어진 VCR 화면.
MC 이진경이 멘트를 내뱉어왔다.
“자, 여기서 문제! 남자 주인공의 다음 대사는 무엇일까요? 힌트는 바로 여주인공의 질문이 되겠죠? 훗.”
이진경의 말과 함께 멤버들을 포함한 출연자들은 답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하준도 VCR에서 천천히 시선을 떼왔다.
“어째 대표님 표정이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 같습니다? 후후, 이것 참. 제 사비를 털어서라도 대표님께 한우 한번 대접해 드리려고 했더니. 허허.”
하준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안철호가 내기 얘길 꺼내며 웃어 보였다.
하준은 여전히 납득이 되질 않아 안철호에게 다시 질문을 건넸다.
“저 배우 이름이 정말 이수연이 맞나요, PD님? 혹시 예명을 사용한 건 아니고요?”
여주인공에게 꽤나 집요한 관심을 보여오는 하준의 모습에 안철호가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흐음, 글쎄요? 당시엔 인터넷이 그렇게 보급화돼 있던 시절도 아니라 그런 것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는데.”
안철호가 팔짱을 끼고는 VCR 화면 속 멈춰진 이수연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만약 이수연이 계속 활동을 했더라면 그게 예명인지 본명인지 알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저 작품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활동은 없었어요. 그러니까 저게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이었던 거죠. 흐음, 그 이후론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고요.”
왜 이정화가 아닌 이수연인지에 대해선 알 수 없었지만, 분명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화면 속 그녀는 자신의 모친 이정화가 맞다는 것.
아무리 자신이 기억하는 엄마와의 모습과는 다르다 해도, 유일한 혈육인 그 얼굴을 기억 못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짙은 어둠이 깔린 하준의 표정을 사이에 두고 안철호가 질문을 건네왔다.
“대표님, 저 문제의 정답이 뭔 줄 아십니까? 그 답이 바로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복선이 되거든요.”
“……글쎄요.”
안철호가 한쪽 손을 턱으로 올리며 낮게 답해왔다.
“화이트 안개꽃의 꽃말은 죽음이에요. 그래서 보통은 다른 색의 안개꽃과 섞어서 선물하곤 하죠. 영화 속에서 화이트 안개꽃을 좋아한다는 여주인공은 마지막에 병으로 죽게 되고요.”
저 영화를 끝으로 더 이상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배우 이수연.
그리고, 그것과 거의 비슷한 즈음에 세상을 떠났던 자신의 모친 이정화.
하준의 머릿속은 더욱더 복잡하게 뒤엉킬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 사진.’
문득 하준의 머릿속으로 일전에 구명호가 자신에게 건넸던 엄마의 사진이 떠올랐다.
화려한 드레스 차림으로 세상 그 누구보다 밝게 웃고 있던 모습.
분명 그 당시에도 자신이 기억하는 모습과는 꽤나 이질감이 느껴진다고 생각했었는데.
“…….”
대체 자신이 모르는 어떤 사실이 숨겨져 있는 걸까.
그리고.
구명호는 이 모든 걸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걸까.
* * *
“와! 이준 형 진짜 짱! 어떻게 안개꽃 꽃말까지 알고 있었어요? 난 완전 포기하고 있었는데.”
“얘가 꽃집에서도 알바했었잖냐. 그때 하라는 알바는 안 하고 맨날 쪽지며 먹을 거며 오는 여자 손님들한테 받아대느라 아주 정신이 없었지. 그래도 어떻게, 꽃말은 용케 기억하고 있었다?”
“풉. 하여튼 은호 형 질투는! 오예, 오늘 저녁은 1등급 한우다, 한우!”
<응답하라, 그때 그 시절!>의 녹화가 모두 끝나고 다시 대기실에 모인 멤버들.
이준의 놀라운 활약상으로 테이블 중앙엔 마블링 가득한 한우가 먹음직스럽게 윤기를 내고 있었다.
“자자, 오늘 스케줄도 다들 잘 끝냈으니까 얼른 집 가서 씻고 맛있는 저녁 먹도록 하자. 다들 얼른 한우 먹고 싶어 난리일 거 아냐.”
“헤헤, 당근이죠!”
“형도 드시고 가세요! 이거 엄청 많아서 며칠은 먹을 것 같은데요?”
“후후, 같이 먹잔 얘기 안 했으면 나 정말 서운할 뻔했다?”
“예슬이 누나랑 지유 누나도 같이 먹으러 가요! 맛있는 건 다 같이 나눠 먹어야 더더더더 맛있죠!”
“오홍, 그래도 돼? 너희 먹을 것도 부족한 거 아냐?”
“에이, 저희 그렇게 돼지들은 아니거든요? 헤헤, 지혜 누나도 불러서 다~ 같이 먹어요, 다 같이!”
한껏 들 있는 멤버들 사이로 하준은 잠시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곧장 구명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은 고객님의 휴대폰 전원이 꺼져 있어 음성 사서함으로…….
하지만, 웬일인지 꺼져 있는 구명호의 전화기.
하준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최 비서님. 저예요. 혹시 회장님 지금 회의 들어가셨을까요? 전화기가 꺼져 있으시던데.”
수화기 너머 최 비서의 말을 전해 듣고는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는 하준.
“음, 그럼 오늘도 김 기사님 없이 혼자 가신 건가요? 언제 오시는지는 모르시고요.”
지난번 식사 자리에서 구세희가 했던 말처럼 오늘도 역시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한 구명호.
하준은 수화기 너머 최 비서의 말을 전해 듣고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알겠습니다. 최 비서님. 회장님껜 제가 나중에 다시 따로 연락드리도록 할게요. 네, 들어가세요.”
통화를 끊고는 답답한 마음에 긴 한숨을 내뱉는 하준.
대체 왜 구명호는 여태껏 알려주지 않았던 걸까.
그 긴 시간 동안 엄마에 대한 거라면 그 어떤 작은 정보라도 알고 싶어 했다는 걸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도대체 왜 이런 중요하고도 엄청난 사실을 지금껏 단 한 번도…….
조금도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들로 인해, 하준은 좀처럼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구명호를 만나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듣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여태껏 자신에게 이 모든 것들을 숨겨온 이유에 대해서도 들어야만 할 것 같았고.
텅 빈 대기실 앞 복도 위로는 하준의 짙은 한숨만이 내뱉어지고 있었고, 하준은 다시 몸을 일으켜 대기실 손잡이로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때.
하준의 손에 쥐어진 휴대폰에서 진동이 일기 시작했고, 하준은 구명호에게서 온 전화일까 싶어 곧바로 휴대폰을 들어 올려 발신자를 확인했다.
하지만, 발신자는 구명호가 아닌 다른 이.
바로, 최윤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