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꾸는 스타 메이커-66화 (67/165)

66화

조금 전 김지유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하준이 뻗으려던 손을 거두고는 물었다.

“이 명함을 어디서 본 것 같다고요?”

“아, 그게.”

온전한 기억은 아닌 듯, 김지유가 시선을 바닥에 두며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거랑 똑같은 디자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적힌 이름이랑 직책이 같았던 것 같아서요. 캐스팅 디렉터라고…….”

‘캐스팅 디렉터’.

그 단어에 하준의 표정이 또 한 번 바뀌었다.

“혹시 그럼, 김지유 씨가 그 명함을 받았던 걸까요?”

질문을 던지긴 했지만, 다소 의아할 수밖엔 없었다.

샵에서 일하고 있는 김지유가 그의 관심 대상일 리는 없었을 텐데.

배우가 되고자 하는 간절함을 이용해 접근하는 것이 그의 수법이었으니까.

하준의 물음에 김지유가 곧바로 고개를 내저어왔다.

“아, 아뇨! 제가 아니라 저희 샵에 왔던 손님이.”

“손님이라면.”

그때의 기억을 상기시키려는 듯, 김지유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넘기고는 답을 해왔다.

“한 두 달 전쯤이었나? 오디션 때문에 종종 저희 샵에 오던 손님이 계셨는데, 그분이 친구분이랑 같이 와서는 명함 하나를 들고 막 자랑을 하시더라고요. 자기 이제 엄청 바빠질 지도 모른다면서, 어느 날 갑자기 TV에 나와도 놀라지 말라고요.”

“…….”

“그래서 제가 드디어 오디션에 합격한 거냐고, 축하한다고 그러니까 그런 건 아닌데 아마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엄청 대단한 분한테 캐스팅 제의를 받았다면서, 직접 미팅까지 하고 왔다고.”

김지유가 아직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명함을 잠시 훑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 저한테 명함을 보여주는데, 거기에 적힌 이름이 이거랑 같았어요. 캐스팅 디렉터 황수철.”

‘황수철’이라는 세 글자에, 말없이 듣고 있던 하준의 미간 사이로 주름이 깊게 파였다.

성과 이름, 그리고 직책까지.

분명 결코 흔한 그것들은 아니었기에.

그렇다고 김지유가 없는 얘길 지어낼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럴 이유도 없거니와, 그녀는 지금 하준의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을 것이기에.

“푸하. 형! 누가 햄버거를 그렇게 멋있는 척하면서 먹어요. 그건 너무 인위적이다!”

“그러게. 만약 은호같이 생긴 애가 TV에서 저러고 있으면 난 입맛 뚝 떨어질 것 같은데? 불매운동도 마다하지 않을 것 같아.”

“뭐? 야, 서이준. 그럼 네가 한번 해봐. 넌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좀 보자.”

하준과 김지유의 옆으로 광고 콘티를 놓고 대화를 나누고 있는 멤버들의 웃음 섞인 소리들이 들려왔다.

하준은 잠시 멤버들에게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김지유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유 씨, 잠깐 밖으로 나가서 얘길 나눌까요? 지유 씨한테 좀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아, 네. 대표님.”

김민정에게서 명함을 받아 오긴 했지만, 워낙 오래된 일이라 별 다른 수확을 거두긴 힘들 거라 생각했다.

그가 지금도 같은 일을 하고 있을 지는 미지수인 데다, 만약 그러고 있다 한들, 지망생만 노리고 있을 그를 찾아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꼬리가 길면 잡히고 말 듯, 이미 어디선가 죗값을 치르고 있을 수도 있었고.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타이밍에, 그것도 조금의 연관성도 없을 것 같던 김지유에게서 뜻밖의 정보를 얻게 되자, 하준은 자못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김지유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그를 찾아내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대기실 밖으로 나옴과 동시에 하준이 김지유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아까 저한테 한 얘기들 외에 또 다른 것들은 없었을까요? 그분에 대한 다른 정보라든가.”

전과는 사뭇 달라진 하준의 표정에 김지유가 침을 한번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대표님…… 근데 그건 왜 물으시는 걸까요……? 혹시 제가 괜한 얘기라도.”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제가 그분을 좀 찾고 있어서.”

“아.”

그제야 김지유가 표정을 풀고는 입을 벌려왔다.

“와, 그럼 정말 그분이 대단한 분이긴 한가 보네요! 대표님이 이렇게 직접 찾아 나서기까지 하실 정도면!”

김지유의 얘기에 하준은 대답 대신 지금의 표정을 유지하기로 했다.

지금은 그편이 대답을 얻는 것에 유리할 것 같았기에.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싶던 김지유가 입술을 오므리고는 낮게 말했다.

“음, 글쎄요. 두 달이나 지난 일이기도 하고, 사실 그 당시에도 크게 감흥이 있었던 건 아니라…… 그냥 손님이 하도 명함을 자랑하면서 보여주길래 저도 맞장구 쳐주다 기억에 남게 된 거였거든요.”

“음…….”

추가적인 정보가 있을까 싶었지만 아무래도 김지유가 기억을 복기시키는 것엔 한계가 있는 듯싶었다.

하긴. 애초에 하준이 떨어뜨린 명함을 보고 그의 이름을 떠올렸다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대단한 일이었을지도.

하준은 억지로라도 기억을 떠올리려는 김지유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김지유 씨, 그 정도…….”

“아! 생각났어요, 대표님!”

그런데, 하준이 그 정도의 정보라도 고맙단 말을 전하려던 때.

미간 사이에 힘을 주며 시선을 아래로 두고 있던 김지유가 갑자기 고개를 치켜세우고는 눈동자를 빛내왔다.

“그때 그 손님이 잘하면 곧 B&D랑 계약할 수도 있다고 그러셨어요! 그 캐스팅 디렉터라는 분이 그쪽 대표님이랑 아주 각별한 사이라면서!”

“B&D요?”

갑자기 흘러나온 B&D의 이름에 잠시 풀어졌던 하준의 표정이 다시 굳기 시작했다

오창석 때의 일 이후로 한동안 잊고 지냈던 그 이름.

여기서 또다시 나올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치 못했기에 순간 표정이 급변할 수밖엔 없었다.

하준의 굳은 표정 사이로 김지유가 말을 이어왔다.

“네, B&D라고 그랬어요. B&D 대표가 원래 매니저 출신인데 그 캐스팅 디렉터라는 분이 힘든 시절에 많이 도와줬었다면서. 자기랑은 20년 지기 우정이라 자기 말 한마디면 B&D에 들어가는 건 일도 아니라 그랬다더라구요. 그래서 엄청 들떠 있는 것 같아 보였고.”

“…….”

정말 그의 말이 사실인 걸까?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지망생을 혹하게 하기 위한 술수였던 걸까.

김지유의 얘기가 끝마쳐지자, 하준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져 있었다.

무엇보다, 김지유의 말이 모두 사실이고 그의 말 또한 조금의 허세도 없는 그것이었다면, 이번 일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문제일 수도 있었다.

대한민국 최고 엔터 회사의 대표가 지망생을 상대로 사기 치는 일에 수 년 간 동조해 온 거나 다름없는 일이니까.

물론, 자세한 내막과 진실은 모르기에 지금 당장 단언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심각해진 하준의 표정을 바라보며 김지유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왔다.

“저, 대표님……?”

“아.”

너무 깊이 생각한 나머지 자신의 앞에 김지유가 있다는 사실을 잠깐 잊고 있었던 하준.

표정을 풀고는 온화한 어투로 말했다.

“갑자기 물어서 당황스러웠을 텐데 자세히 얘기해줘서 고마워요. 큰 도움이 됐네요.”

“아, 그럼 다행이네요! 휴. 전 대표님 표정이 안 좋으셔서 제가 혹시 실수한 거라도 있나 싶었는데. 헷, 혹시 또 제 도움이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주세요 대표님!”

“그래요, 고마워요. 전 잠깐 통화 좀 하고 들어갈 테니까 먼저 들어가요.”

“넵!”

김지유가 씩씩하게 답하고는 다시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하준은 닫힌 대기실 문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깊은 생각에 잠겼다.

정말 김지유의 말처럼 B&D와 박성환이 이번 일과 관련이 있는 걸까.

물론, 자신의 비즈니스를 위해서라면 소속 배우들마저 서슴없이 접대에 동행시키던 그였기에 딱히 위화감이 들거나 하진 않았다.

그라면 이보다 더한 악행들도 얼마든 저지를 수 있는 인물이었으니까.

다만, 아직까진 김지유의 얘기만으로 모든 걸 판단할 수는 없었다.

박성환과 황수철이 가까운 사이라고는 해도 이번 일과 B&D 간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쉽게 떠올려지지가 않고 있었기 때문에.

“…….”

이번에도 역시나 자신이 하려고 하는 일에 얽혀 있는 박성환.

매번 우연을 가장한 악연 같은 그와의 인연에, 하준의 표정은 한동안 돌아오질 않고 있었다.

* * *

한 시간 뒤. <응답하라, 그때 그 시절!>의 촬영 스탠바이 사인과 함께 멤버들이 스튜디오로 들어섰다.

조명이 비추고 있는 세트장 쪽으로 멤버들이 걸음을 옮기는 동안, 하준은 카메라가 설치된 쪽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PD님.”

하준이 인사를 건네자, 큐시트를 훑고 있던 안철호가 하준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눈동자를 키워왔다.

“아이고! 유하준 대표님 아니세요? 이야, 대표님이 직접 오실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이렇게 유명하신 분을 직접 뵙게 되니까 엄청 영광스러운데요?”

“하하, 아닙니다. 저희 애들 좋게 봐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하죠.”

“에이, 감사는요. 저희 말고도 여기저기서 섭외 문의가 엄청 들어오고 있을 텐데. 저희 프로그램을 일 순위로 선택해 줘서 오히려 저희가 감사할 따름인걸요? 하하.”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그가 다시 입을 열어왔다.

“그나저나 정말 이렇게 대표님이 직접 오실 줄은 몰랐네요. 혹시 멤버들 촬영하는 거 다 보고 가실 건가요?”

“네. 아무래도 첫 예능 프로그램이다 보니까 그게 좋지 않을까 해서.”

“크흐, 역시. 가 잘될 수밖에 없는 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네요. 이렇게 대표님이 지극정성으로 신경을 써주시니!”

“아닙니다. 아무쪼록 오늘 저희 애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PD님.”

하준의 얘기에 안철호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갤 끄덕였다.

큐시트를 돌돌 말며 세트장 쪽을 바라보던 안철호가 다시 하준에게 말을 건네왔다.

“아 참, 혹시 저희 프로그램 보신 적은 있으세요?”

“그럼요. 매주 챙겨보진 못하지만 항상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오, 잘됐네요! 그럼 대표님도 VCR 보면서 문제 한번 같이 풀어보세요. 이게 또 은근 추억 회상이 되면서 재미가 쏠쏠하거든요. 후후.”

눈썹을 으쓱하며 입꼬리를 올리던 안철호가 이내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곧바로 표정을 바꾸어왔다.

“……아? 참. 대표님도 그렇게 많은 나이가 아니라 잘 모르실 수도 있겠구나? 아이고, 이것 참. 대표라는 직책만 생각하고 당연히 추억 회상이 될 거라고 착각했네요, 제가. 하하하.”

안철호의 얘기에 하준도 온화한 미소로 화답했다.

“그래도 고전 영화들은 꽤 알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어머님 옆에서 많이 봤던 기억이 있어서.”

“오, 그래요? 어머님이 영화를 좋아하셨구나? 그렇지 않아도 오늘 영화 문제도 몇 개 준비돼 있는데. 이거 대표님이 맞히시면 제가 따로 선물이라도 챙겨 드려야겠는데요?”

“음, 주신다면 굳이 거절하고 싶지는 않네요.”

“하하하, 아 좋아요! 한번 맞혀보세요. 맞히시면 제가 사비를 털어서라도 아주 비싼 걸로 하나 선물해 드릴 테니까! 대신 못 맞히면 대표님이 저한테 선물해 주셔야 합니다? 1회 출연권으로?”

“음, 좋네요. 그렇게 하시죠.”

안철호와 하준이 훈훈한 대화를 주고받던 그때.

스튜디오 내부로 조연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스탠바이 해주세요!”

그리고, 잠시 후.

<응답하라, 그때 그 시절!>의 촬영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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