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의 첫 예능 스케줄이 확정됐다.
물론 애초에 육아 프로그램으로 얼굴을 알린 터라, ‘첫 예능’이라고 하긴 그랬지만 그래도 정식 데뷔 이후론 처음이었으니까.
방송국은 종편채널 JBC.
NTV를 시작으로 지상파 3사의 음방 스케줄까지 모두 소화하고 나자, 멤버들을 향한 각종 출연 문의들이 물밀듯 밀려왔다.
각 방송사의 예능 프로그램들은 물론, 대학 축제를 포함한 각종 지방 행사 문의가 쇄도하고 있었고.
모든 연예인들의 로망이라 할 수 있는 광고 제의까지 적잖이 들어오고 있는 상황.
물론 멤버들의 데뷔만큼이나 연습생 시절의 스토리가 부각된 탓인지, 대부분은 햄버거, 아이스크림, 치킨 등 음식과 관련된 것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신인 그룹에겐 무척이나 파격적일 수밖엔 없는 것이었고.
방송 시작 전, 대기실에 모인 멤버들이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후후, 그래도 데뷔 무대를 다 끝내서 그런지 전보다 마음은 훨씬 편한 것 같지 않냐?”
은호의 물음에 우측에 앉아 있던 지호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여 왔다.
“인정! 지난주까지만 해도 24시간 내내 긴장 상태라 밥도 먹는 둥 마는 둥이었는데. 후우, 음방 다 돌고 나니까 이렇게나 마음이 편할 수 없다니까요?”
은호의 좌측에 앉아 있던 하늘도 말을 보태왔다.
“맞아, 맞아. 혹시 실수라도 할까 봐 계속 안무랑 가사 외우느라 몸이 일초도 쉬질 않았던 것 같아요. 침대에 누워서도 계속 팔다리 움직이고 막, 막!”
“크큭. 너도 그랬냐? 나도 새벽 내내 그랬는데. 근데 그렇게 잠을 안 자고 움직였는데도 지난주엔 하나도 안 피곤하더라? 꼭 각성제 100개라도 먹은 사람처럼?”
“그쵸? 지난주엔 거의 하루 한두 시간밖에 안 잤는데도 완전 쌩쌩한 기분이었어요.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나왔는지. 헤헤.”
그래도 주말 내내 밀렸던 잠을 몰아 잔 탓에 멤버들의 얼굴 위론 생기가 돌고 있었다.
드라이기로 강준의 옆머리를 누르던 김예슬이 거울에 비친 강준을 바라보며 물어왔다.
“강준인 원래 영어를 좀 했었나 봐? 발음이 되게 좋은 것 같은데?”
스타일링을 받는 동안에도 연신 영어 문장을 읊어대고 있던 강준이 가늘게 웃어 보였다.
“아뇨, 예전에 오디션 때문에 팝송을 많이 불렀거든요. 그때 발음 연습했던 게 있어서 그렇게 들리나 봐요. 그래 봐야 조금이지만.”
“오오, 그래서 이렇게 발음이 좋은 거였구나? 지호 발음 듣다가 네 거 들으니까 완전 달라 보이는데? 호호.”
김예슬의 얘기에 지호가 발끈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연히 다르죠! 강준이 형은 엄메리카 식이고, 저는 잉글리쉬한 스타일이니까! 영국식 발음은 원래 이렇게 투박한 거라구요. 신사의 나라답게.”
“풉. 투박한 거랑 신사의 나라인 거랑 무슨 상관인데?”
“뭐…… 암튼 그런 게 있어요. 제가 요새 영어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 쳇.”
지호의 발끈하는 모습에 김예슬이 귀엽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나저나 너희 이렇게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하는데 나중에 정말 해외 공연까지 하게 되면 완전 멋있겠다! 왜, 그런 곳 있잖아. 웸블리 스타디움 같이 어어엄청 큰 곳!”
“에이, 말도 안 돼요. 거긴 엄청 유명한 가수들도 아무나 막 설 수 없는 곳이라던데요? 이제 막 데뷔한 우리가 벌써부터 그런 걸 욕심내고 그러면 안 되죠!”
“왜 안 돼, 생각이야 할 수 있는 거지! 진웅 씨한테 듣기론 벌써부터 방송 출연부터 해서 여기저기 행사 문의도 엄청 들어오고 있다던데? 그렇게 하나씩 밟아나가다 보면 언젠간 서는 날이 오지 않겠어?”
“……에이, 그래도.”
“그리고, 대표님이 벌써부터 너희한테 외국어 공부를 시킨다는 건 다 그만한 뜻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또 알아? 대표님 계획 속엔 너희가 웸블리에서 공연하는 모습이 이미 그려져 있을지도!”
김예슬의 얘기에 멤버들의 눈동자가 조금씩 일렁이기 시작했다.
분명 하준이라면 그만한 이유가 있어 외국어 공부를 시켰을 것.
그리고, 그간 보여왔던 모습만 생각해 봐도 항상 자신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일들뿐이었고.
그렇기에 김예슬의 입에서 내뱉어진 말들이 마냥 허무맹랑하다고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때, 대기실의 문이 열리며 하준과 정진웅이 모습을 드러내왔다.
“다들 배고프지? 일단 들어가기 전에 간단히만 먹고 들어가자. 스튜디오 녹화라 오래는 안 걸린다고 하니까 끝나고 제대로 먹는걸로 하고.”
“아하, 넵!”
정진웅이 멤버들의 자리 앞으로 김밥과 샌드위치, 그리고 이온 음료들을 올려놓는 동안 하준은 이준에게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이준의 머리를 말고 있는 김지유에게 말을 건넸다.
“출장 업무는 처음이라 낯서실 텐데. 불편하거나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씀 주세요. 저나 진웅이한테.”
“아, 아녜요! 샵에 있을 때보다 분위기도 훨씬 편하고 재밌어서 전 너무 좋아요. 헷, 감사합니다, 대표님.”
지난번 일을 계기로 김지유를 출장 담당으로 직접 샵에 요청한 하준.
아직 메인 디자이너가 되기 전이었지만, 이준을 비롯해 멤버들의 스타일링을 맡기기엔 충분하다는 게 하준의 판단이었다.
물론 그녀와 이미 친분이 있던 김예슬도 흔쾌히 동의를 해왔고.
자신을 좋게 봐준 하준에게 김지유가 감사 인사를 건네자, 하준이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멤버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오늘 촬영은 부담 가질 것 없이 편하게 찍고 오자. 질문은 대본에 있는 것들 위주로 나올 거고, 나머진 VCR 보면서 퀴즈만 맞추면 되는 거니까.”
“아, 네 대표님!”
오늘 멤버들이 출연하게 될 프로그램명은 <응답하라, 그때 그 시절!>.
초대된 게스트들과 네 명의 고정 MC가 과거의 영상들을 보며 함께 퀴즈를 풀어나가는 형태의 예능이었다.
높은 예능감을 요구하는 버라이어티는 지금의 멤버들에겐 다소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을 터였기에 하준이 직접 선택한 스케줄.
지난주 내내 각 방송사의 음악방송 스케줄들을 소화하느라 꽤나 지쳤을 멤버들을 위한 하준의 배려였다.
새벽부터 일어나 드라이 리허설과 카메라 리허설, 그리고 생방송까지 적지 않은 에너지를 쏟아부었을 테니까.
헤어와 메이크업을 마친 멤버들이 사전에 받은 대본을 각자 집어 들며 정독해 나가기 시작했다.
“근데 이 프로그램 막 20년, 30년 전 영상들 보여주면서 문제 내지 않나? 방송 볼 땐 그랬던 것 같은데.”
은호의 얘기에 이준이 고갤 끄덕였다.
“응, 맞아. 나 이 프로그램 애청자거든. 어떨 땐 40~50년 전 문제도 나오고 그래.”
“에? 40~50년 전이요? 그땐 조선시대 아니에요……?”
눈동자를 키우며 내뱉어오는 지호의 물음에 멤버들의 시선이 일제히 지호에게로 향했다.
설마 진심으로 묻는 거냐는 듯이.
하지만 곧, 지호의 표정이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하고 있자, 은호가 고개를 내저어왔다.
“흐음, 지호 넌 아무래도 영어가 아니라 한국사를 먼저 공부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어디 가서 무식하단 소리 듣지 않으려면 말야.”
“무, 무식요?! 하, 저 여태껏 그런 소리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거든요? 진짜. 단 한 번도요.”
지호의 격한 반응에 하늘이 가늘게 웃어 보이며 물어왔다.
“형, 형네 부모님 몇 년생이세요?”
“우리 부모님? 음…… 아빠는 70년생이고, 엄마가 74년생인가 그럴걸?”
대답을 내뱉는 동안에도 여전히 질문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듯한 지호의 표정.
하늘은 다른 말을 꺼내기보단 그냥 어색한 미소로 대신했다.
그러자 은호가 곧바로 입을 열어왔다.
“그때가 50년 전이니까 그럼 네 말대로면 너희 부모님은 조선시대 분들이시겠네? 너는 양반집 자식이고? 아이고, 그럼 우리 지호가 고등학교를 서당으로 다니고 있던 거구나?”
“……아!”
그제야 숫자 계산이 올바르게 됐는지 지호가 입을 벙긋거려 왔다.
그러고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헤벌레 웃어 보였다.
“헤헤.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 할 수도 있고 그러는 거죠 뭐! 하핫.”
늘 그렇듯 잠깐의 해프닝이 지나가고.
멤버들은 다시 집중해서 질문지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때, 정진웅이 파일 하나를 들어 올리며 하준에게 물어왔다.
“아 참, 대표님. 애들 광고 콘티 들어온 거 가져 왔는데 지금 시간 있을 때 잠깐 애들한테 보여줄까요? 그쪽에서도 가능한 답변을 빨리 주면 좋겠다고 해서.”
정진웅이 건넨 파일을 잠깐 확인하고는 하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쨌든 선택은 애들한테 맡길 거니까.”
“넵!”
정진웅이 테이블 중앙으로 파일을 펼치며 멤버들에게 말했다.
“이거 너희들한테 들어온 광고 콘티들인데, 지금 시간 있을 때 잠깐씩 훑어봐. 영 아니다 싶은 거 있으면 그건 빼는 걸로 할 거니까.”
“에? 광고요?”
일제히 눈동자를 키워오는 멤버들의 모습에 정진웅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뭐야, 다들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 대표님이 얘기했다고 하시던데?”
그러자 하늘이가 강준을 잠깐 흘깃하고는 말했다.
“어…… 그게. 강준이 형한테 듣긴 들었는데, 저흰 당연히 대표님이 그냥 하신 말씀이신 줄 알고…….”
은호도 곧바로 끼어들었다.
“그, 그게 그냥 하신 말씀이 아니었어요……? 저흰 예나 고 기집애 콧대 꺾으려고 대표님이 그냥 하신 말씀이신 줄 알았는데…… 저희한테 벌써 광고가 들어올 리 없다면서.”
아무래도 강준과 김예나 앞에서 하준이 한 얘길 사실이 아닌 걸로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멤버들을 바라보며 하준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가 걔 콧대 꺾어서 뭐하려고. 난 그냥 있는 사실을 얘기한 것뿐인데?”
“……아아, 그렇구나.”
물론 다분히 의도하고 꺼낸 얘기였다.
김예나가 속해 있는 ‘플라워 걸즈’는 데뷔한 지 3년이 지나도록 그 흔한 온라인 광고조차 찍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던 하준이 강준의 현재 위치를 짚어주기 위해 일부러 그 앞에서 내뱉은 말이었다.
물론, 조금은 유치해 보일 수 있는 행동이기는 했지만.
“와, 대박! 형들! 이거 우리가 맨날 먹던 그 치킨 브랜드인데요?! 마늘 바사삭!!”
파일 속 콘티를 살피던 지호가 흥분된 톤으로 말을 내뱉어오자, 은호가 곧바로 파일을 집어 들었다.
“대, 대박……! 그럼 우리 이거 찍게 되면 마늘 바사삭 맨날 먹을 수 있는 거야? 집안 가득 쌓아두고?!”
“당근이죠! 게다가, TV에서 보니까 광고 찍는 동안엔 거기 있는 음식 마음껏 먹을 수 있다고 하던데요? 와, 진짜 행복하겠다!”
은호와 지호가 가장 격한 반응을 보여오긴 했지만, 다른 멤버들의 표정 또한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다는 듯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그런 멤버들의 모습에 하준 또한 실소가 머금어졌다.
그토록 바라던 데뷔뿐 아니라, 신인그룹 치고는 이미 엄청난 결과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
모든 연예인들의 로망과도 같은 광고 그 자체보다, 고작 치킨 따위에 더 흥미를 두고 있는 모습이 아이러니했기 때문이었다.
콘티를 살피며 저마다 광고 포즈를 취해보는 멤버들을 잠시 일별하곤 하준이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꺼내 신규 메시지가 온 게 없는지 살폈다.
하지만, 역시나 아직이었다.
하준은 다시 주머니로 휴대폰을 집어넣으며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흠.”
김민정과의 만남 이후 최윤섭에게 계속 연락을 취해보았던 하준.
하지만 웬일인지, 며칠째 연락이 닿질 않고 있었다.
전화는 물론 보낸 메시지에 대한 답장까지도.
연락이라면 평소 칼 같이 닿았던 그였기에 하준은 다소 의아할 수밖엔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저, 대표님. 여기 명함 떨어뜨리셨어요.”
하준이 다시 주머니 속으로 휴대폰을 집어넣으려던 그때, 김지유가 하준을 향해 명함 하나를 건네왔다.
명함을 살피자 김민정으로부터 받았던 ‘그’의 명함이었다.
하준이 명함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아, 고마워요.”
그런데, 그때였다.
명함에 적힌 글자들을 무의식적으로 훑던 김지유가 눈동자를 살짝 키우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나지막이 말을 내뱉어왔다.
“어? 이 명함 어디서 본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