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왜 그러시죠?”
어딘가 모르게 음흉하기도, 의미심장하기도 한 윤채경의 시선에 하준이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
“왜라뇨? 지금 민정이가 소속사가 없다잖아요. 이렇게 연기도 잘하고 앞날이 창창한 애가!”
“그런데요?”
하준의 무미건조한 반응에 윤채경이 답답하다는 듯 톤을 높여왔다.
“아이참! 여기서 ‘그런데요’가 나오면 안 되죠, 대표님!”
윤채경이 톤을 바로잡고는 다시 차분하게 말을 내뱉어왔다.
“이번 드라마 스케일이 얼마나 큰지는 대표님도 잘 알고 계시죠? 제작비만 100억 이상이 들어가는 대작인 데다, 대본은 무려 SBC 극본공모로 뽑은 시나리오예요! 이런 작품이 망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손실이 아주 이만저만이 아니겠죠?”
여전히 표정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하준과 달리 윤채경은 꽤나 열변을 이어갔다.
“그런 중요한 드라마에, 그것도 주조연급의 배역을 당당히 오디션으로 따낸 배우가 아직 소속사가 없는 상황인데, 당연히 잡아야죠! 긁기만 하면 로또나 다름 없는 복권인데!”
“흠.”
이제야 윤채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똑바로 이해한 하준.
잠시 시선을 옮겨 김민정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김민정 씨랑 전속계약을 체결했으면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아이참, ‘체결했으면’이 아니라 대표님 입장에서 꼭 그래야 한다는 얘길 하는 거죠. 이번 드라마만 끝나도 지금하고는 인지도부터가 완전 달라져 있을 텐데. 그럼 대표님 입장에서는 무조건 이득일 수밖에 없는 계약인 거고! 비즈니스적으로 한번 생각해 보시라 이거죠, 제 말은.”
윤채경이 김민정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민정이 넌 어때? 혹시 이미 생각해뒀거나 아님 지금 얘기가 오고 가는 회사가 있어?”
“아, 아뇨.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건 아직…….”
“오, 그럼 더 잘됐네! 너, 언니가 B&D 소속이었던 거 알지? 내가 거기뿐 아니라 수많은 회사들의 러브콜도 다 마다하고 왜 여기로 옮긴 줄 알아? 소속 연예인이라곤 나 하나밖에 없는 이런 신생 회사로?”
윤채경의 얘기에 김민정이 눈썹을 살짝 올리며 되물었다.
“어…… 거기 아이돌 그룹도 하나 있지 않아요? 얼마 전에 데뷔한.”
“응, 맞아. 근데 내가 계약할 당시엔 연습생 신분이었으니까 실질적으론 나밖에 없었지.”
“아아.”
천천히 고갤 주억거리고 있는 김민정에게 윤채경이 다시 입을 열어왔다.
“소속사를 고를 땐 딴 거 다 필요 없고 그 회사의 대표만 보면 돼. 대표가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어떤 마인드로 회사를 운영하고 소속 연예인들을 대하는지. 대표만 보면 그 회사의 모든 걸 다 알 수 있는 법이거든.”
윤채경이 하준에게 잠깐 시선을 옮겼다가 다시 이어나갔다.
“뭐, 지금 너한테 자세히 얘기해 주긴 좀 그렇지만 내가 대표님한테 큰 빚을 좀 졌었거든. 연예계 생활을 완전 접어야 할지도 모를 상황이었는데, 대표님 덕분에 이렇게 다시 활동할 수 있게 된 거지. 꼭 오늘의 너처럼.”
마지막 말에 김민정이 다소 놀란 듯 눈동자를 키워오자, 윤채경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아, 그렇다고 너랑 정말 똑같은 상황이었다는 건 아니고. 야, 아무리 힘들어도 난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은 절대 안 하거든?”
“……아, 네.”
“앞으로 두 번 다신 그런 생각 하지 마. 네 목숨 구해준 대표님을 생각해서라도. 알지?”
“네…… 감사합니다, 대표님.”
반성하는 표정으로 고갤 숙여오는 김민정의 모습에 하준의 얼굴 위로 웃음이 띄워졌다.
그러자, 윤채경이 왜 웃냐는 듯 쳐다봤다.
“응? 왜 웃어요, 대표님? 민정이가 감사하다는데?”
“아, 민정 씨 때문이 아니라 채경 씨 때문에요. 지금 채경 씨 모습이 꼭 스무 살 때 봤던 인력사무소 소장님 같아서.”
“……인력사무소요? 갑자기 웬 인력사무소?”
“음, 글쎄요. 그분도 사람들 모을 때 열변을 토해내셨던 것 같아서.”
“뭐야. 뜬금없이.”
윤채경이 다소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다시 하준에게 물어왔다.
“그래서, 대표님 생각은 어떠신데요? 아까도 말했지만 민정이 정도면 정말 긁지 않은 복권이나 마찬가지예요. 대표님도 회사를 더 키우려면 저랑 뷔뷔앞 애들만으로는 부족하지 않겠어요? 가뜩이나 사옥 옮기면서 직원들도 왕창 늘어났는데!”
윤채경이 김민정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의사를 물었다.
“민정이 넌 어때? 딱히 생각해 두고 있는 곳 없으면 언니는 여기 완전 강춘데.”
“저야 언니랑 같은 회사에 있게 되면 너무 영광이죠. 저한텐 우상이나 다름 없는 분이시니까. 그리고, 오늘 일은 제가 평생 대표님한테 감사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요…….”
“그럼, 그럼. 우리 대표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나신데. 완전 슈퍼맨급이라니까? 이번 우리 드라마 제작비도 대표님이 전부 다 끌어오신 거 모르지?”
“저, 정말요?”
“그럼, 정말이지. 뭐, 물론. 나도 감독님한테 듣고 오늘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윤채경이 하준을 쳐다보며 무척이나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이 있었으면서 저한텐 한마디도 얘기 안 해주실 수가 있어요? 감독님, 작가님 앞에서 제가 얼마나 바보 같은 표정이었는지 모르죠? 완전 처음 듣는 얘기인 것처럼.”
윤채경의 뾰로통해진 표정에 하준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짧게 답했다.
“뭐, 자연스럽게 알게 될 얘기니까요.”
그러고는 김민정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을 이어나갔다.
“음, 계약 문제는 이 자리에서 바로 결정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으니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도록 하죠, 민정 씨. 저도 민정 씨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기도 하고, 민정 씨도 신중히 생각해야 할 문제니까.”
윤채경이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왔다.
“그래, 그렇게 해요. 얘긴 내가 꺼내긴 했지만 그래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처리할 문제는 아니니까. 민정이 너도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고.”
“네 언니.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이, 감사는 뭘. 나 혼자만 있는 것보다 소속 배우 하나 더 생기는 게 훨씬 동질감도 생기고 좋지.”
윤채경이 씨익 웃어 보이고는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 얼른 밥부터 먹자. 너도 대표님도 둘 다 피곤할 텐데 얼른 먹고 쉬어야지.”
윤채경의 말에 김민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하준도 젓가락을 들기 위해 손을 옮기려는데.
문득 하준의 머릿속으로 어떠한 생각 하나가 스쳐 갔다.
“아 참, 민정 씨.”
“네, 대표님.”
“혹시 그 캐스팅 디렉터라는 분. 명함 같은 거라도 가지고 있는 거 있으실까요? 아니면 이름이나 그밖에 다른 정보들이라도.”
“명함요?”
되물어오는 김민정에게 하준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미 몇 년 전 일이라면 김민정 외에도 또 다른 피해자들이 있을 수 있는 일.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어디선가 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고.
김민정과 눈을 마주하며 하준이 짧게 답했다.
“아무래도 한번 알아봐야 할 것 같아서.”
* * *
밤늦은 시각.
불 꺼진 썬데이 미디어 사무실 내엔 작은 스탠드 불빛 하나만이 비춰지고 있었다.
그리고 스탠드 불빛 아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 바로 최윤섭이었다.
그의 자리 위로는 비워져 있는 소주병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곧 최윤섭은 마지막 잔을 입안으로 털어넣었다.
“하아.”
짙은 한숨을 내뱉고는 모니터로 시선을 옮기는 최윤섭.
화면 위론 그가 오전에 내보낸 기사가 띄워져 있었고, 최윤섭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
자신이 내보낸 기사 하나로 한 여배우의 인생이 단번에 끝날 수도 있었던 상황.
만약 자신이 조금도 특정할 수 없게 기사를 쓰지 않았다면 분명 현실로 일어나고 말았을 일이었다.
최윤섭이 마우스 위로 손을 얹고는 연예면을 벗어나 사회면 랭킹으로 옮겨갔다.
그러고는 스크롤을 내리며 각 순위의 헤드라인들을 하나씩 훑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자신이 찾던 기사가 더 이상 순위에 있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는 그의 표정이 한층 더 쓰게 바뀌었다.
‘이슈를 이슈로 막으려는 거야.’
왜 이런 위험한 기사를 써내야 하는지에 대해 물었을 때, 김창완이 자신에게 했던 말.
이슈를 이슈로 막기 위해서.
자신이 내보낸 기사로 인해 종일 연예란은 물론, 각종 커뮤니티와 실시간 검색 순위가 뜨겁게 달궈졌다.
그로 인해, ‘그들’이 막고자 하는 기사는 자연스레 대중들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선거법 위반 의혹 때문이지 뭐. 곧 재선 앞두고 논란이 커지면 안 될 테니까.’
정치인의 불법 논란을 막기 위해 연예 전문 매체가 나서 더 큰 논란을 만들어내는 일.
최윤섭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아니, 말이 돼서도 안 되는 일을 도무지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무엇보다, 지금껏 십수 년이란 시간 동안 자신의 모든 걸 바쳐왔던 회사였기에 더더욱.
“……후.”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닌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이번엔 정치인의 불법 논란을 덮어주는 일이었지만, 이 다음번엔 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이곳을 떠나지 않는 이상 ‘그들’과는 계속 함께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김창완이 지난 10년간 그래왔듯, 때론 주도자로서, 때론 공모자로서.
스윽.
모니터에서 시선을 뗀 최윤섭이 파일꽂이 속으로 손을 뻗었다.
그곳에서 문서 하나를 빼내고는 꽤나 심각한 표정으로 그것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기자의 윤리강령이 적힌 문서.
최윤섭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멈춰졌다.
[출처를 확인할 수 없는 소문만으로 기사화하지 않는다.]
[보도 내용의 진실성에 책임을 지며, 잘못이 발견될 경우 신속하게 정정한다.]
단순 제보만으로 써 내려갔던 기사의 내용들.
정확한 팩트 체크는 물론, 보충 취재가 필히 이루어져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윤섭은 그러질 못했다.
그간 온갖 특종과 이슈만을 좇으며 ‘기레기’라는 소리를 귀에 박히도록 들어왔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결단코 윤리강령만큼은 어겨본 일이 없었는데.
그동안 지켜왔던 신념이 이렇게 쉽게 깨져 버리고 나자 깊은 자괴감이 밀려올 수밖엔 없었다.
무엇보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것이었기에 더더욱.
지이잉-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 문서들을 파쇄기에 집어넣는 최윤섭.
쏟아부은 알코올들로 인해 취기가 한 번에 밀려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후우.”
대체 ‘그들’을 위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기사들을 써내야 하는 걸까.
그리고, 오늘과 같은 감정들을 대체 얼마나 긴 시간 동안 겪어야 하는 걸까.
마지막 문서를 파쇄기에 집어넣는 동안에도 최윤섭은 조금도 판단이 서질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책상 위로 올려두었던 최윤섭의 휴대폰에서 강한 진동이 일기 시작했고.
최윤섭은 몸을 돌려 휴대폰 액정화면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발신자를 확인한 순간.
최윤섭의 얼굴 위론 복잡한 감정들이 뒤엉켜 나타날 수밖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