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꾸는 스타 메이커-63화 (64/165)

63화

“……그게.”

하준이 윤채경을 처음 만났을 때.

그 당시에도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고는 올바른 방향으로 기사를 써주었던 최윤섭.

만약 김민정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그가 이번에도 그렇게 행동해 줄 거라는 게 하준의 판단이었다.

김민정이 깨물던 입술을 열고는 낮게 답해왔다.

“일부러 제 연락을 피하는 것 같았어요…… 기사에 적힌 주소로 메일도 보내보고, 썬데이 미디어에 전화해서 그 기자님과 직접 통화를 하고 싶다고 했는데도 전혀 연결시켜 주질 않더라고요. 저를 직접 밝히면서까지 부탁을 했는데도…….”

김민정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으며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는 동안에 기사는 여기저기 퍼져 나가고, 사람들은 그게 누군질 밝히려고 온종일 혈안이 돼 있는 걸 보면서 너무 무섭고 초조했어요…… 분명 사실이 아닌 걸 알면서도 그게 저라고, 그 기사의 내용은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직접 말할 용기가 나질 않더라고요. 세상 누구도 제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흑.”

종일 겪었던 감정들이 다시 올라오는 듯, 그녀의 뺨 위로 눈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휴지를 뽑아 김민정에게 건네고는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잠시 기다리는 하준.

그러는 동안 생각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일단 기사 내용을 정정하는 거에 대해선 제가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워낙 파장이 컸던 기사라 정정하는 게 그쪽에서도 쉬운 결정은 아닐 것 같긴 한데. 적어도 추가 보도는 없도록 해야 할 테니까요.”

“흑, 감사합니다, 대표님…….”

“추가 보도만 되지 않는다면 그 여배우가 김민정 씨라는 건 아무도 모를 거고, 그럼 결국 사람들의 관심도 금세 사그라지게 되겠죠. 물론 사실이 아니니까 민정 씨도 죄책감 가질 필요는 전혀 없을 거고요.”

고개를 천천히 끄덕여오는 그녀를 바라보며 하준이 덧붙였다.

“단, 김민정 씨가 오늘과 같은 선택은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주셔야만 저도 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 의지력이 약한 사람을 별로 좋아하질 않아서.”

하준의 얘기에 그녀가 끄덕이던 고개의 방향을 반대로 내저어왔다.

“아뇨, 절대, 절대 그런 일은 두 번 다신 없을 거예요. 아깐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그러면 안 됐는데…….”

“그럼 약속하시는 건가요?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두 번 다시 그런 선택은 하지 않겠다고.”

“네…… 저 약속할 수 있어요.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을 텐데…… 두 번 다신 그런 끔찍한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아요.”

진심이 담긴 그녀의 말들에 하준도 그제야 다소 마음이 놓이는 듯싶었다.

하준이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물었다.

“당분간 함께 지낼 만한 가족이나 지인분들은 있으실까요? 아무래도 한동안은 그편이 나을 것 같은데.”

“아…… 부모님은 지방에 계시고 서울엔 따로 친구가 있거나 하진 않아서.”

“흠. 이번 작품 촬영은 계속하실 거죠?”

“그, 그럼요! 제가 얼마나 기다려 온 순간인데…… 꼭 하고 싶, 아니, 꼭 해야만 해요!”

불과 30분 전까지만 해도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을 그녀가 지금은 결연한 의지를 보이자, 하준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요. 당당히 오디션으로 따낸 배역인데 남에게 양보하면 안 되겠죠.”

말을 마치고는 오피스텔 내부를 잠시 훑는 하준.

물론 그녀의 마음이 완전 바뀌었다는 건 인정하는 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이곳에 혼자 두고 가는 건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잠시 턱을 매만지며 고민을 이어가던 하준이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간단한 짐들만 먼저 싸서 가보는 걸로 하죠. 저도 어떻게 될진 장담할 수가 없어서.”

“……네? 어, 어디로 가시려구요?”

눈동자를 키우며 물어오는 김민정에게 하준이 옅은 미소와 함께 답했다.

“음, 일단 저도 당장 생각나는 사람이 한 명뿐이긴 한데. 그분이 순순히 받아주실지는 저도 가봐야 알 것 같아서.”

* * *

몇 시간 뒤, 한남동 고급 빌라 앞에 하준의 차량이 멈춰 섰다.

차에서 내려 잠시 기다리고 있자, 먼발치서 편안한 차림의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예요, 대표님! 답장 좀 달라니까 내내 연락도 안 주시고. 저랑 감독님이 리딩 내내 얼마나 불안했는지 알아요?”

보자마자 쏘아붙이는 윤채경에게 하준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죄송해요, 상황이 좀 그래서. 대본 리딩은 잘 끝나셨죠?”

“네, 뭐 일단은요. 민정이 안 온 건 감독님이 잘 둘러댔어요. 갑자기 몸이 너무 안 좋아져서 힘들 것 같다고. 민정이 대사는 작가님이 대신 읊어주셨고요.”

“음, 다행이네요.”

하준의 태연한 모습에 윤채경이 조급한 듯 다시 물어왔다.

“아니,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민정인 결국 못 만나신 거예요? 설마, 여태껏 집 앞에서 기다리다 오신 건 아니죠?”

내내 하준의 연락만 기다리고 있었는지, 속사포처럼 질문들을 쏟아내는 윤채경.

하준은 대답 대신 차량의 뒷좌석 문을 열고는 캐리어를 꺼내며 조수석을 바라봤다.

“그럼 내리실까요?”

하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윤채경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바뀌었다.

“응? 지금 누구한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 짐은 또 뭐…….”

그때, 하준 차량의 조수석 문이 열리며 김민정이 모습을 드러내자 윤채경의 동공이 한층 더 팽창됐다.

“어……? 너.”

“안, 안녕하세요, 선배님.”

민망함과 미안함이 섞인 표정으로 김민정이 어색한 인사를 건네오자, 윤채경이 입을 반쯤 벌리고선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하, 순간 귀신이라도 나타난 줄 알았네. 거기서 얘가 이렇게 나올 줄이야.”

윤채경의 놀란 표정을 보며 하준이 웃어 보였다.

“자칫하면 귀신이 될 뻔하긴 했죠.”

“……그게 무슨 소리예요?”

하준이 대답 대신 캐리어를 윤채경의 앞으로 옮겼다.

그러자 윤채경의 표정이 또 한 번 바뀌었다.

“이, 이건 무슨 의미죠? 설마 이 야심한 시각에 해외여행 가자고 짐 싸 온 건 아닐 테고…….”

태연한 표정의 하준, 그리고 그 옆에서 고개를 떨군 채 손가락만 매만지고 있는 김민정을 번갈아 보던 윤채경이 이내 무슨 상황인지 파악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흐음. 역시 여행 쪽은 아닌 것 같고.”

화장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김민정의 얼굴과 행색을 하나씩 살펴나가던 윤채경.

곧 모든 걸 이해했다는 듯 먼저 발걸음을 떼며 말했다.

“아직 밥 안 먹었지? 얼른 들어가자. 씻고 밥부터 먹게.”

그러고는 하준에게도 말을 덧붙였다.

“캐리어는 대표님이 들고 와주실 수 있죠? 온 김에 같이 식사나 하고 가세요.”

* * *

그로부터 한 시간 뒤, 윤채경 집 대리석 식탁 위로는 각종 배달 음식들이 가득 채워졌다.

윤채경이 나무젓가락을 김민정에게 건네며 말했다.

“드라마 보면 보통 이런 경우엔 따끈따끈한 집 밥이 차려지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드라마에서의 얘기고. 난 요리엔 영 취미가 없어서. 일단 오늘은 급한 대로 이걸로 때우고 다음엔 더 맛있는 거 먹자. 괜찮지?”

“그럼요. 갑자기 찾아와서 많이 놀라셨을 텐데. 감사합니다, 선배님.”

“감사는 무슨. 나도 이 넓은 집에 맨날 혼자만 있으려니 내내 심심하던 참이었는데. 잘됐지 뭐. 얼른 밥부터 먹어.”

“네. 잘 먹겠습니다 선배님.”

식사를 시작하는 김민정을 바라보며 윤채경이 하준에게도 젓가락을 건넸다.

“대표님도 얼른 드세요. 일 보시느라 종일 아무것도 못 드셨을 텐데.”

“네, 채경 씨는 안 드시나요?”

“전 원래 6시 이후론 아무것도 안 먹어요. 저만의 관리 원칙이라고나 할까? 훗, 배우한텐 숙명 같은 거죠 뭐.”

윤채경의 말에 하준의 머릿속으론 일전의 곱창집에서의 회식 장면이 떠올랐다.

“음, 지난번 곱창집에선 그 누구보다도 잘 드시는 것 같던데. 고기도 술도. 그때도 분명 6시는 훌쩍 넘은 시각이었던 것 같은데.”

하준이 설거지통 쪽을 흘깃하고는 말을 덧붙였다.

“뭐, 그래도 그런 걸로 하죠. 라면 먹은 흔적은 저만 본 걸로.”

하준의 얘기에 윤채경이 당황한 듯 목소리를 높여왔다.

“하, 차, 참나! 치사하게 먹는 거 가지고 지금 그러는 거예요? 어이구? 아주 이럴 땐 소속사 대표 티를 팍팍 내시네요? 평소엔 방치하듯 내버려 두면서?”

어딘가 모르게 구세희와 닮은 듯한 윤채경의 모습에 하준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준이 윤채경에게 온화한 시선을 보냈다.

“좀 불편하시더라도 당분간만 부탁드릴게요. 제가 수습하고 정리할 수 있는 일이 있나 확인해 보고 그것만 처리되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물론 오래 걸리진 않을 거고요.”

“그래요, 일은 빨리 처리할수록 좋은 거니까. 더군다나 이런 일이라면 더더욱 그래야 하고.”

윤채경과 하준이 주고받는 대화에 김민정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윤채경이 괜찮다는 듯 말했다.

“괜찮아. 너 샤워하는 동안 대표님께 다 들었으니까. 앞으로 같은 집에서 살게 될 텐데 그 정돈 나도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 훗, 걱정 말고 얼른 밥부터 먹어.”

윤채경이 다시 하준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최 기자님이 왜 그런 기사를 쓰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정 기사를 내보내는 건 아무래도 어렵지 않을까 싶은데. 회사 이미지에도 큰 타격이 올 만한 문제니까.”

하준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우선은 왜 그런 기사가 나왔는지부터 확인해 보려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정정 보도는 어렵더라도 추가 보도만 없게 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

“그렇죠. 추가 보도만 없다면 잠깐 시끄럽다가 말 테니까. 그럼 그런 기사가 있었다는 것도 나중엔 기억 못 할 거고.”

숱한 시간 동안 여배우로서 활동해왔던 윤채경이기에 충분히 할 수 있는 얘기들이었다.

식사를 이어가는 김민정을 바라보며 윤채경이 궁금하다는 듯 물어왔다.

“근데, 민정아. 그동안 소속사는 왜 없이 활동해 왔던 거야? 소속사만 있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일 처리하기가 훨씬 수월했을 텐데. 그럼 너도 그 마음고생 할 필요도 없었을 거고.”

“아, 그게.”

김민정이 젓가락을 잠시 내려놓고선 답해왔다.

“그동안은 스케줄 자체가 많지도 않았고 있더라도 아주 작은 배역들이라 크게 필요성을 못 느꼈거든요. 그리고, 그 일이 있고 난 뒤로는 괜히 트라우마 같은 게 생겨서 좀 망설여지기도 했구요…….”

“음, 하긴. 내가 너라도 그랬을 것 같긴 하다.”

윤채경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입을 열어왔다.

“그래도 앞으로 계속 활동하려면 소속사가 있는 편이 나을 텐데. 더군다나 이번 드라마 하면서는 개인 스태프들도 있어야 할 거고. 네 분량이 적은 게 아닌데 매번 모든 걸 혼자서 다 할 순 없을 거 아냐. 특히 운전은 더더욱 그렇고.”

“아, 네. 그래서 감독님과 첫 미팅 이후로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는 상황이기는 했어요. 작품 들어가기 전엔 아무래도 계약을 마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음. 그치, 그치.”

고개를 끄덕이는 윤채경.

그리고 다시 식사를 이어나가는 하준과 김민정.

그런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던 윤채경의 표정이 갑자기 묘하게 바뀌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였다.

“잠깐…… 지금 민정이 네가 소속사를 빠르게 찾아야 하는 상황인 거잖아, 그렇지?”

질문인지 아닌지 모를 말을 내뱉고는 곧바로 다시 입을 열어오는 윤채경.

“그리고, 어쩌다 보니 이번 일은 우리 대표님이 너를 도와줘야 하는 상황인 거고?”

뜻 모를 표정과 뜻 모를 말들만 꺼내오는 윤채경의 모습에 하준과 김민정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달라붙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윤채경 또한 하준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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