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매번 악몽처럼 느껴지던 그 꿈.
그곳에서 검은 양복 사내들이 건넸던 문서.
조금 전 구명호가 꺼낸 파일 속엔 분명 그곳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로고가 찍혀 있었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던 구명호에게 하준이 곧바로 물었다.
“아저씨, 이 파일에 찍힌 로고. 혹시 어느 기업 건지 알 수 있을까요?”
하준의 물음에 가볍게 시선을 옮기는 구명호.
이내 하준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지하고는 미세하게 표정이 바뀌었다.
“아, 이거 말하는 게냐? 흐음, 글쎄다…… 하도 오래된 거라 나도 기억이 가물가물하구나. 허허, 늙긴 늙은 모양이야.”
어색한 웃음을 짓고는 하준에게 되물어오는 구명호.
“근데 그건 갑자기 왜 묻는 게냐, 하준아.”
“어딘가 낯이 익은 것 같아서요. 분명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데 그게 어디었는지 잘 떠올려지지가 않아서.”
일전에 꿈에서 보았을 때도 분명 낯익게 느껴졌던 그 로고.
하준의 얘기에 구명호가 의미 모를 표정을 잠시 지어 보이더니 뭔가를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이내 기억을 되찾은 듯 입을 열어왔다.
“아아, 이제야 기억이 나는 것 같구나. 예전에 양진 신문이라고 있었는데 그 당시 거기에서 일했던 기자 양반한테 받았던 것 같아. 허허, 나도 이걸 왜 여태껏 가지고 있었는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함이 묻어 있는 듯한 구명호의 태도.
하준은 모친의 사진을 이 낡은 파일 속에 보관하고 있다는 것에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분명 자신 못지않게 모친을 그리워하고 있을 구명호일 텐데.
하준이 좀처럼 파일 속 로고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구명호가 해당 파일을 다시 서랍 속으로 집어넣으며 하준을 바라봤다.
“흠, 아무튼 하준아. 네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다만, 이제 그만 너도 편해져야 하지 않겠니? 정화도 하준이 네가 이러고 있는 걸 원하진 않을 거야. 떠난 네 엄마를 위해서라도 네가 더 행복하게 사는 게 맞는 일이고. 그러니 이제 거기에 대해선 그만 묻어두도록 하자구나.”
구명호의 얘기에 그제야 시선을 거두고는 옅은 한숨을 내뱉는 하준.
오늘도 역시나 답답한 마음은 조금도 해소되질 못했다.
오히려 파일 속 로고로 인해 혼란스러움만 더욱이 가중됐을 뿐이었고.
말을 마친 구명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바둑판을 세팅하기 시작했고, 하준도 테이블로 자릴 옮기기 위해 엉덩이를 뗐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하준의 머릿속엔 여전히 의문이 지워지질 않고 있었다.
‘...... 대체 왜.’
대체 왜 그 꿈속의 로고와 같은 것이 구명호의 서랍 속에 존재하고 있었던 걸까.
그것도 모친의 사진과 함께.
* * *
약 두 시간에 걸친 맞바둑을 끝낸 뒤, 하준은 집으로 가기 위해 정원으로 빠져나왔다.
대문으로 걸어가는 동안 하준은 휴대폰을 꺼내 포털 사이트의 검색창을 켰다.
그러고는 곧바로 입력한 키워드.
바로, ‘양진 신문’이었다.
내내 자신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던 그것.
그런데, 이내 나타나는 결과값들에 하준의 표정이 일순간 바뀌어 버렸다.
“……썬데이 미디어?”
바로, ‘양진 신문’이 지금의 썬데이 미디어의 전신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로고 또한 지금의 썬데이 미디어와 다른 듯싶으면서도 분명 닮아 있었고.
하준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과값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휴대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연예 전문 매체 썬데이 미디어.
연예계와는 전혀 관련 없을 기업인 구명호가 대체 왜 그곳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양진 신문’의 기자를 만났던 걸까.
게다가, 당시에 받았던 파일을 왜 여태껏 가지고 있었던 거고.
하준은 점점 쌓여만 가는 의문들에 잠시 이마에 손을 얹고는 생각에 잠겼다.
검은 양복의 사내들과 붉은색 입술의 여인.
분명 그들이 입고 있던 차림새나 분위기가 올드해 보였던 건 사실이었다.
그랬기에 지금껏 겪어오던 미래 예지와는 분명 다르다 느끼고 있었고.
잠시 멈췄던 걸음을 다시 움직이며 하준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곧 수화기 너머의 상대 목소리가 들려오자, 하준은 왼쪽 손목의 시계를 잠시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최 기자님, 접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지금 잠깐 좀 뵐 수 있을까 하는데.”
* * *
여의도 모처의 한 커피 전문점.
하준의 연락을 받고 나온 최윤섭이 레몬에이드를 들이켜고는 말했다.
“크흡. 그렇지 않아도 저도 오늘 내일 연락드릴까 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허허, 어떻게 저랑 유 대표님이 딱 텔레파시가 통했나 봅니다?”
하준을 향해 씨익 웃어 보이는 최윤섭.
다음 말을 꺼내기 위해 미소를 거두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일전에 유 대표님께서 부탁하신 내용에 대해 좀 알아봤는데요.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별 소득은 없었습니다. 워낙 오래된 일인 데다가 저희 회사도 그사이에 변화가 좀 있어서 남아 있는 자료 자체가 거의 없더라고요.”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였기에 하준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군요.”
“혹시나 해서 친분 있는 다른 언론사 기자들한테도 물어봤는데 말씀 주신 날짜에 교통사고 사망 건은 없다고 하더라고요. 뭐 물론 대표님 기억이 틀릴 일은 없을 테니 그쪽에서 애초에 해당 사건을 취재하지 않았던 거겠죠. 아니면 이미 자료를 폐기했거나.”
최윤섭이 미안한 듯 머쓱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것 참. 제가 뭐라도 도움이 돼드렸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해 괜히 죄송한 마음이 드네요. 다른 것도 아니고 유 대표님 어머님 일이라 꼭 좀 도움이 돼드리고 싶었는데.”
“아닙니다. 애초에 기자님 분야가 아닌 일을 부탁드렸는걸요. 애써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하준의 감사 인사에 최윤섭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요, 유 대표님. 저한테까지 부탁하셨을 정도면 이미 그 전에도 대표님 개인적으로 꽤나 알아보셨을 것 같은데…… 혹시 어머님 사고에 대해 뭔가 걸리는 거라도 있으셨던 걸까요?”
“아뇨. 그렇다기보단 워낙 제가 어렸을 때 일어난 일이라 좀 더 당시의 사건을 명확히 알아보고 싶어서요. 따로 물을 곳이 없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최 기자님께 부탁드렸던 거고요.”
“아아. 그러셨군요.”
맥락만으로도 하준의 가족관계를 이해한 최윤섭이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는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려는 듯 웃음소리를 내왔다.
“하하. 그래도 우리 유 대표님이 이렇게나 잘된 거 보고 계시면 어머님이 엄청 뿌듯하시겠네요! 국내도 모자라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유명인이 되셨으니 말입니다. 하하하.”
최윤섭의 호탕한 웃음에 하준은 대답 대신 미소로 화답했다.
자신의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넘기고 하준이 최윤섭을 바라봤다.
“아, 최 기자님. 아까 말씀하실 때 회사에 변화가 있었다고 하셨는데. 혹시 그게 ‘양진 신문’에서 지금의 썬데이 미디어로 바뀐 걸 말씀하신 걸까요?”
“오, 예. 맞아요. 그건 또 어떻게 아시고, 하하. 역시 우리 유 대표님은 정말 모르는 게 없는 분이네요. 요새 들어오는 우리 신입들도 모르는 애들이 태반이던데, 허허.”
양진 신문이 썬데이 미디어의 전신이라는 걸 확인한 순간, 하준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인물은 최윤섭이었다.
평소 같았다면 전혀 관심도 가지지 않았을 언론사의 연혁이었지만, 자신의 꿈뿐 아니라 구명호의 서재에서까지 같은 로고가 발견된 만큼 결코 가볍게 여길 수가 없었다.
하준이 최윤섭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그 양진 신문이라는 곳에 대해 최 기자님이 아시는 만큼만이라도 얘기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언제, 어떤 계기로 사명이 바뀌게 된 건지, 또 어떤 언론사였는지 등요. 아 물론, 최 기자님도 입사하기 전 일이라 자세히 알진 못하시겠지만.”
다소 갑작스러운 질문에 최윤섭이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으음, 대답해 드리는 거야 어렵진 않지만 혹시 뭐 때문에 그러시는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혹여나 제게 부탁하셨던 일과 관련된 거라면…….”
“아, 아뇨. 그런 건 전혀 아닙니다. 단순히 제 개인적인 호기심에 여쭙는 거니 다른 오해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아, 그러시죠? 하하. 전 또 대표님 표정이 꽤나 심각해 보이길래 혹시나 했습니다.”
다행이라는 표정과 함께 최윤섭이 설명을 시작해 나갔다.
“음, 지금의 썬데이 미디어로 바뀐 지는 한 20 년정도 됐죠? 아, 그보다 좀 더 됐으려나? 무튼 뭐, 이전엔 지금처럼 큰 회사도 아니었고 그냥저냥한 언론사였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 회사가 갑자기 몸집이 커지고 이름을 좀 날리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썬데이미디어로 바뀌게 된 거고요. 예전엔 연예 분야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다 다뤘다던데, 사명을 바꾸면서는 연예 전문 매체로만 나가기로 했다더라고요. 뭐 제가 입사할 땐 이미 국내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언론사였으니까 전략이 제대로 먹힌 거죠.”
최윤섭의 장황한 설명들을 들으며 하준은 구명호의 서랍 속에 있던 파일을 떠올렸다.
지금과 달리 당시엔 다른 분야도 다뤘던 곳이라면 구명호에게 그 물건이 있는 것 자체는 그닥 이상할 게 없었다.
다만, 모친의 사진을 왜 그곳에 보관하고 있는 건지는 여전히 의문일 수밖에 없었지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하준을 바라보며 최윤섭이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저, 대표님……? 정말 그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인 게 맞는 거죠? 아무래도 표정이 좀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아, 아닙니다. 잠깐 다른 생각 좀 하느라.”
그제야 표정을 풀고는 하준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갑자기 연락드렸는데도 이렇게 흔쾌히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최 기자님. 제가 부탁드린 거에 대한 보답도 할 겸 식사 한번 대접해 드릴까 하는데. 아직 저녁 전이시죠?”
평소라면 곧장 반색하는 표정으로 반겨왔을 최윤섭.
그러나 웬일인지 아쉽다는 표정과 함께 살짝 고개를 내저어왔다.
“아이고, 저도 유 대표님이 사 주는 맛있고 비싼 저녁 얻어먹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요. 아쉽게도 오늘은 제가 다음 일정이 있어서 어렵겠네요. 아무래도 다음을 기약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실까요?”
“그럼요. 언제든 괜찮으니 편하실 때 연락 주세요. 여러모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하, 감사는요 뭘. 서로 윈윈 하는 거죠! 자, 그럼 이만 일어나 보실까요?”
저녁 9시가 다 되어가고 있는 시각.
자리에서 일어나는 동안에도 최윤섭은 내내 시계를 힐긋거리고 있었다.
하준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카페를 빠져나온 최윤섭은 곧장 어딘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여의도 내에 있는 어느 한 프라이빗 비즈니스 클럽 앞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