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네?! 저희가 엔딩 무대라고요?!”
“말도 안 돼! 저희 오늘 데뷔날인데요, 대표님……?”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장난…… 이시죠?”
하준이 전해온 엄청난 소식에 사전녹화를 준비하던 멤버들이 일제히 같은 반응들을 보여왔다.
하지만 곧, 하준이 이런 유의 농담을 던지는 스타일이 아니란 걸 깨닫고는 멍한 표정들을 지어 보였다.
무엇보다 하준이라면 충분히 이런 일을 해내고도 남을 인물이었기에.
“이걸 운이 좋다고 표현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우리 입장에선 엄청난 특혜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야. 데뷔 무대와 동시에 엔딩 무대, 그리고 별도의 인터뷰 시간까지 갖게 됐으니까.”
“인터뷰요? 인터뷰라면 어떤.”
조금 전 김문환 PD와 협의된 내용을 전달하자, 멤버들이 허탈한 표정들을 지어왔다.
“허, 무슨 로켓이라도 타고 있는 기분이에요. 아직 데뷔 무대도 갖기 전인데 상황만 놓고 보면 정상급 선배님들이나 하는 그런 걸 하고 있으니까…… 엔딩에 생방 인터뷰라니…….”
“정말 여기 PD님께서 허락하신 거예요 대표님? 저희가 그렇게 해도 된대요?”
하준이 거짓말할 사람은 아니란 걸 알면서도 멤버들은 좀처럼 믿겨지지가 않는 듯 하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하준 또한 충분히 이해할 만한 있는 반응들이었다.
행사 여러 개와도 바꿀 수 없다는 음방 스케줄.
신인 그룹에겐 그만큼 잡기도 힘들뿐더러, 잡는다 해도 특별한 배려 따위를 기대할 순 없었다.
그나마 육아 프로그램이 NTV 예능이라는 것,
그리고 멤버들의 인지도가 일반적인 신인 그룹하고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는 걸로 더블 타이틀곡 무대의 혜택을 받을 수 있던 거였고.
그런데, 정상급 아이돌이나 할 수 있다는 엔딩 무대를, 그것도 별도의 인터뷰 시간까지 주어지면서 데뷔 무대를 맞이하게 됐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 수밖엔 없었다.
멤버들이 여전히 표정들을 풀지 못하고 있던 그때, 누군가 대기실의 문을 노크해 왔다.
곧이어 문이 열리며 A4 용지를 든 세 명의 여성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희 작가들인데 인터뷰 관련해서 질문지 좀 전달 드리러 왔어요. 잠깐 시간 괜찮으시죠?”
하준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자, 작가진들이 멤버들에게로 다가왔다.
“이게 뒷순서가 펑크 나는 바람에 갑자기 잡힌 일정이라 여러분이 시간을 좀 충분히 끌어줘야 돼요. 물론 일부러 시간 끈다는 느낌 없이 자연스럽게! 가뜩이나 데뷔 첫날이라 긴장될 텐데 이런 중대한 일까지 맡기게 돼서 괜히 죄송하네요.”
“아뇨, 아뇨. 죄송하긴요! 오히려 저희가 너무 감사하죠. 저희 같은 신인 그룹한테 이렇게나 말도 안 되는 좋은 기회를 주셨는데!”
“훗, 그렇게 생각해 주면 저희도 고맙고요. 그래도 이슈 하나만큼은 정말 제대로 잡을 수 있을 거예요. 데뷔 무대와 동시에 엔딩 무대! 이거 전무후무한 타이틀인 거 알죠? 지상파 3사 다 통틀어도 이런 진기명기한 기록은 찾아보지도 못해요. 호호.”
“컥. 정, 정말요?”
놀란 듯 눈동자를 키우는 멤버들의 반응에 메인 작가가 웃으며 하준을 가리켰다.
“이게 다 저기 서 계신 대표님 덕분인 거 알죠? 마침 순서가 1위 후보 바로 앞이라 이런 기회도 찾아올 수 있었던 거니까.”
메인 작가의 말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듯 멤버들이 물음표 같은 표정을 짓고 있자, 그녀가 멤버들을 훑으며 말을 이었다.
“어머, 다들 모르는 얼굴들이네? 가 아무리 일반적인 신인 그룹보다는 인지도가 높다고는 해도 그것만으로 우리가 이렇게 뒷순서를 주진 못하죠. 여기저기서 항의 들어올 게 뻔한데. 그럼 그만한 명분이 있어야 하는 거고.”
그녀가 다시 한번 하준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유 대표님께서 무대에 엄청난 지원을 쏟아부으신 덕분에 무대 순서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어요. 이미 한 달 전부터 세팅해 둔 무대라 뒷순서로 배치할 수밖엔 없었으니까. 그렇죠, 대표님?”
메인 작가의 물음에 하준은 대답 대신 옅은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러자 멤버들이 또 한 번 눈동자를 키우며 일제히 하준을 쳐다봤다.
“저희 대표님이요……?”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는 멤버들에게 이번엔 옆에 있던 막내 작가가 설명을 이어왔다.
“다들 음악 방송 무대를 방송국에서 다 공짜로 세팅해 주는 줄 알고 있더라고요. 실상은 전혀 그게 아닌데. 무대 디자인 같은 경우엔 소속사에서 신경 쓰는 만큼 준비가 되는 거예요. 좋은 무대는 그만큼 소속사에서 많은 비용을 들였다는 뜻이고.”
막내 작가의 말에 메인 작가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아마 더블 타이틀곡 무대 두 개 다 합치면 수천은 들었을걸요? 물론 거기에 대한 모든 비용은 여기 계신 유 대표님이 다 지불하신 거고! 그 덕에 지금 이런 상황까지 맞이하게 된 거니까 다들 평생 대표님한테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 같은데에? 후훗.”
김예슬과 정진웅은 알고 있던, 하지만 멤버들은 전혀 모르고 있던 이야기.
지금의 이 모든 상황을 가능케 한 하준의 세심한 배려에 멤버들이 일제히 감동의 눈빛들을 보내왔다.
“대표님…….”
* * *
더블 타이틀곡 <우산>의 사전녹화를 무사히 끝마치고 드디어 기다려왔던 생방송이 시작됐다.
앞선 13팀의 무대는 이미 끝마친 상황.
이제 남은 무대는 단 두 팀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하준의 대기실 화면 위론 두 명의 남녀 MC와 함께 인터뷰를 나누고 있는 의 모습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야, 지금 이 현장에서 들리고 있는 환호성 소리만 들어도 정말 역대급 대형 신인의 탄생이라는 걸 체감할 수 있을 정도인데요! 곧 데뷔 무대를 앞두고 있는 소감은 어떠신가요?”
“어, 음. 분명 아까 리허설 때까지만 해도 엄청 긴장이 되고 막 온몸이 떨리는 것 같고 그랬거든요? 근데 막상 이렇게 직접 눈앞에서 팬분들의 환호성을 듣고 있으니까 오히려 긴장감이 다 사라지는 것 같아요. 용기가 난다고 해야 할까? 얼른 데뷔 무대를 보여 드려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막 그래요.”
“오오, 역시 대형 신인 그룹답게 전혀 긴장하지 않는 모습인데요! 이번 더블 타이틀곡 <로즈>와 <우산>은 어떤 곡인지 간략하게나마 소개 좀 부탁드릴게요!”
MC의 물음에 멤버들이 자연스레 마이크를 이준에게로 넘겼다.
“네, 우선 첫 번째 타이틀곡 <로즈>는 카인 작곡가님께서 전체 프로듀싱을 다 맡아주신 곡이고요. 곡 콘셉트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한 한 남자의 뜨거운 마음을 붉은색 장미에 비유해 풀어낸 곡입니다. 그래서 가사는 물론, 전반적인 느낌과 안무도 정열적이고 파워풀하게 진행되게 되고요.”
“오, 곡 콘셉트만 들어도 육아를 할 때의 모습과는 180도 다른 느낌일 것 같은데요? 그럼 두 번째 타이틀곡 <우산>에 대해서도 설명 한번 부탁드릴게요! 다른 것보다 <우산>은 이준 씨와 안토니 스미스 씨가 공동 작업한 걸로 엄청 화제가 됐던 곡이잖아요?”
“아, 네. <우산>은 헤어진 연인에 대한 마음을 슬픔과 원망이란 감정보단, 아름답고 좋았던 추억으로 풀어낸 곡이에요. 사실 이 얘긴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밝히는 건데, <우산>은 멤버들을 생각하면서 쓴 가사이기도 해요. 쏟아지는 비를 맞더라도 함께라면 서로가 우산이 되어줄 수 있다는 그런. 전반적인 곡의 느낌이나 마스터링, 그리고 믹싱 같은 부분은 안토니 형이 하나하나 세심하게 봐주셨고요.”
“오오, 다른 멤버분들은 정말로 처음 들었다는 표정들인데요. 그럼 세계적인 가수 안토니 씨와 함께 작업한 곡인 만큼 조만간 빌보드에서도 만나볼 수 있는 걸까요?”
기대감 가득한 MC의 물음에 이준이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요, 꼭 가고 싶습니다. 빌보드.”
이준의 자신감 넘치는 발언과 동시에,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팬들의 환호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
“네! 의 앞으로의 활동도 많은 기대 가져보도록 하겠고요. 그럼 의 생에 첫 데뷔 무대는 잠시 후에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생방송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긴장한 기색 없이 무사히 인터뷰를 끝마친 멤버들.
하준은 멤버들이 화면에서 사라지자, 직접 멤버들의 데뷔 무대를 지켜보기 위해 무대 앞으로 장소를 옮겨왔다.
앞선 순서의 무대가 진행되는 동안 오늘 음악 방송의 전 출연자들이 무대 앞으로 모이기 시작했고.
그들의 무대가 끝이 나자, 드디어 멤버들이 무대 위로 모여 대열을 갖추었다.
“와아아아아아!!! 꽃길만 걷자아!!”
열네 팀의 가수, 그리고 그들의 모든 팬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침내 의 데뷔곡 <로즈>가 흘러나오기 시작.
수년간의 반지하방 생활에도 꿈을 포기하지 않은 채 묵묵히 버텨왔던 멤버들의 첫 데뷔 무대는.
그렇게 화려한 안무와 함께 꽃을 피우며 시작되었다.
* * *
-이야, 유 대표님. 제가 방금 뭘 본 거죠? 데뷔 무대와 동시에 엔딩 무대요? 하하, 이것 참. 혹시 제가 편집된 걸 잘못 보고 있나 했더니 생방이더라고요? 대체 이번엔 또 어떤 능력을 부리신 겁니까?
멤버들의 첫 데뷔 무대가 무사히 끝나고 1위 발표를 위해 모두가 무대로 모여 있던 그때.
최윤섭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하준은 잠시 조용한 곳으로 자릴 옮기고는 답했다.
“어쩌다 보니 운이 좋게 그렇게 됐네요. 바쁘신 시간일 텐데 마침 보고 계셨나 보네요.”
-제가 또 팔도의 전속 기자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다른 것도 아니고 대표님이 가장 아끼는 애들 데뷔 무댄데. 아무리 바빠도 그건 챙겨봐야죠, 크큭. 아, 그 덕에 저도 기삿거리 하나 생기고 좋잖습니까?
“매번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최 기자님. 조만간 제가 식사 한번 사도록 할게요.”
-아이고, 그럼 저야 굳이 사양은 않겠습니다? 하하. 그나저나 신인 그룹이 데뷔 무대와 동시에 엔딩까지 장식하는 경우는 저도 기자생활하면서 처음 보는 것 같은데요?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 귀띔이라도 해주세요. 그럼 제가 대표님의 능력을 확 부각시켜서 써드릴라니까. 크큭.
“음, 정 쓰셔야 한다면 이번엔 과하지 않게 가볍게 써주세요. 자칫 잘못하면 괜한 오해거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하준의 우려 섞인 얘기에 최윤섭이 이해했다는 듯 곧바로 수긍해 왔다.
-으흠. 생각해 보니 뭐 그럴 수도 있긴 하겠네요. 괜히 특혜 논란이 생길 수도 있는 거고. 하하,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럼 이번엔 감동의 데뷔 스토리에 초점을 맞춰서 소설 하나 써봐야겠네요. 대표님 나중에 보시고 펑펑 우시면 안 됩니다?
“최 기자님이 쓴 소설이라면 저도 장담은 못 하겠네요. 워낙 필력이 남다르시니.”
팬들의 환호성 소리에 하준이 잠시 무대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1위 발표를 모두 끝마친 가수들이 하나둘 무대를 내려오고 있었다.
-아무튼, 데뷔 축하드리고요, 대표님. 조만간 시간 되실 때 식사 한번 하는 걸로 하시죠. 그럼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네, 그러시죠.”
최윤섭과 통화를 마무리 지으려던 그때, 문득 하준의 머릿속으로 내내 가지고 있던 어떠한 생각 하나가 스쳐 갔다.
“아참, 최 기자님. 혹시 가능하다면 부탁 하나만 드릴 수 있을까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부탁이요? 예, 그럼요. 뭔데요?
최윤섭의 되물음에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하준.
몇 초간의 침묵이 흐른 뒤, 천천히 입술을 열어왔다.
“20년 전 있었던 사고에 대해 한번 알아봐 주실 수 있을까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