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대박. 진짜? 이준이가 그렇게 얘기했다고? 와…… 지유 걔 완전 감동이었겠는데?”
드라이 리허설을 위해 방송국으로 향하는 차 안.
뒤늦게 합류한 김예슬이 조금 전 숍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듣고는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원래 일반 숍이랑은 다르게 연예인숍은 그런 일이 종종 생기긴 해. 하도 인성 더러운 애들이 많아서. 그럼 제일 스트레스 받는 게 지유 같은 보조 스태프들이고. 디자이너한텐 큰소리치기 그러니까 만만한 보조 스태프들만 갈구는 거지. 되도 안 한 것들로.”
김예슬의 말에 강준이가 공감한다는 듯 말했다.
“옆에서 보고 있는데 정말 말도 안 되는 걸로 트집 잡는 것 같긴 하더라고요. 휴대폰에 물방울 좀 튄 걸로 그러는 것 같던데. TV에서 보던 이미지랑은 너무 달라서 좀 놀랐어요.”
“TV에서 볼 땐 정말 천상 요정이 따로 없는 것 같아 보였는데! 아까 그 모습은 정말 동화 속에 나오는 마녀 같았다니까요? 왜 있잖아요, 백설공주한테 사과 먹이려고 하는 마귀할멈. 딱 그거였어요.”
지호의 얘기에 듣고 있던 멤버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모두가 공감한다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풉. 그나저나 이준이 진짜 멋있었겠다! 만약 내가 지유였으면 눈에서 하트가 절로 나왔겠는데? 마치 백마 탄 왕자님이라도 만난 것처럼?”
김예슬의 말에 이준이 고개를 내저었다.
“뭘 또 그렇게까지요.”
“진짜라니까? 이준이 네가 몰라서 그렇지, 보조 스태프들이 서러운 일이 얼마나 많다고. 그렇다고 디자이너 쌤이 잘 챙겨주는 것도 아니고. 가뜩이나 숍 내 위계질서도 엄한데 그런 진상 손님까지 만나면 어휴, 정말 다 때려치우고 싶은 심정이라니까?”
김예슬이 이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생각해 봐. 그런 상황에서 이준이 네가 ‘제가 책임질 테니 선생님이 제 스타일링 맡아주세요’ 하고 딱! 한마디 내뱉으면 아주 감동의 눈물이 줄줄 흐르지 않겠어? 거기에 네 살인미소까지 얹어지면 그냥 끝난 거지 뭐.”
김예슬의 다소 과장된 표현에 이준이 민망한 듯 말을 정정했다.
“살인미소 같은 것도 아니었고 말하는 뉘앙스도 그렇진 않았어요. 저야 그냥 아무나 해주셔도 상관없을 것 같아서 그런 거고.”
하지만 다른 멤버들의 생각은 달랐는지, 김예슬의 말에 격하게 공감을 표해왔다.
“맞아요, 그분 표정이 엄청 감동한 것처럼 보였어요! 막 눈물도 고였었던 것 같고?”
“아냐, 흘렸어. 내가 봤어. 뺨 타고 턱까지 흘러내리는 거.”
“크으, 이준 형 아까 진짜 멋있었는데! 다른 스태프들도 옆에서 막 소곤대는데 이준 형이 우리 리더라는 게 엄청 자랑스럽더라니까요? ‘제가 책임 질게요’ 그건 정말 올해 최고의 멘트였다. 크흐.”
“그치? 꼭 드라마 대사 같더라, 크크큭.”
멤버들의 연이은 말들에 이준이 못말린다는 듯 고개를 짧게 내저었다.
그러고는 내심 마음에 걸렸는지 앞자리의 하준을 바라봤다.
“대표님한테 상의도 없이 제 마음대로 행동해서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신중히 행동하도록 할게요.”
반성이 담긴 이준의 어투에 하준도 이준 쪽으로 고개를 돌려왔다.
“그 말은 다음번에 똑같은 상황이오면 그땐 모른 척한다는 건가?”
하준의 물음에 이준이 잠시 머뭇거리자, 하준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잘했어. 앞으로 또 같은 상황이 오더라도 오늘같이 행동해.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그런 상황이라면 뒷일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까. 알겠지?”
“아, 네. 대표님.”
하준이 다시 고개를 돌리자, 김예슬이 곧바로 입을 열어왔다.
“호호, 이준이 같은 리더가 있어서 이 팀은 무조건 잘될 수밖에 없겠네. 아~ 아깝다. 아까 그 상황을 내가 직접 봤어야 했는데!”
아쉽다는 표정을 잠깐 지어 보이고는 김예슬이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얘기지만, 너희도 숍 같은 곳에선 항상 말이나 행동 조심해야 된다? 그냥 다 머리 하고 메이크업 받으러 온 것 같지만, 거기서 얼마나 많은 얘기들이 오고 간다고. 인성은 물론이거니와 연예인들 사생활에 비밀들까지 온갖 것들을 다 주워 담는다니까, 직원들은? 물론 어디 가서 떠벌리거나 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또 모르지. 열받으면 누구든 확 터뜨려 버릴 수도 있는 거고!”
연예인 숍에서만 수년간 일해 왔던 김예슬의 뼈 있는 조언에 멤버들이 일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 막 데뷔를 앞두고 있는 멤버들에겐 모든 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될 수밖에 없는 말이었으니까.
잠시 후, 멤버들을 태운 차량이 방송국 앞에 다다르자 창문 밖에서 환호성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밖을 바라보자, 작은 바리게이트 속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그 앞으론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일렬로 대기하고 있었다.
“어……? 생방송은 10시간이나 뒤에 하는데 벌써부터 이렇게 모여 계 신 거예요?”
음악 방송의 생방 시작 시간은 오후 6시. 현재 시각 오전 8시.
오전 드라이 리허설을 시작으로 오후에는 카메라 리허설과 사전 녹화가 진행된다.
그리고 그 모든 게 끝이 나야 비로소 생방송이 시작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른 시간부터 나와 있는 팬들과 카메라의 모습에 멤버들은 잠시 놀란 표정들을 지어 보였다.
물론, 모여 있는 인원들이 자신의 팬들일 거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은 채로.
잠시 후, 멈춘 차량의 문이 열리며 멤버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바리게이트 속의 인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환호성들을 내뱉어왔다.
“와아아아아!!”
마련된 포토라인 앞으로 걸어가자, 그제야 멤버들의 시야에 각종 플래카드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앞으로 꽃길만 걷자! !]
[내 맘속 하나뿐인 VIP는 바로 서이준!]
[서이준, 이은호, 김강준, 김지호, 정하늘 FOREVER!]
맨 앞줄에 서서 멤버들을 향해 플래카드를 마구 흔들어 보이는 팬들.
이 이른 시간부터 자신들을 응원하러 나온 그 모습에 멤버들의 얼굴 위론 감동이 물들기 시작했다.
“다 같이 포즈 한번 취해주세요!”
플래쉬를 터뜨리던 기자들의 요청에 멤버들이 다소 어색한 자세로 포즈들을 취하기 시작했다.
공식석상은 처음이었던 터라 이런 요청이 올 거라곤 미처 예상치 못한 듯싶었다.
잠깐의 플래시 세례가 이어진 뒤, 멤버들이 방송국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겨 나갔다.
걸어가는 동안에도 팬들 한 명 한 명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멤버들.
이른 시간부터 나와 기다려 준 팬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함께 섞여 있었다.
그렇게 하준과 멤버들이 입구 쪽에 다다를 쯤.
갑자기 뒤쪽 바리게이트 속에서 엄청난 목청으로 한 소녀가 절규하듯 목소리를 내뱉어왔다.
“으악!! 하준 오빠!! 사랑해요!! 으어억!!”
뜬금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여고생으로 추정되는 한 소녀가 절규하듯 또 한 번 목소리를 내왔다.
“하준 오빠!! 오빠는 제 6의 멤버예요!!”
진심을 다해 내지르는 소녀의 모습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박장대소하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환호성을 내질러 오자, 기자들도 재밌다는 듯 하준을 향해 플레쉬를 마구 터뜨리기 시작했다.
“……아.”
그냥 무시하고 갈 수는 없을 것 같아 하준이 어색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숙이자, 그제야 소녀도 정상으로 돌아온 듯 온화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푸하, 누가 보면 6인조 그룹인 줄 알겠어요. 진짜 웃겨.”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김예슬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바깥에 서 있는 팬들을 훑으며 작게 속삭여왔다.
“오늘 무대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데요? 후훗.”
* * *
잠시 후, 배정받은 대기실로 멤버들이 둘러 모였다.
멤버들의 가슴 위론 각자의 이름이 적힌 큼지막한 스티커들이 붙어 있었고, 잠시 후 시작될 드라이 리허설을 위해 간단히 안무를 되새기고 있었다.
“와, 무대 순서가 완전 뒤쪽이네요? 신인 그룹이면 보통 앞쪽으로 배정되게 마련인데.”
하준이 잠시 자릴 비운 사이, 오늘의 무대 순서를 확인한 김예슬이 다소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정진웅이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그거야 대표님이 그만큼 신경을 많이 쓰셨으니까 그렇죠. 오늘 무대 세팅에 들인 돈이 얼만데. 못해도 2~3천은 넘을걸요?”
“에? 무대 세팅에요? 무슨 무대 세팅이 그렇게나.”
“그럼 뭐 무대 세트는 방송국에서 공짜로 해주는 줄 알았어요? 이게 다 대표님께서 한 달 전부터 신경 쓰신 결과물이라고요. 오로지 멤버들의 데뷔 무대만을 위해서!”
어깨까지 펴며 한껏 목소리를 키우는 정진웅의 모습에 김예슬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근데 가만, 가만 듣자 하니까. 돈이든 노력이든 신경 쓴 건 대표님인데. 왜 진웅 씨가 이렇게 나대는 거지? 꼭 마치 자기가 다 해낸 것처럼?”
“……제가 뭘 또 언제.”
정진웅의 말을 자르며 김예슬이 물어왔다.
“진웅 씨, 주차 연습은 계속하고 있죠? 저번에 보니까 아직도 평행주차는 굉장히 서툰 것 같던데. 차 뒤에도 이미 몇 번 긁어먹은 것 같고. 대표님한테 제가 확 얘기해 버릴까요?”
“예……? 아, 아뇨! 그렇지 않아도 제가 조만간 수리해 두려고 했어요!”
“좀 잘합시다, 응?”
“하하…… 예, 그래야죠. 하하.”
두 사람의 태도가 완전히 역전돼 버린 그때, 멤버들 대기실의 문이 열리며 조연출이 멤버들을 불러왔다.
“ 드라이 리허설 갈게요!”
* * *
멤버들의 바로 앞 순서 팀의 드라이 리허설이 진행되는 동안, 하준도 멤버들의 리허설을 지켜보기 위해 무대 앞으로 옮겨왔다.
의 무대를 지켜보며 정진웅이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와, 우리가 드리머보다도 뒷순서라니. 이게 다 대표님이 무대 세팅에 공들인 덕분인 것 같습니다! 후후.”
그동안 멤버들의 데뷔 무대를 위해 하준이 얼마나 신경 써왔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정진웅.
오늘의 무대 순서 또한 그런 하준의 영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하준과 정진웅의 귀에도 들릴 만한 크기로 누군가가 불만 섞인 목소리를 내뱉어왔다.
“참나. 이게 말이 되냐? 이제 막 데뷔하는 신인 그룹보다 앞 순서라는 게? 이게 누가 봐도 특혜가 아니면 뭐냐고!”
“아이참, 듣겠어요 실장님. 바로 앞에 있는데.”
“들으면? 아, 지들도 들어야 알 거 아냐.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상황인지! 참나, 예능 프로로 미리 얼굴 좀 알렸으면 다야? 아님, 대표가 미국에서 이름 좀 날린 사람이면 이렇게 특혜를 줘도 된다는 거야? 특혜도 적당해야 그냥 눈 감아주든 할 거 아니냐고!”
순서를 운운하는 것 보니 아무래도 의 실장급 매니저인 모양.
분명 하준에게도 들릴 만한 크기라는 걸 알면서도 대놓고 들으라는 듯 거칠게 불만을 쏟아내고 있었다.
“후우. 이제 NTV도 별수 없구만, 별수 없어. 어떻게 3집차 아이돌 그룹을 이딴 애송이 신인 그룹보다도 앞 순서로 배정할 수 있는지. 미래가 안 봐도 훤하다, 훤해. 쯔쯧.”
그의 그칠 줄 모르는 거친 언행에 하준도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이해 못 할 반응도 아니었기에 그냥 흘려 넘기려 했지만, 조금 전 그 발언만큼은 그냥 넘기기가 어려웠다.
자신의 소속 가수가 생판 모르는 누군가에게 애송이란 말을 들을 이유는 전혀 없었기에.
그와 시선을 마주한 하준이 그에게 다가가기 위해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그런데 그때, 하준보다 앞서 누군가의 뾰족한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오더니.
곧이어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왔다.
“후우,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 이거 너무 기분이 나빠서 안 되겠네.”
바로 이 방송국의 주인, 구세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