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잠시 후, 하준이 대표실 문을 열자 찻잔을 들어 올리던 남자가 하준을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듯한 헤어에 얇은 반뿔테 안경. 그리고 가느다란 눈매까지.
왜소한 듯 선해 보이기도 하는 남자의 외모를 훑으며, 하준이 그를 향해 다가갔다.
“B&D에서 오셨다고요.”
“아, 네. 맞습니다! 유하준 대표님 맞으시죠?”
서글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남자가 상의 안주머니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건넸다.
“B&D 오창석 본부장이라고 합니다. 제가 예고도 없이 갑자기 찾아와서 많이 놀라셨죠? 혹시나 왔다가 안 계시면 그냥 다음에 찾아뵐까 했는데. 마침 계신다고 하셔서, 하하. 온 김에 인사도 나누고 안면도 트고 가면 좋겠다 싶어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기다렸습니다, 대표님.”
꽤나 장황한 말들을 그가 이어가는 동안, 하준은 그가 건넨 명함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오창석.
이름 세 글자와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매치되는 순간, 하준은 그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바로, 지난번 가라오케 주차장에서 박성환과 함께 차 안에 있던 남자.
자신을 찾아온 연유에 대해 아직까진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기에, 하준은 고개를 들고는 소파 쪽을 가리켰다.
“우선 앉으시죠.”
말을 내뱉고는 상석으로 걸음을 옮기는 하준.
자리에 앉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B&D 본부장 정도나 되시는 분이 단순히 저랑 인사만 나누겠다고 여기까지 오신 건 아닐 것 같은데. 바쁘신 분일 테니 바로 본론부터 얘기하셔도 됩니다.”
지난번 차 안에서의 대화들이 여전히 불쾌하게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하준.
그런 하준의 냉담한 어투에도 오창석은 서글한 웃음을 유지하며 말했다.
“하하, 참. 역시 능력만큼이나 눈치도 빠르신 분이군요. 물론 단순히 인사만 나누겠다고 온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전혀 없는 얘긴 아니었습니다. 다른 분도 아니고 우리 채경이 새 소속사 대표님이신데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 정도는 드리는 게 예의이기도 하니까요.”
하준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민망한 듯 잠시 헛기침을 내뱉고는 오창석이 다시 입을 열어왔다.
“으흠. 우선 제가 찾아온 연유를 말씀드리자면, 저희 대표님께서 언제 한번 대표님과 식사 자릴 한번 갖고자 하십니다. 말씀드렸듯이 채경이 새 소속사 대표님이시기도 하고, 또 같은 업계에서 일하다 보면 앞으로도 자주 왕래가 있을 수밖엔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이번 기회에 서로 안면이라도 터놓으면 여러모로 도움 주고받을 일이 있지 않을까 싶으신 것 같은데. 하하. 아, 저희 대표님이 누구신지는 잘 아시죠?”
당연하다는 듯 묻고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리는 오창석.
이번 SBC 제작사 관련 내막을 보고하자, 대노하기보다는 흥미롭다는 듯 눈빛을 빛내왔던 박성환의 얼굴을 떠올렸다.
평소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짓밟으려고 했었을 그의 성미였건만, 웬일인지 이번만큼은 적으로 만드는 것보단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 시작을 위해, 자신을 이곳으로 직접 보낸 거였고.
박성환의 의중과 그가 내걸고자 하는 제안.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의 팔도에겐 더할 나위 없이 파격적일 것이기에, 오창석은 하준의 표정을 살피며 한껏 여유로운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오창석이 찻잔을 들어 차를 음미해가던 그때, 하준이 입을 열었다.
“제가 꼭 알아야 하는 분입니까?”
단조로우면서도 건조하게 내뱉은 하준의 음성.
조금도 예상치 못했던 하준의 답변에 오창석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예? 지금 뭐라고.”
“마치 꼭 제가 꼭 알아야 하는 분인 것처럼 말씀하시길래요. 물론 윤채경 씨 전 소속사 대표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제가 아는 건 딱 그 정도 선이면 충분하지 않나 싶은데.”
순간적으로 멍한 표정이 돼버린 오창석이 입을 반쯤 벌린 채 황당한 얼굴로 하준을 바라봤다.
물론 그의 이력과 능력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박성환을 이런 식으로 평가하는 이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같은 업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그와 친분을 쌓아보려 안달이 나야 정상인 건데.
하물며 이런 동네 구멍가게 같은 신생 기획사의 대표라면 더더욱.
‘아무래도 지금껏 미국에서만 일을 해오다 보니 이쪽 생태계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모양인데. 게다가, 최근엔 콧대도 높아질 만큼 높아져 있을 거고.’
오창석은 이런저런 하준의 최근 상황을 고려했을 때,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며 이해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곧 다시 미소를 띠며 하준을 바라봤다.
“아아, 그렇죠, 하하. 자기 나라 대통령에도 관심 없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충분히 그러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후후…… 그래도 이 업계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워낙 입지적인 분이시라 한번 알아두시면 앞으로도 절대 손해 보는 일은 없으실 겁니다. 뭐 좋은 선배님 하나 생긴다고 생각하셔도 되고요. 하하.”
오창석의 얘기에 하준이 실소를 머금었다.
“제가 미국에서 꽤 오래 지내고 오다 보니 선배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딱히 필요성도 못 느끼겠고요. 제안은 감사하나, 말씀하신 식사는 다음번에 자연스러운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 하는 걸로 하시죠. 대표님께도 그렇게 전해주시고요.”
말을 마치고는 오창석의 찻잔을 가리키는 하준.
“그럼 차는 마저 다 드시고.”
지금껏 듣도 보도 못한 유형의 성격과 태도.
팔도를 방문하기 전 예상했던 그림과는 완전히 달라져 버린 지금의 상황에, 오창석의 머릿속은 당황스러움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냥 이렇게 돌아갔다가는 박성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안 봐도 훤한 상황.
오창석은 꾹 참고 다시 입술을 뗐다.
“흐음. 예, 알겠습니다. 대표님이 정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저도 굳이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저희 대표님께서 왜 유 대표님을 만나고자 하시는지 아신다면 분명 대표님도 생각이 달라지실 것 같은데.”
애초에 자신은 두 대표 간의 자리만 마련해 주면 끝났을 상황.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박성환을 대신해 그 얘기를 꺼내기로 했다.
오창석이 반뿔테 안경을 고쳐 잡고는 말을 이었다.
“아시는진 모르겠지만 저희 B&D에선 가수 쪽으로도 계열사를 따로 두고 있습니다. 물론 현재의 B&D처럼 압도적인 위치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TGM, U&U 같은 대형기획사 다음으로는 전혀 꿀리지 않는 곳이죠. 그리고, 저희 대표님께선 그 두 회사를 뛰어넘을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계획을 갖고 계시고요.”
국내 대형 기획사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우는 TGM과 U&U.
음악 쪽으로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두 회사였고, 오창석의 말처럼 B&D의 자회사 미드엔 엔터가 여타 회사들과 함께 그 아래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하준 또한 그 부분에 대해선 모르지 않고 있었고.
다음 말을 기다리자, 오창석이 입가에 뜻 모를 미소를 띄워왔다.
“저희 대표님의 그 계획 아래 바로 유 대표님이 계십니다. 좀 더 쉽게 말씀드리자면, 유 대표님을 저희가 모셔가고자 하는 거죠.”
단번에 이해하기 힘든 그의 말.
오창석이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저희 미드엔 엔터의 새로운 수장으로 유 대표님이 와주시길 바랍니다. 물론 대표님의 과거 이력이나 능력을 고려해 업계 최고의 대우는 당연히 보장해 드릴 거고요. 지금의 팔도 아티스트나 직원들 모두 그대로 데려오시는 건 물론, 대표님이 원하는 조건이라면 뭐든 다 들어줄 의향이 있으시다는 게 저희 대표님의 뜻입니다.”
미드엔 엔터의 대표 자리.
그리고 업계 최고의 대우.
분명 신생 기획사에게 파격적인 합병 제안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신생 기획사라는 전제하에.
하지만, 하준이 그 제안에 조금이라도 마음이 움직일 리는 만무했다.
게다가, 그 제안을 걸어온 상대가 B&D 대표 박성환이라면 더더욱.
오창석의 제안에 하준은 대답 대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단칼에 거절할 만한 말이었지만, 하준의 마음속에 강한 의구심이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박성환이 왜 자신에게 이런 제안을 걸어오는 걸까.
합병을 통해 윤채경을 다시 자신의 소속으로 만들려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지.
지난번 미래 예지 때부터 품고 있던 불길한 느낌이 자꾸만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 하준은 찝찝한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반면 하준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오창석은 드디어 먹혔구나라는 생각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후훗. 역시 제아무리 콧대가 높다한들 이런 제안에 흔들리지 않을 수는 없겠지. 뭐…… 좀 배가 아프긴 하지만.’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박성환의 밑에서 온갖 뒤치다꺼리를 해온 오창석.
그런데 자신이 아닌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신생 기획사 대표에게 이런 엄청난 자리를 맡긴다니.
당연히 탐탁지 않을 수밖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박성환에게 티를 낼 수는 없는 법.
자신에겐 더 큰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하루하루 박성환의 밑에서 버티고 있는 그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하준이 마침내 입을 열였다.
“죄송하지만 주신 제안은 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지금 제가 맡고 있는 소속 연예인들만으로도 이미 충분해서요.”
말을 마친 하준은 소파에서 일어나 자신의 자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오창석이 꽤나 굳은 표정으로 하준의 뒷모습에 대고 말했다.
“후…… 유 대표님. 이건 정말 예의가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닙니까? 직접 찾아온 성의를 봐서라도 못 이기는 척 식사라도 한번 하자고 하는 게 예의 아닌가요?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나 참.”
“사전 약속 없이 무작정 찾아오신 건 본부장님 쪽인 것 같은데요. 제가 생각해 오던 예의의 정의랑은 좀 다르게 생각하고 계신 것 같네요. 기분 나쁘셨다면 그 부분은 제가 사과드리도록 하죠.”
그러고는 곧바로 자신의 앞에 놓인 전화기의 버튼을 누르는 하준.
“지혜 씨. 손님 나가시니까 뒷정리 좀 부탁해요.”
하준의 얘기에 오창석의 얼굴이 한층 더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결국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 후회하시는 날이 올 겁니다. 고작 이런 신생 기획사가 커봐야 얼마나 커질지 저도 제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도록 하죠.”
하준을 노려보고는 문을 거칠게 닫고 대표실을 빠져나가는 오창석.
뒤이어 김지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참나. 여기가 지네 사무실이야? 문 고장 나면 지가 물어줄 것도 아니면서 어디!”
못마땅한 표정으로 찻잔을 치우기 위해 테이블 쪽으로 다가온 김지혜가 테이블 위에 놓인 명함을 보고는 물어왔다.
“본부장? 대표님이랑 무슨 얘길 나눴길래 본부장이나 되는 사람이 저렇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서 나가요? 제 인사도 완전 무시해 버리던데.”
“별거 아냐. 치우면서 그 명함도 같이 버려줘.”
“아, 네. 대표님.”
잠시 후, 김지혜가 찻잔을 들고 대표실을 빠져나갔고.
하준은 그제야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이상하리만큼 자꾸만 그와 엮이는 듯한 느낌.
그가 어떤 속셈을 가지고 자신에게 이런 제안을 걸어온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오늘의 일을 계기로 자신을 향한 그의 호의는 180도 바뀔 거라는 것.
적개심으로 바뀐 그 마음으로 앞으로 또 어떤 일을 벌여올지 알 수 없다는 것.
“…….”
단순히 멤버들 하나만을 바라보고 한국으로 돌아왔던 하준.
하지만, 애초에 자신이 세웠던 단 하나의 목표를 이제는 더 크게 확장시켜야 할 때가 된 듯싶었다.
* * *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렸던 의 데뷔곡 음원이 발매됐다.
데뷔곡 ‘로즈’뿐 아니라, 더블타이틀곡인 ‘우산’까지.
그리고, 그 두 곡의 메론 차트 첫 순위는.
모두 10위권 안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