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꾸는 스타 메이커-45화 (46/165)

45화

“예?!”

같은 날 오후, SBC 드라마국 회의실.

조금 전 하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로 인해, 이재호가 입까지 들어갔던 커피를 그대로 종이컵으로 다시 내뱉었다.

“제, 제작비를 끌어오셨다고요?! 그것도 영신 G&M에서 제작 지원이랑 협찬을 다 제공하는 형태로요?!”

믿을 수 없다는 듯, 동공을 무척이나 팽창시키며 물어오는 이재호의 말에 하준이 여유롭게 답했다.

“네. 대본상으론 대부분의 회차에 회사 신이 꼭 들어가 있더라고요. 이왕이면 대본을 최대한 수정 안 하는 선에서 제작 지원이 이루어지면, 감독님이나 작가님도 훨씬 수월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아이고! 한 곳에서 그렇게나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지원해 주는데 촬영 장소야 얼마든 바꿀 수 있죠!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요! 하, 이것 참. 정말로 제작비를 끌어오실 줄이야…….”

하준이 제작비를 끌어오겠다고 할 당시만 해도 속으론 기대를 거의 하지 않았던 이재호였다.

하준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난들, 그 많은 제작비를 혼자서 끌어오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만에 하나 가능하더라도 수일이 걸릴지, 수개월이 걸릴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고.

일단은 하준의 말대로 케이 스튜디오와의 계약을 잠시 미뤄두긴 했지만, 이미 편성 시기까지 나온 지금의 상황에선 애초의 계획대로 흘러갈 거란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런데, 그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오로지 한 곳에서.

그것도 단 하루 만에 해결하다니.

하준의 능력에 이재호는 쉽사리 놀란 표정을 거두지 못했다.

“대표님 명성이야 이전부터 익히 들어는 왔지만 정말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하, 이것 참…… 이걸 윗선에 보고 해도 바로 믿어주실지나 모르겠네요.”

“음, 계약서를 쓰고 돈이 입금되고 나면 그땐 저절로 믿지 않으실까요? 그것보다 확실한 건 없으니까.”

“아, 그거야 그렇죠. 하하…… 휴, 아무튼 이번에 대표님한테 제가 큰 빚 하나 진 셈이네요. 그렇지 않아도 박 대표 그 인간이 또 어떤 요구를 해올지 몰라 내내 찝찝하고 불안하던 참이었는데.”

이재호의 말에 하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잔을 들었다.

만약 하준이 미래를 바꾸지 않았다면 그의 걱정과 우려는 모두 현실이 됐을 터.

게다가,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러서는 마침내 조기 종영이라는 참담한 결과를 맞이하게 됐을 거고.

하준이 다시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이재호를 바라봤다.

“혹시 생각해 두신 제작사는 있으실까요?”

“아, 예 대표님. 일단 일이 이렇게나 빨리 진행될지는 몰라서 구체적으로 얘길 나눠보진 않았는데. 지금처럼 제작비 문제까지 다 해결된 상황이라면, 아무래도 포텐 스튜디오가 좋지 않을까 싶어요. 저희랑은 10년째 같이해 오던 곳이라 손발도 척척 맞을 거고.”

이재호의 얘기에 하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명함집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건넸다.

“네, 그럼 그쪽 담당자분께 준비되는 대로 이쪽으로 연락하면 된다고 전해주세요. 회장님 결재까지 다 마친 사안이라 이미 이쪽에선 준비가 진행 중일 겁니다.”

“회, 회장님요……?”

회장이란 단어에 이재호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키워졌다.

하준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이제 제작사도 바뀌게 됐으니 캐스팅 문제부터 해서 본격적으로 제작 준비에 들어가시겠네요. 아무쪼록 저희 윤채경 배우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감독님.”

“아이고, 무슨 그런 말씀을요. 저희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채경 씨인데. 오히려 부탁은 저희가 드려야죠! 채경 씨가 연기에만 집중하실 수 있도록 최고의 환경을 만들어 놓을 테니 염려 마세요, 대표님! 하하.”

“감사합니다.”

나눠야 할 얘기는 모두 끝난 것 같아, 하준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때, 이재호가 자신의 팔을 흔들며 하준을 멈춰 세웠다.

“아아, 그냥 이렇게 가시게요, 대표님?”

뭔가 할 말이 더 남아 있나 싶어 하준이 이재호를 쳐다보자, 이재호가 너털웃음을 지어왔다.

“허허. 아 다른 게 아니라, 물론 대표님은 채경 씨를 위해서 한 일이시겠지만 저희 입장에서도 큰 빚을 진 거나 마찬가진데. 이렇게 그냥 입 싹 닫아 버리기엔 뭔가 죄송스러워서 말이죠. 감사의 마음으로 저도 대표님한테 뭔가 도움을 좀 드릴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이재호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아 물론 유 대표님이야 워낙 능력 있으신 분이니까 딱히 제 도움 필요할 일이 없으실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편하게 말씀 주세요. 하하, 제가 또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서요. 저 이래 봬도 드라마국 CP까지 맡고 있는 사람입니다? 뭐 대단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여기선 콧방귀 정도는 낄 수 있으니까 꼭 말씀 주세요. 아셨죠?”

이번 제작사 문제가 꽤나 마음을 후련하게 만들었는지 이재호의 표정과 어투에선 진심이 다분히 느껴지고 있었다.

잠시 이재호를 바라보던 하준이 문득 뭔가가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음,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까 그럼 저도 한 가지만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감독님.”

기다렸다는 듯 이재호가 반색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그럼요!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개 부탁하셔도 되죠! 하하. 제가 몇 가지를 들어드린들 100억만 한 가치엔 턱도 없을 텐데요.”

“아시는진 모르겠지만, 저희 팔도에서 곧 아이돌 그룹을 런칭할 예정에 있습니다. 그래서 혹시 그쪽으로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을까 싶은데.”

“오, 그럼요! 기사가 그렇게나 났는데 당연히 알다마다죠. 그래서, 제가 어떤 도움을 드리면 될까요?”

“책임 프로듀서로 계시면 예능 쪽 PD분들이랑도 꽤 친분이 있으실 것 같은데. 혹시 음악 방송…….”

“아아.”

그런데, 하준이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재호가 이미 이해했다는 듯 손바닥을 맞부딪쳐 왔다.

“어떤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데뷔 무대에 신경 좀 써달라 이 말씀이신 거죠? 아무래도 지상파 무대는 신인들에겐 무게감이 남다를 테니까.”

의중을 정확히 파악한 듯한 이재호의 말에 하준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저희가 더블 타이틀곡으로 활동할 예정에 있어서, 혹시 가능하다면 데뷔 무대를 두 곡으로 채울 수 없을까 하는데.”

“으흠, 두 곡이라.”

드라마국에 몸담고 있어도 이 바닥 시스템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재호.

대형 소속사도 아닌 신인 그룹에게 데뷔 무대에서의 두 곡은 무척이나 이례적인 일일 수밖엔 없었다.

그럼에도, 이재호가 다시 입을 열어오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뭐 대표님이 힘 써주신 거에 비하면 제가 그 정도 힘쓰는 건 일도 아니죠. 마침 지금 음악 방송 맡고 있는 애가 저랑은 또 각별한 사이기도 하니까, 제가 따로 잘 부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염려 마세요, 대표님! 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흔쾌히 수락해 오는 이재호.

하준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대표님. 그럼 다음 만남은 대본 리딩 때 뵙는 걸로 하시죠.”

“네, 그럼.”

의외의 수확까지 얻어낸 하준은 이재호와 인사를 나누고는 드라마국을 빠져나왔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저녁 시간에 가까워져 오고 있는 시각.

연습실에서 땀 흘리며 연습하고 있을 멤버들을 떠올리며 하준은 엘리베이터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 나갔다.

그런데, 하준이 엘리베이터 하강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고 있던 때.

드라마국 복도 코너 쪽에서 낯선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그 팔도 엔터 대표 말하는 거야? 유 뭐시긴가 하는 그 사람?”

“어, 얼마 전에 H라고 떠들썩했던 사람 있잖아. 어제 회식하는데 매니지 팀장들끼리 모여서 아주 줄기차게 씹어대더라고. 미국에서 좀 잘 나갔다고 오만 데 떼만 데서 너무들 빨아준다면서 말이야. 아오, 아주 회식 내내 그 얘기만 하는데 귀에 딱지 앉는 줄 알았다니까?”

기둥 너머 하준의 존재를 모르는 듯, 적나라하게 내뱉는 그들의 대화.

하준은 표정의 변화 없이 그들의 대화를 귓바퀴로 주워 담았다.

“야야, 그게 다 시기 질투지 뭐. 기사 보니까 나이도 젊고 얼굴도 엄청 잘생겼더만. 본인들은 남 뒤치다꺼리 하면서 죽어라 뺑이 치고 있는데, 그 사람은 그 나이에 대표 자리까지 앉아 있으니 어떻게든 까내리려는 거 아니겠냐? 뻔하지 뭐.”

“근데 또 듣다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하더란 말이지? 애초에 거기랑은 시스템 자체가 다르니까, 그 나라에서 좀 잘 됐다고 여기서도 잘되란 보장이 없다는 거지. 뭣보다, 여긴 소속사발이 엄청 중요한 곳인데 그 팔도인가 뭔가 하는 곳은 아직 동네 구멍가게 수준이긴 하니까. 기껏해야 윤채경 하나로 뭐 할 수 있는 것도 없을 거고.”

“아, 조만간 거기에서 그룹 하나 데뷔하지 않나? 걔네 활동하는 거 보면 알겠네. 진짜 실력 있는 양반인지 아니면 그냥 미국에서 그냥 운발로 살아남았던 건지.”

“안 그래도 다들 그것만 벼르고 있더라. 아직 데뷔도 전인데 빈 수레만 요란한 것 같다면서. 후후, 왠지 그거 지켜보는 것도 흥미진진할 것 같단 말이지?”

“흥미진진은 무슨. 우리 같은 로드들이랑은 애초에 상관없는 일인데. 됐고 명절 보너스나 좀 두둑이 주면 좋겠다, 나는. 후우.”

그들의 대화가 끝날 무렵, 하준이 있는 층으로 엘리베이터 도착 소리가 울렸다.

여전히 차분한 표정을 유지한 채로, 하준은 열린 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존재가 밝혀지고 하준에게 쏠려온 관심들.

당연스럽게도 모두가 다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기와 질투, 그리고 곱지 않은 시선 또한 있을 수밖엔 없는 일.

그리고, 늘 그래왔듯 실력과 능력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면 되는 일이었고.

열려진 엘리베이터의 문이 서서히 닫히며, 하준은 한쪽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B&D 대표실.

본부장인 오창석으로부터 보고를 받던 박성환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구겨졌다.

“뭐?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SBC에서 다른 제작사랑 하기로 했다고? 그 제작비 감당할 제작사가 우리 말고 또 어디 있다고.”

“아, 그게…… 이번에도 포텐 스튜디오랑 같이하기로 결정이 났다하더라고요. 이미 계약서 사인도 다 끝마친 상태라면서. 저희한텐 미안하게 됐다고…….”

“하, 참. 지금 뭔 소릴 하는 건지 도통 이해를 못하겠네. 야, 오창석이. 지금 너 꿈꾸는 거 아니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리 아니면 안 된다고 이 감독이 그 난리를 쳤는데. 갑자기 그 많은 제작비를 어디서 끌어왔다는 거야? 포텐 스튜디오 사정은 우리가 뻔히 다 아는데.”

당최 이해할 수 없다는 박성환의 반응에 오창석은 한껏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그게…… 채경이 새 소속사 대표가 힘을 좀 쓴 모양이더라고요. 알아보니까 영신에서 전액 제작 지원하기로 했다고. 그래서 우리 애들 캐스팅하기로 했던 것도 재고해 봐야 할 것 같다고…….”

“……뭐?”

오창석의 입에서 흘러나온 얘기들에 박성환의 공기가 일순간 바뀌었다.

자신의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어 버린 이가 다름아닌 윤채경의 새 소속사 대표라는 말에.

오창석이 박성환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일단 저도 자세히 알아보진 못한 내용들이라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다시 보고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대표님. 그 채경이 새 소속사 대표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좀 더 캐보고요.”

이미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표정의 박성환. 짙은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어, 어떻게 된 일인지 정확히 알아봐. 그리고, 그 인간이 대체 무슨 능력으로 그 많은 제작비를 한 번에 끌어오게 된 건지도. 두루뭉술하게 알아보지 말고 제대로 확실히 알아보란 말이야. 알겠어?”

“아, 예. 대표님. 알겠습니다.”

“나가봐.”

오창석이 90도로 몸을 숙이고는 대표실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나갔다.

그런데 문손잡이로 손을 뻗으려던 그때, 박성환이 다시 그를 불러왔다.

“아 참, 창석아.”

“예, 대표님.”

“일전에 최 기자 일 말이야. 그때 분명 제보자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이번 일 알아보면서 거기에 대해서도 같이 알아봐. 아무래도 그냥 넘어가기엔 찝찝해서.”

“아, 그 채경이 일 말씀이시죠? 알겠습니다. 알아보고 빠른 시일 내로 보고드릴 수 있도록 할게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는 대표실을 빠져나가는 오창석.

테이블에 놓인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는 박성환이 길게 연기를 내뱉었다.

‘흠, 대체 뭐 하는 놈이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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