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다사다난했던 한 달 반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한남동 고급 빌라 앞엔 검은색 밴 한 대가 멈춰 섰다.
곧이어 모습을 드러낸 윤채경이 차량 안쪽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려왔다.
“어머, 대표님이 직접 나오셨네요? 하도 공사가 다망하신 분이라 다른 사람 보낼 줄 알았더니?”
말과는 달리, 이미 하준이 나올 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씨익 웃어 보이는 윤채경.
그러더니 뒷자리가 아닌 조수석으로 올라탔다.
“채경 씨는 뒷자리에 앉아서 가시는 게.”
“에이, 어디 그럴 수 있나요~ 무려 세계적인 스타 메이커 ‘H’ 님이 운전해주시는 찬데! 당연히 옆자리에 앉는 게 예의 아니겠어요? 아니다, 그냥 아예 제가 운전해서 갈까요? 대표님이 뒷자리에 앉으실래요?”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히 보이는 윤채경의 말에 하준은 고개를 짧게 내젓고는 기어를 D로 맞추었다.
“벨트부터 매시죠.”
“훗. 어휴, 영광입니다, H님?”
웃음과 함께 들고 온 텀블러의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윤채경이 물어왔다.
“그럼 윤철이 휴가 가 있는 동안은 대표님이 이렇게 계속 맡아주시는 건가?”
“뭐 그래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채경 씨가 지혜한테 전달한 임시 매니저 조건을 맞춰 드리려면.”
“어머, 그게 왜요? 전 그저 아~주 평범하고 성실한 매니저를 원한 것뿐이었는데?”
태연하게 내뱉는 윤채경의 말에 하준이 다소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담당 배우 못지 않는 유명세를 갖출 것, 미국에서 최소 7년 이상 거주한 경험이 있을 것,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직을 역임한 경력이 있을 것. 말씀하신 평범함이란 게 혹시 이런 걸 얘기하는 걸까요?”
하준이 핸들을 꺾으며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지혜가 말없이 차 키를 건네더군요. 그냥 군말 없이 나가시면 될 것 같다고.”
“푸하. 역시 지혜 씨 센스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어떻게 내 의도를 딱 한 번에 알아맞히고.”
윤채경이 한껏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명색에 감독님 작가님과 첫 미팅 자린데. 그렇다고 저 혼자 지하철 타고 갈 순 없잖아요? 게다가, 이거 대표님이 직접 골라주신 제 차기작이니까 이왕 갈 거면 대표님이랑 가는 게 좋지 않겠어요?”
“흠.”
“흠은 무슨 흠이에요? 원래 차기작은 영화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대표님이 이거 마음에 든다고 해서 드라마로 하기로 거잖아요. 설마 벌써 잊으셨어요?”
윤채경의 얘기에 하준이 조수석 쪽으로 잠시 고개를 돌렸다.
“흐음. 말은 바로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대본이 좋다고 하니까 채경 씨도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드라마로 가자고 하셨던 것 같은데.”
“으흠. 뭐, 암튼 그게 그거죠! 어쨌거나 우린 한배를 탄 거나 마찬가지니까 끝까지 잘해보자는 의미 아니겠어요? 호호.”
날이 갈수록 능청스러움이 점점 업그레이드돼 가는 듯한 윤채경의 모습.
하준도 이젠 익숙한 듯 미팅 장소를 향해 계속해서 액셀을 밟아 나갔다.
그러다 잠시 후 신호 대기를 위해 차가 잠깐 멈추자, 윤채경이 창밖의 한 건물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어왔다.
“와, 건물 좋다. 저기가 우리 새 사옥이라 이거죠?”
윤채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는 하준.
그곳엔 ‘팔도 엔터테인먼트’라는 로고가 건물 외벽 위로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네. 물론 건물 전체가 우리 건 아니지만.”
“풉. 왜요? 아예 건물을 통째로 사 버리시지! 대표님, 아니 ‘H’님의 능력 정도면 그 정돈 충분하지 않나?”
“뭐 그럴까 싶은 생각도 잠깐 하긴 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겠더라고요. 소속 연예인이라곤 채경 씨와 애들밖에 없는데 괜히 공실만 만들게 될 것 같아서. 그렇다고 임대 사업을 할 것도 아니고.”
하준이 담담하게 내뱉는 말에, 윤채경이 입을 반쯤 벌리고선 하준을 쳐다봤다.
“와…… 전 그냥 해본 소리였는데 정말 통째로 살 생각까지 하셨던 거예요? 대체 돈이 얼마나 많으신 거야?”
윤채경의 놀란 표정을 뒤로하고, 하준은 새롭게 이전한 팔도의 건물을 지나쳐 갔다.
지난 7년간 미지의 스타 메이커 ‘H’로 불려왔던 하준.
하준의 정체가 밝혀지고 나자, 국내뿐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도 연일 그에 대한 기사들을 끊임없이 쏟아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의 정체를 아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으니까.
노숙자, 청소부, 배관공 수리공 등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던 이들을 양지로 끌어 올린 그의 히스토리.
덕분에 지난 한 달 반이라는 시간 동안, 하준은 온갖 인터뷰 요청에 시달려야만 했다.
물론 그 덕에, 하준과 팔도의 위상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지게 됐지만.
텀블러를 홀더에 꽂으며 윤채경이 물어왔다.
“근데 사무실은 갑자기 왜 옮기신 거예요? 지혜 씨 말로는 4개 층을 통째로 임대했다고 하던데.”
“전부터 생각은 하고 있던 건데 시기를 조금 앞당긴 거죠. 미국과 다르게, 한국에선 좀 더 체계적인 시스템이 필요할 것 같아서.”
“응? 미국은 체계적이지가 않아요?”
“애초에 시스템부터가 많이 다르니까요. 거긴 소속사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서 개인적인 매니지 팀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계약은 에이전시를 통해서 이루어지거든요.”
“오, 이건 좀 신선한 얘기 같은데? 저야 국내에서만 활동해 왔으니까 그쪽 시스템에 대해선 딱히 관심 가질 일도 없었고. 또, 또 뭐 없어요?”
궁금하다는 듯 물어오는 윤채경에게 하준이 웃으며 답했다.
“뭐 세세하게 들어가자면 많겠지만, 굳이 큰 거 하나만 꼽자면 캐스팅 과정이 아닐까 싶은데. 거긴 애초에 소속사 자체가 없으니까 국내처럼 소속사 힘으로 끼워팔기 같은 게 있을 수가 없거든요. 물론 인지도 없는 연예인이 갑자기 주연 자리를 꿰차는 경우는 더더욱 보기 드물 거고.”
“맞아, 맞아. 그 비슷한 얘긴 저도 들었던 것 같아요. 오로지 오디션을 통해서 공정하게 뽑는 시스템! 한국은 소속사발이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데. 흐음.”
고개를 주억거리던 윤채경이 갑자기 깨달았다는 듯하준을 바라봤다.
“아~ 그러니까 로마에 오면 로마에 법을 따르듯 한국에선 소속사의 힘이 아주 중요하니까 대표님도 그에 맞는 시스템을 갖추겠다 이 말씀이신 거죠? 대형 기획사들처럼?”
하준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전에 채경 씨가 저한테 그렇게 조언하기도 했고요.”
하준의 말에 윤채경은 지난번 일식집에서의 대화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대며 한숨을 내뱉었다.
“어휴. 그나저나 대표님 그 기사 뜨고 나서 제가 여기저기서 연락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모르죠? 대표님이 ‘H’인 거 언제부터 알았냐고, 다 알고 전속계약 체결한 거 아니냐고요. 몰랐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안 믿는데 어찌나 답답하던지. 그렇다고 박 대표랑 있었던 일들을 일일이 다 설명할 수도 없고 증말…….”
고개를 절레 내젓고는 윤채경이 다시 생각해도 신기하다는 듯 하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제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히게 없거든요? 별명이 ‘안목 고자’일 정도로? 근데 어떻게 대표님을 딱 알아봤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신기하단 말이죠? 그렇게 유능하면서도 유명한 분일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
요리조리 쳐다보는 윤채경의 시선에 하준이 차량 시동을 끄며 안전벨트를 풀었다.
“음,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올 거라곤 저도 상상도 못 했네요. 그만 내리실까요?”
“에? 갑자기 내리라고요? 고작 그런 말 했다는 이유로?”
눈동자를 키워오는 윤채경에게 하준이 창밖을 가리켰다.
“도착했으니 당연히 내려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리 주연배우라고는 해도 첫 미팅부터 늦는 모습 보이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은데.”
“아? 진작 그렇게 말씀하셨어야죠, 그럼.”
그제야 주변을 훑고는 윤채경이 자신의 안전벨트를 풀었다.
도착한 곳은 일산의 한 오피스텔 앞.
윤채경의 차기작 연출을 맡게 될 이재호 PD, 그리고 대본을 집필한 양수민 작가를 만나기 위해 그녀의 작업실로 온 것이었다.
잠시 후, 7층으로 올라온 하준과 윤채경이 702호의 초인종을 누르자 현관문이 열리며 이재호가 반가운 얼굴로 맞이했다.
“하하, 우리 윤 배우! 이게 얼마 만인 거지? 대상 받은 이후로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윤채경의 마지막 드라마 연출을 맡았던 이재호.
해당 작품으로 윤채경은 생에 첫 연기대상을 수상했고, 이후에도 두 사람의 관계는 무척이나 호의적으로 이어져 오고 있었다.
윤채경에게 말을 건넨 이재호가 곧바로 하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맞으시죠? 유하준 대표님? 이야, 처음 뵙는 건데도 외모만 보고 한눈에 바로 알아보겠는데요? 크, 진짜 웬만한 배우들 다 저리 가라 할 외모시네.”
감탄이 절로 나온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내젓는 이재호에게 윤채경이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감탄은 들어가서 마저 하시는 게 어때요, 감독님? 아직 작가님이랑은 인사도 못 나눴는데?”
“아 참참, 그렇지. 워낙 반가운 얼굴들이시라 나도 모르게 그만 주책이, 하하. 들어가자고.”
이재호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자, 작업실의 주인인 양수민이 두 사람에게 수줍게 인사를 건네왔다.
“안녕하세요, 양수민이라고 합니다.”
“어머, 만나뵙게 돼서 반가워요 작가님. 대본 보자마자 너무 만나 뵙고 싶었는데! 정말 흡입력이 장난이 아니었어요. 시 간가는 줄 모르고 푹 빠져서 읽었다니까요?”
“아, 윤채경 배우님이 그렇게 봐주셨다니 정말 영광이네요. 감사합니다.”
역시나 수줍게 말을 내뱉는 양 작가.
잠시 후, 모두가 자리에 앉고 나자 이재호가 먼저 입을 열어왔다.
“실은, 이 작품은 4년 전 방송국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던 작품인데, 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들 때문에 제작이 계속 미뤄졌었어. 덩달아 양 작가 입봉 시기도 계속 늦춰질 수밖엔 없었고.”
몰랐던 사실에 윤채경이 눈동자를 키우며 양 작가를 쳐다봤다.
“에? 4년이나요? 그럼 대상까지 받고선 4년이나 데뷔도 못 하고 그냥 쭉 기다리셨던 거예요?”
“아, 네…… 아무래도 상황이 여의치 않다 보니까.”
양 작가의 말에 이재호가 상황을 설명했다.
“채경 씨도 대본을 봐서 알겠지만, 이게 드라마치고는 워낙 스케일이 큰 작품이잖아. 당연히 그만큼 제작비도 많이 들 수밖엔 없는 거고. 그동안은 그 제작비를 감당할 제작사를 못 찾고 있었던 거지. 물론 양 작가가 신인이란 것도 한몫했고.”
양 작가에게 시선을 잠깐 뒀다 거두고는 이재호가 말을 이었다.
“암튼 이런저런 이유들로 계속 미뤄지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그냥 썩혀두기엔 너무 아까운 작품이더라고. 그래서 내가 한번 직접 해봐야겠다 싶어서 이렇게 나선 거고.”
“음, 확실히 스토리만 봐서는 신인 작가님이란 게 전혀 안 느껴지기는 했어요. 저도 그래서 결정하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았고.”
“하하, 그래? 이거 양 작가한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칭찬이겠는데?”
이재호가 양 작가에게 웃음을 한번 띠우고는 다시 윤채경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무튼, 우여곡절 끝에 이렇게 제작에 들어가게 돼서 개인적으론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 뭣보다 채경 씨랑 또 한 번 같이 작업할 수 있게 돼서 굉장히 기대가 되기도 하고 말야?”
“저도요. 그럼 제작이 결정 났다는 건, 제작비를 대줄 제작사도 이미 구해졌다는 뜻이겠네요?”
윤채경의 물음에 이재호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물론이지. 채경 씨랑 미팅 끝내고 좀 있다 오후에 만나서 계약하기로 했어. 그쪽에선 채경 씨 출연 여부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더라고. 뭐 우리 입장에서야 더할 나위 없이 심플한 조건이라 다행이긴 했지만. 하하.”
“어머, 저도 아직 사인 안 했거든요? 구두로만 얘기한 건 인정 안 되는 거 아시죠?”
“아이고, 이런! 그럼 보자마자 사인부터 하고 시작할 걸 그랬나? 하하.”
농담 섞인 윤채경의 말에 이재호도 웃음으로 받아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잠시 후, 윤채경이 궁금하다는 듯 이재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그 제작사가 어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