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그래도 미안하긴 하셨나 보네요? 이런 곳까지 와서 코스 요리로 사 주시는 거 보면?”
개별 룸의 형태를 갖춘 고급 일식집.
주문한 음식이 모두 세팅되고 나자 윤채경이 테이블을 한번 훑고는 하준에게 말했다.
하준도 인정한다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바쁘신 분을 혼자서 한 시간이나 기다리게 했으니까요. 그것도 미리 약속까지 한 상태에서. 이걸로 채경 씨 기분이 다 풀리진 않겠지만 그래도 맛있게 드셔주셨으면 합니다.”
“응? 나 혼자 기다린 거 아닌데에? 그리고 지혜 씨랑 수다 떠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던데요? 후후, 지혜 씨 너무 웃겨.”
말을 내뱉고는 두툼한 회가 올려진 초밥을 한입에 무는 윤채경.
그러고는 무척이나 행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살 것 같아.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부터 회가 먹고 엄청 먹고 싶었거든요! 제가 일식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아시고. 훗.”
“아까 나오기 전에 저희 직원이 알려주더라고요. 그러면서 예약도 같이해 주고.”
“어머, 지혜 씨가요? 아~ 그래서 아까 대표님 오기 전에 어떤 음식 제일 좋아하냐고 물어봤던 거구나? 와, 지혜 씨 정말 센스 장난 아니다!”
감탄한 듯한 표정으로 윤채경이 물었다.
“대표님은 좋으시겠어요? 그렇게 유능한 직원을 데리고 있으니.”
“유능하면서도 유일한 직원이기도 하죠.”
“풉. 어쨌거나 특별한 직원이긴 하네요.”
미소를 주고받고는 식사를 이어나가는 두 사람.
그러다 하준이 윤채경에게 물었다.
“오늘 채경 씨 기사가 꽤 뜬 것 같던데. 혹시 관련해서 인터뷰하신 거라도 있으실까요?”
“아, 그거요? 아뇨. 최근 들어오는 인터뷰는 다 고사하고 있는걸요. 아마 그거 최 기자님이 내보냈을 거예요. 나머진 다 어뷰징 기사들일 거고. 어휴, 내가 그렇게 조금만 참아달라 했더니.”
“최 기자님이라면.”
“최윤섭 기자님요. 박 대표 일 관련해서 고맙다고 통화하다가 대뜸 그 예고편 뭐냐고 묻더라고요. 예능 나온 거 봤다면서. 그래서 대표님이랑 계약했다고 하니까 놀라면서 ‘허허허, 그럼 조만간 전속계약 관련한 기사도 내보내겠네요?’ 하더니, 굉장히 음흉하게 웃더라고요. 딱 무슨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아서 제가 좀만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어휴, 그걸 못 참고.”
고개를 절레 내젓고는 윤채경이 물잔을 들며 덧붙였다.
“하여튼 그 기자님도 참 일관적이야. 욕먹을 짓만 골라서 하는 거 보면.”
김지혜의 말을 듣고 나서야 오늘자 기사들을 확인했던 하준.
기사의 내용 대부분은 윤채경의 전속 계약과 관련한 것들이었다.
당연스럽게도 그 관심들은 팔도 엔터테인먼트라는 신생 기획사에게로 이어질 수밖엔 없었고.
물론 그곳의 수장인 하준 또한.
갑자기 쏠려온 관심의 연유를 모르고 있던 하준은 윤채경의 말을 듣고 나서야 전후 사정을 파악하게 되었다.
“근데요, 대표님.”
마시던 물잔을 내리며 윤채경이 하준을 쳐다봤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번 기회에 팔도도, 대표님도 제대로 한번 알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요? 뭐 어차피 언젠간 해야 할 일이기도 했고.”
일리가 있는 말이긴 했다.
윤채경은 그렇다 치더라도 를 성공시키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회사의 인지도나 규모 부분은 분명 신경 써야 할 것 중에 하나였으니까.
하준을 바라보며 윤채경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저야 이미 이뤄볼 건 다 이뤄봤으니까 소속사의 네임밸류 같은 건 그닥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지만, 데뷔를 준비하고 있는 애들 입장에선 그게 아닐 거란 말이죠. 소속사가 힘이 없으면 하나부터 열까지 온통 다 서러운 일들만 생길 수밖에 없어요. 더군다나 그게 이제 막 데뷔한 신인 애들이라면 더더욱 그럴 거고.”
“흠.”
“더러워도 어쩔 수 없어요. 이 바닥 생리가 그런걸. 실력으로만 평가받을 곳이었으면 죄다 오디션으로만 뽑고 있겠죠. 무튼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대표님도 슬슬 회사 몸집을 키워야 하지 않겠냐 이거예요. 직원도 더 뽑아서 회사 체계도 갖추고 기자들 인터뷰에도 응하면서 마케팅적인 측면도 신경 쓰고. 언제까지나 계속 신생으로만 남아 있을 순 없잖아요?”
꽤나 장황하게 내뱉는 윤채경의 말에 하준은 의외라는 듯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자 다시 들려던 젓가락을 허공에 멈춰 세우고는 윤채경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사람 민망하게?”
“생각보다 회사 생각을 많이 하시는 것 같아서요. 계약한 지도 며칠 되지 않았는데.”
“그게 뭐 중요해요? 어쨌든 이제 내가 소속된 회사라는 게 중요하지! 그래도 명색에 윤채경이 선택한 회산데, 남들한테 볼품없단 소린 안 들어야 할 거 아니에요. 동네 구멍가게 같단 소리는 더더욱 듣기 싫고.”
윤채경의 말에 하준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신의 계획에 전혀 없던 그녀였지만, 왠지 지금의 말들은 꽤나 듣기 좋은 소리들이었기에.
하준이 미소를 유지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도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채경 씨 얘길 듣고 나니까 그 시기를 좀 더 앞당겨야겠단 생각이 드네요. 다른 건 몰라도 동네 구멍가게라는 소리는 저도 듣기 싫으니까.”
“그렇죠? 대표님이 어느 수준까지 회사를 키우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애들을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의 파워는 가지고 있어야 돼요! 다른 건 몰라도 제가 B&D에 있으면서 그거 하나만큼은 정말 많은 도움이 됐었으니까.”
윤채경이 전 소속사 얘기를 꺼내자, 하준은 문득 궁금한 게 떠올랐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채경 씨.”
“네, 뭔데요?”
“B&D 박성환 대표. 어떤 사람입니까? 그때 대화를 들어 보니까 그 일을 꾸미기 전부터 채경 씨가 재계약 거절 의사를 강하게 밝혀왔다고 하던데.”
하준의 물음에 윤채경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흠, 박성환 대표요.”
그러고는 전보다 낮아진 톤으로 말을 이어왔다.
“절대 얽혀선 안 될 사람이죠. 만약 그게 적대적인 관계로라면, 더더욱.”
많은 의미가 함축돼 있는 듯, 짧게 내뱉고는 하준과 눈을 마주하는 윤채경.
담담한 어조로 계속 이어갔다.
“이 바닥에서 박 대표의 영향력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예요. 일단 B&D 자체부터가 국내에선 견줄 만한 회사가 없으니까. 더군다나 배우 쪽 풀로만 보면 그냥 압도적이라고 봐야 하고.”
“음.”
“20년 전까지만 해도 로드 매니저였던 사람이 이젠 대한민국 엔터 업계를 쥐락펴락하고 있게 됐으니까, 어떤 의미로는 입지적인 인물이기는 하죠. 뭐 물론, 그만큼 온갖 지저분한 짓들도 마다치 않고 서슴없이 해오긴 했지만.”
“지저분한 짓이라면 어떤.”
“뭘 상상하시든 아마 그 이상일 거예요. 제가 아는 것도 전부는 아닐 거고.”
하준의 머릿속으로 문득 지난번 주차장에서의 대화 내용이 떠올랐다.
접대, 약점, 보험.
박성환이 어떤 마인드로 회사를 운영해 나가는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던 단어들.
박성환이란 인간에겐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들처럼 느껴졌다.
하준이 잠깐 생각에 잠겨 있자, 윤채경이 갑자기 피식 웃음을 지어왔다.
“어머, 표정이 너무 진지해지신 거 아니에요 대표님? 어차피 대표님이랑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일 텐데요 뭘. 앞으로도 더더욱 엮여선 안 될 사람이기도 하고. 이제 저랑은 상관없는 사람이라 저도 완전히 잊고 지낼 거예요. 두 번 다시 마주치지 않도록.”
말을 내뱉은 윤채경이 양 팔꿈치를 테이블 위로 올리고는 하준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내밀어왔다.
그러고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하준을 바라봤다.
“고마워요, 대표님.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박 대표가 원하는 시나리오대로 되고 말았을 텐데. 그럼 지금처럼 이렇게 웃으면서 밥 먹기도 힘들었을 거고. 최 기자님 일도 그렇고 여러모로 감사해요.”
“……아.”
하준이 뭐라 답해야 할지 잠시 머뭇거리자, 윤채경이 곧바로 표정을 바꾸고는 웃어 보였다.
“풉. 그냥 그렇다고요. 생각해 보니 지난번에 고맙단 말을 못 했던 것 같아서 지금 하는 거예요.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는 얘기도 하고 싶었고.”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채경 씨.”
“어휴. 어쩜 이렇게 무슨 말을 하든 딱딱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니까. 지혜 씨한테 물어보니까 애들한텐 안 그런다면서요? 회사에 꼴랑 걔네랑 나 둘밖에 없는데. 이렇게 계속 차별 대우 하실 거예요?”
서운하다는 뉘앙스가 다분히 실려 있는 윤채경의 말에 하준도 좀 더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앞으론 그러지 않도록 해보죠.”
“헐. 이게 더 기분 나빠. 그럼 지금껏 정말 차별 대우 했단 소리잖아.”
짜증 난다는 듯 물티슈를 거칠게 뜯어대는 윤채경의 모습을 바라보며 하준이 말했다.
“혹시나 활동에 필요한 부분이 있으시면 언제든 편하게 말씀 주세요. B&D에서 어떤 대우를 받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작품활동하는 데 불편함은 없도록 다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어머, 정말요?”
하준의 말에 일순가 반색하는 표정을 짓는 윤채경.
그러고는 이미 생각해 둔 게 있는 듯 눈빛을 반짝였다.
“그럼요, 대표님…….”
“네.”
“밥 먹고 다시 사무실 들어가서 제 차기작 좀 골라주실래요? 전작이 생각보다 잘 안 돼서 이번엔 꼭 흥행에 성공하고 싶은데! 어떻게, 대표님 안목을 좀 믿어봐도 될까요오?”
* * *
며칠 뒤, 하준의 집.
여러 개의 인터뷰 일정과 멤버들의 데뷔 준비로 꽤나 바쁜 하루를 보낸 하준은 소파에 기댄 채 잠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느낌과 함께 무척이나 기시감이 드는 한 장면이 꿈속으로 나타났다.
무의식 속에서 하준의 미간은 조금씩 구겨져 가기 시작했다.
번번이 찾아오던 미래 예지라고 하기엔 매번 불쾌한 기색만이 역력한 장면들.
이미 벌써 수십 번은 경험했을 짧지만 강렬한 그것들에, 오늘도 하준은 식은땀과 함께 서서히 눈을 떴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하준은 소파에서 등을 뗐다.
그러고는 이마에 손을 얹으며 조금 전 장면들을 상기시켰다.
대체 수년째 반복되고 있는 이 꿈의 정체는 뭘까.
게다가.
“…….”
검은 양복의 사내들 사이에 둘러싸인 그 붉은색 입술의 여자의 정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