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같은 시각, NTV 사장실.
통화를 끝마친 구세희가 휴대폰을 내려놓자, 옆에서 지켜보던 세련이 입을 열어왔다.
“기일 얘기하는 거 보니까 하준인가 보네. 너도 같이 가려고?”
“그래야지. 매년 가던 거였으니까.”
“너도 대단하다. 하준이 한국에 없는 동안에도 한 번을 안 빼먹고 가더니. 게다가 넌 하준이 어머님 얼굴도 잘 모른다며? 워낙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기억이 흐릿한 거지 몇 번 뵌 적은 있어. 아빠랑 워낙 각별한 사이셨으니까.”
잠시 기억을 상기시키던 구세희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어왔다.
“그땐 어려서 그런지 볼 때마다 천사 같은 느낌이 든다고 생각했었어. 뭔가 일반 사람들하고는 많이 다른 이미지였거든.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음. 그만큼 외모가 뛰어나셨다는 거 아닐까? 하준이만 봐도 연예인 뺨치는 외모긴 하잖아.”
“그럴 수도 있고.”
세련이 소파에 등을 기대고는 의아하다는 듯 물어왔다.
“근데 왜 사진 한 장이 없는 거지? 추모공원에도 어머님 사진은 없다며. 하준이도 그렇고 너희 아버지도 한 장쯤은 가지고 있을 법도 한데.”
“모르겠어. 정말로 없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놔두지 않은 건지.”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있는데 왜 일부러 안 놔둬. 다른 것도 아니고 영정 사진인데.”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란 건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구세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아버지 구명호의 몇몇 석연치 않았던 모습들 때문에.
“언니. 보통의 경우에 교통사고랑 심정지를 헷갈려 하기는 어렵지 않아?”
“당연하지. 누가 그런 걸 헷갈려 하냐? 말도 안 되지.”
“그렇지?”
구세희는 여전히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하준 어머니의 사인에 대해 구명호는 분명 그 두 가지를 헷갈려 했으니까.
처음 물었을 땐 심정지.
그다음 물었을 땐 교통사고.
당시엔 어려서 크게 개의치 않았던 문제였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무척이나 이상할 수밖에 없는 답변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하준의 모친과 가장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 자신의 아버지였기에.
복잡한 머릿속을 헤집던 구세희는 생각을 털어 버리려는 듯 눈을 한번 감았다 뜨고는 세련을 바라봤다.
“아무튼, 나 다음 주에 하루 쉬니까 결재할 거 있으면 그 전에 미리 올려줘. 없는 동안에도 나 대신 일 좀 잘 처리해 주고.”
“그래. 걱정 말고 다녀와.”
고개를 끄덕이던 세련이 문득 묘한 눈빛을 보내왔다.
“근데…… 당일로 다녀오는 거야?”
“뭐?”
“아니, 부산까지 가는데 하루 정도는 자고 와도 되지 않나 해서! 하준이도 너도 오랜만에 맛있는 것도 좀 먹고 추억도 쌓을 겸!”
뜬금없는 세련의 말에 구세희가 이상하게 쳐다보자 세련이 변명하듯 말을 덧붙여왔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아무래도 부산이 가깝고도 먼 곳이니까 이왕 간 김에 둘 다 기분 전환도 하고 오면 좋지 않나 이거지. 휴가 좀 미리 간다 생각하고.”
“참나. 비행기 타면 한 시간도 안 걸리는데 멀긴 뭐가 멀어? 그리고, 지금 방송국이 망할지도 모르는 판국에 휴가는 무슨 휴가야? 매년 적자에 허덕이고 있는 거 다 알면서.”
“……으흠.”
괜히 한번 떠봤다가 역풍만 된통 얻어맞은 세련은 괜한 헛기침만 내뱉으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음악 스트리밍 앱을 훑으며 화제를 돌렸다.
“보자, 새로 나온 신곡 중에 들을만한 게 있나아.”
“아까 기사 보니까 안토니 스미스 신곡 나온 것 같던데. 그거나 좀 틀어봐.”
세련이 있는 소파로 다가오며 구세희가 말했다.
평소에도 그의 노래를 즐겨 듣는다는 걸 알았기에 세련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음악을 재생시켰다.
“이야, 얘는 뭐 나오자마자 빌보드 핫샷 1위를 찍네? 남들은 순위권 안에도 들기 힘들어하는걸 뭐 이렇게 맨날 밥 먹듯이 해댄대? 그것도 매번 자작곡으로.”
“그만큼 노래를 잘 만든다는 거겠지. 매번 트렌디하면서도 대중적인 면을 놓치지 않고 잘 집어넣으니까.”
“참. 이런 거 보면 재능의 영역이란 게 정말 위대하긴 위대한 것 같단 말야. 그치?”
“재능도 재능이지만 그만큼 운도 따라 줬으니까 지금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거지. 그 ‘H’라는 남자가 아니었으면 지금도 노숙자 신세로 전전긍긍하고 있었을 텐데.”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그의 스토리.
구세희의 얘기에 세련도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앨범 정보를 살펴 나가던 세련이 뭔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 입을 벌려왔다.
“아~ 이번 싱글곡 가사가 그 ‘H’라는 남자에 관한 노래라는데? 그래서 제목도 ‘Thanks to’인 거고.”
세련이 앨범 정보가 나와 있는 화면을 구세희에게 보여줬다.
그런데, 세련이 보여준 화면을 훑어나가던 구세희가 갑자기 뭔가를 발견한 듯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 이거.”
“왜? 뭔데?”
“여기 커버 사진에 나와 있는 이 키링 말야.”
“키링? 그런 게 있었어?”
구세희의 말에 세련도 다시 휴대폰 화면을 쳐다보며 그것을 찾기 시작했다.
곧 세련도 눈동자를 키워왔다.
“어? 이거 너랑 똑같은 거 아냐? 돛단배 달린 키링.”
“……그런 것 같긴 한데.”
구세희는 시선을 옮겨 책상 위에 놓인 자신의 차키를 바라봤다.
그곳엔 안토니 스미스의 앨범 커버 사진에 나와 있는 것과 분명 동일해 보이는 돛단배 모양의 키링이 달려 있었다.
“너 그거 하준이가 미국 가기 전에 선물해 준 거라고 하지 않았어? 생일 선물로?”
“어. 그렇긴 한데…….”
“신기하네. 키링치고 흔한 모양은 아닌데 어떻게 너랑 똑같은 걸 가지고 있냐.”
“…….”
신기하다는 세련의 반응과는 달리, 자켓 사진을 바라보는 구세희의 표정은 사뭇 진지해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것과 결코 같은 것이 존재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상하다. 분명 같은 모양이 있을 수가 없을 텐데…….’
* * *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기일.
7년간 한국을 떠나 있었던 하준은 매년 미국에서 이를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시간 동안 구세희가 빠지지 않고 챙겼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고.
올해도 잊지 않고 연락해 준 구세희에게 고마운 마음을 느끼며, 하준은 카트를 끌고 있는 멤버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이 참. 이유식에 필요한 걸 사야지 형이 먹고 싶은 걸 사면 어떡해요, 지호 형!”
“야, 내가 먹다니. 이거 루리랑 루다 주려고 사는 거거든? 한창 과자 좋아할 나이잖아.”
“어휴. 어른 과자는 아기한테 주면 안 된다구요. 주더라도 뻥튀기같이 간 없고 쭉쭉 빨아먹을 수 있는 그런 거만 줘야 된댔어요. 그쵸, 이준 형?”
“역시 하늘이가 잘 아네.”
“그, 그런 거였어? 난 또 아기들은 다 과자 좋아하는 줄 알고…… 에헴.”
제법 촬영이 익숙해진 듯, VJ들 앞에서도 자연스럽게 장보기를 이어가고 있는 멤버들.
카메라를 보고 삼삼오오 몰려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도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촬영에만 온전히 집중해 나가고 있었다.
마치 이젠 어엿한 예능 프로의 연기자들이 된 것처럼.
먼발치서 멤버들을 지켜보며 한 걸음씩 따라 걷고 있던 하준의 등을 누군가 툭툭 두드려 왔다.
“저기…….”
앳된 목소리와 함께 느껴지는 촉감에 하준이 뒤를 돌아보자, 여고생으로 보이는 소녀 두 명이 낮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혹시 팔도 엔터테인먼트 대표님 아니세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하준이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자, 소녀 중 한 명이 확신한 듯 입을 벌려왔다.
“대박! 역시 맞나 봐. 것 봐, 내가 확실하다고 했잖아!”
“말도 안 돼…… 이건 너무 비현실적이잖아…….”
꽤나 대조적인 두 표정의 소녀들은 잠시 넋을 놓은 채 하준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봤다.
“아니 저희가 레티 너튜브를 봤는데요! 거기서 레티가 연예인 뺨치는 외모라길래 그냥 그런가 보다 했거든요? 근데 마트에 웬 모델이 걸어다니길래 막 따라오다 보니까 멤버들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딱 감이 왔죠. 대표님이 그 팔도 대표님이구나! 하고!”
옆에서 대화를 지켜보던 막내 작가가 피식 웃으며 하준에게 속삭였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계속 졸졸 따라오는 것 같더라고요. 대표님 좋으시겠어요? 벌써 팬도 생기시고? 훗.”
그러고는 소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주 뵐 수 있는 분도 아닌데 이럴 때 사진이라도 찍어둬요. 그리고 친구들한테 자랑하면서 우리 멤버들이랑 프로그램 홍보도 좀 해주면 좋고.”
“지, 진짜요? 정말 사진 찍어도 돼요?”
갑작스러운 상황에 하준이 막내 작가를 쳐다보자, 그녀가 하준의 팔을 툭 치며 작은 목소리로 말해왔다.
“멤버들을 대신해서 팬 서비스 한다 생각하고 그냥 하나 찍어주세요. 혹시 알아요? 얘네가 각종 커뮤니티랑 학교 친구들한테 입소문 내줄지. 얘네 덕질 시작하면 그 파급력이 또 얼마나 어마 무시하다구요.”
대체 자신에게 왜 팬 서비스란 단어를 쓰는 건진 모르겠지만, 이미 휴대폰 카메라까지 켜며 자신의 양옆에 서는 소녀들로 인해 하준은 달리 거절할 방도가 없었다.
“저희 이거 SNS랑 단톡방에 막 올려도 돼요? 해시태그로 뷔뷔앞이랑 프로그램 이름도 같이 걸어서 홍보도 마구마구 해드릴게요!”
“저희 이래 봬도 인맥 쩔어요!”
곤란해하는 하준을 대신해 이번에도 역시 막내 작가가 입을 열어왔다.
“어머, 멤버들을 위한 일이라는데 대표님은 당연히 허락하시죠! 휴대폰 줘볼래요? 내가 아주 예쁘고 잘 나오게 찍어줄게요.”
막내 작가에게 휴대폰을 건넨 소녀들이 하준의 옆에 딱 달라붙어 각종 포즈들을 취하기 시작했다.
하준 또한 하는 수 없이 카메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부디 멤버들과 프로그램에 단 하나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며.
잠시 후, ‘하나, 둘, 셋’ 소리와 함께.
하준은 자신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어색하고도 경직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장보기가 얼추 끝나갈 무렵.
카운터 밖에서 멤버들을 기다리던 하준은 울리는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통화를 연결했다.
-저, 대표님. 혹시 어디쯤이세요……?
평소답지 않게 소곤대는 목소리로 꽤나 조심스럽게 내뱉는 김지혜의 물음에 하준은 되물었다.
“애들 촬영하는데 와 있지.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대표님…… 아직도 거기 계시면 어떡해요. 채경 언니 지금 30분째 대표님만 기다리고 있다구요! 오늘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하셨다면서요.
김지혜의 말에 하준은 순간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윤채경과의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시간을 확인한 하준은 곧바로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지금 갈게. 윤채경 씨한텐 내가 가서 사과드린다고 말씀드리고.”
-헐, 정말로 까먹으셨던 거예요? 대표님답지 않게 왜…….
딱히 변명할 말이 없었다.
늘 멤버들에게만 신경을 쏟아왔던 탓에 윤채경이란 존재가 아직은 하준에게 익숙하지가 않았다.
분명 윤채경 또한 이젠 엄연히 자신의 소속 배우임에도.
하준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있던 그때, 수화기 너머에서 김지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이것도 이건데요 대표님. 지금 여기저기서 대표님 찾고 아주 난리도 아니에요. 오늘만 해도 전화가 몇십 통이나 걸려온 건지, 휴우. 그냥 거절을 하든 아니면 인터뷰에 응하든 무슨 조치를 취하긴 취해야 할 것 같은데. 안 그럼 계속 걸어올 기세예요.
한숨까지 섞어가며 내뱉는 김지혜의 말에 하준은 의아함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나를 찾는다고? 누가, 왜?”
-누구긴 누구겠어요, 기자들이지! 채경 언니가 팔도랑 계약 맺었다고 하니까 다들 대표님 정체를 엄청 궁금해하고 있나 봐요. 대체 대표가 누구길래 채경 언니가 이런 신생 기획사랑 계약을 했나 하면서. 오늘자 기사의 댓글들도 다 그런 내용들뿐이던데요?
“오늘자 기사?”
또다시 물어오는 하준의 말에 김지혜가 아직 확인 못 했냐는 듯 물어왔다.
-응? 아직 못 보셨어요? 오늘 채경 언니 새 소속사 관련 기사 떴는데? 그래서 팔도랑 대표님 이름이 실시간 검색 순위에도 올라갔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