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도어록 해제 소리와 함께 서서히 열리는 현관문.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구세희였다.
하준이 다소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오히려 구세희 쪽에서 당황스럽다는 듯 물어왔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온다고 얘기하고 온 건데.”
한 손에 쥐고 있던 편의점 봉투를 하준에게 건네고는 거실 소파로 향하는 구세희.
마치 자기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한 자세를 취하며 그대로 널브러졌다.
“비밀번호는 어떻게 알고 들어온 거야? 분명 따로 알려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풉. 야, 말은 똑바로 해야지. 알려준 건 네가 아니라 나거든? 너 이 집 처음 이사 왔을 때 내가 비밀번호 설정해서 너한테 가르쳐 줬었으니까. 그새 까먹었냐?”
기억을 되짚던 하준이 해당 사실을 떠올리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설마설마했는데. 어떻게 10년이 다 되도록 비밀번호 한 번을 안 바꾸지? 행여나 누가 알기라도 했으면 이미 집문서까지 다 털리고도 남았겠네. 쯔쯧.”
혀 차는 소리를 내고는 집안 곳곳을 눈으로 스캔하기 시작하는 구세희.
그러다 벽에 붙어 있는 그림 액자 하나를 보고는 의아한 듯 물어왔다.
“저 그림은 뭐야? 너 저런 거에도 취미 있었어?”
“그냥 인테리어용이야. 집이 좀 휑한 것 같길래.”
“참나. 이왕 걸려면 좀 이름 있는 화백 작품으로 걸어놓지. 저게 뭐냐? 누가 보면 벽 뒤에 있는 거 가리려고 대충 아무거나 갖다 씌운 줄 알겠네.”
“…….”
무심코 내뱉은 구세희의 얘기에 하준은 순간 헛기침을 내뱉을 뻔했다.
자신의 의도를 너무나도 정확히 짚어냈기 때문에.
아무래도 빠른 시일 내에 액자를 교체해야겠단 생각과 함께, 하준이 봉투 안에 든 맥주를 꺼냈다.
“그나저나 이 시간에 우리 집엔 갑자기 왜 오겠다고 한 거야? 시간이 열 시가 다 돼 가는데.”
“왜긴 왜야. 오늘 프로그램 첫방 날이니까 같이 모니터링이나 하려고 왔지. 잊었어? 나 NTV 사장이거든?”
“사장이 이렇게 직접 프로그램 모니터링까지 다 하는 자리였나? 몰랐네.”
“뭐야, 지금 비꼬는 거야? 죽을래?”
하준이 건넨 맥주 캔을 벌컥 넘기고는 긴 한숨과 함께 구세희가 하소연을 시작했다.
“후우. 나라고 이러고 싶어서 이러겠냐? 방송국 개국한 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 지금껏 이렇다 할 대박 프로그램 하나도 제대로 못 만들어내고 있으니까 이러지. 매년 적자는 커져만 가지, 종편은 자꾸만 하나둘씩 늘어 가지. 아주 이러다간 몇 년 못 가 문 닫을 판이라니까.”
남은 맥주를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들이 삼킨 구세희가 비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도 이번엔 큰맘 먹고 윤 PD까지 데려왔으니까 기대 한번 해봐야지. 지금껏 실패란 걸 모르고 승승장구해 온 피딘데, 설마 그 업적이 우리 방송국 오자마자 깨지기야 하겠어?”
말을 내뱉고는 구세희가 하준을 위아래로 훑으며 덧붙였다.
“흐음. 물론 뭐, 그게 하필이면 너랑 엮여 있다는 게 불안 요소라면 불안 요소이긴 하지만?”
구세희의 말에 하준도 소파로 걸음을 옮기며 맞받아쳤다.
“혹시나 나중에 잘되더라도 NTV 무대에는 절대 안 서야겠네, 그럼.”
“뭐? 참나. 누가 배은망덕의 아이콘 아니랄까 봐 말 함부로 하네, 이게? 야, 아직 데뷔도 안 한 연습생 애들을 고정으로 나올 수 있게 허락해 준 것도 모자라 프로그램 편성 시간도 금요일 가장 황금시간대로 잡아줬는데. 잘되면 그게 다 내 덕 아니냐? 이게 진짜 은혜를 몰라도 유분수지!”
오늘도 역시나 쉽게 반응을 보이는 구세희의 모습에 하준은 피식 웃어보이고는 소파에 자릴 잡았다.
어느덧 벽걸이 시계가 가리키고 있는 시각은 9시 35분.
켜놓은 TV에선 프로그램 예고를 알리는 소개 영상과 함께 광고가 시작되고 있었다.
다 마신 맥주 캔을 찌그러뜨린 구세희가 가방에서 테블릿 PC를 꺼내며 하준에게 말했다.
“아 참, 혹시나 해서 미리 말해두는 건데. 너 이거 첫술에 배부를 수 없는 건 알지? 아무리 윤 PD가 만든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시청자들한테 일 순위는 출연자일 수밖에 없어. 아무래도 인지도가 전혀 없는 애들이다 보니까 초반엔 관심도, 시청률도 다 낮을 수밖엔 없을 거고. 너나 애들이나 괜히 댓글이나 시청률 수치 보고 쓸데없이 상처 받을까 봐 미리 해두는 얘기야. 아무리 시청률이 안 좋아도 내가 조기 폐지는 없게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꽤나 장황하게 내뱉는 구세희의 얘기에 하준은 단조로운 표정을 유지하며 짧게 답했다.
“그래. 신경 써줘서 고맙네.”
“치, 고맙긴. 그래도 내가 이 바닥에선 너보다 한참 선밴데. 이 정도 조언은 얼~ 마든 해줄 수 있지!”
하준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구세희는 한껏 뿌듯한 얼굴을 하고선 테블릿 PC를 터치해 나갔다.
하준도 여유로운 마음으로 TV에 시선을 고정시키고는 맥주를 들어 올렸고.
이미 프로그램이 잘될 거라는 건 확신하고 있는 상태.
구세희가 내뱉은 걱정 같은 건 조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윤채경과의 계약으로 인해 비워져 있던 마지막 퍼즐 조각까지 맞춰진 상태였기에 더더욱.
어느덧 TV에선 마지막 광고를 알리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있었고, 그 숫자가 0으로 맞춰진 순간.
드디어 첫 방송이 시작되었다.
* * *
멤버들의 개별 인터뷰 화면으로 시작된 오프닝.
서이준, 이은호, 김강준, 김지호, 정하늘의 순서로 개개인마다 간단한 소개와 함께 프로그램에 임하는 각오들을 내뱉어 왔다.
긴장과 풋풋함이 섞여 있는 다소 어색한 어투와 함께.
구세희는 그들의 멘트를 하나하나 주워 담으며 태블릿 PC의 화면을 끊임없이 터치해 나가고 있었다.
바로, 실시간 시청자 반응.
5초마다 자동 업데이트가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구세희는 조급한 마음에 끊임없이 새로고침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이제 막 시작한 케이블 프로그램, 거기에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아이돌 연습생들의 육아 프로그램이라는 점에 올라오는 반응들은 극히 드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마저도 결코 긍정적인 내용들은 아니었고.
-얘네 누구임? 혹시 아는 사람 정보 공유 좀.
-ㅁㄹ. 아이돌 연습생이라는데 완전 듣보임. 방송까지 나오는 거 보면 소속사 빽이 장난 아닌 듯.
-요새 일반인들 TV에 많이 나오기는 해도 이건 좀 역대급 아님? 듣보 다섯이서 나와서 육아라니 ㅋㅋ
-검색해 보니까 얘네 팔도 엔터라는데. 대체 팔도 엔터가 어디 있는 거임?
-라면 회사 아님?ㅋㅋㅋ
-팔도니까 전국 팔도에 다 있는 거 아님? ㅋㅋ 다단계 회사처럼?
-하필이면 <불타는 프라이데이> 결방이라 볼 것도 드릅게 없네. 걍 이거 좀 보다가 영화나 다운받아 봐야겠음ㅋ
방송 전 내보냈던 홍보 기사의 댓글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들.
물론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였기에 별다른 타격은 없었다. 멤버들의 인지도를 감안하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고.
다만 앞으로 진행될 회차에서도 이런 반응이 거듭 유지된다면, 그땐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 할 문제임에는 분명했다.
어쨌거나 한 방송국의 사장 자리에 있는 그녀였으니까.
하준과의 관계, 그리고 윤 PD라는 스타 PD를 영입해 온 만큼 부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
-헐. 지금 저거 실화임? 저런 코딱지만 한 곳에서 다섯 명이 살았다고? 그것도 2년씩이나?
-ㅁㅊ. 레알 소름이네. 이 정도면 <이 세상에 그런 일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님?
-와, 사연팔이 하나는 아이돌 중에 역대급이긴 하네 ㅋㅋ
멤버들의 이사 과정이 흘러나오자, 실시간 TALK 창에선 조금씩 달라진 반응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시청자도 조금씩 차오르는 듯 올라오는 글의 속도 또한 처음보단 빨라지고 있었고.
-헐, 대박. 얘네 파프리카 TV에 나왔던 영상 있음. 레티 너튜브 검색 ㄱㄱㄱ
-헐. 레티랑 합방을 했었다고? 그럼 완전 듣보는 아닌가 본데?
-와, 나 지금 영상 보고 왔는데 여기 아직 영상 안 본 사람 있으면 꼭 보고 오셈! 얘네 대박임.
-얘네 그때 실시간 검색 순위에도 올라왔던 애들 아님? 그때 1위까지 먹었던 것 같은데.
실시간 반응을 살피던 구세희는 곧바로 레티의 너튜브 채널에 접속했다.
멤버들의 인터넷 방송 출연 당시 영상을 본 몇몇 시청자들로 인해, 해당 영상의 조회수는 꽤나 빠른 속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실시간 TALK 방의 참여자 수 또한 초반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고.
-나 오열할 뻔ㅠㅠ 이런 불쌍한 애들을 2년 동안이나 방치한 것도 모자라 걍 버리고 튀다니ㅠㅠ 진짜 전 사장 노무 시키 천벌받아야 함.
-갑자기 엄청난 연민이 느껴진다…… 누구 팬카페 만들 사람 없음……? 당장 가입 의사 있는데.
-짜장면 먹는 모습 졸귀다ㅠ 왠지 안쓰럽기도 하고…… 꽃길만 걸어라 얘들아ㅠㅠ
어느새 TALK 방의 주제는 프로그램이 아닌 인터넷 방송 당시의 멤버들에 대한 얘기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지켜보던 구세희의 입꼬리 또한 자연스레 올라갈 수밖엔 없었고.
어쨌건 멤버들에 대한 시청자들의 관심이 늘어가고 있다는 건 무조건 좋은 소식일 수밖엔 없었으니까.
게다가, 지금처럼 과몰입까지 더해지는 반응들이라면.
아이돌 팬들의 특성상 이번 한 번만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기에 더더욱.
애초에 40분으로 짧게 편성된 만큼, 어느덧 절반 이상의 방송 분량이 내보내진 상황이었고, TV 화면에선 쌍둥이들과 멤버들의 첫 만남이 내보내지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쌍둥이들이 등장했을 때 속마음이 어땠어요?”
“아, 이건 뭐지? 혹시 몰래 카메라인가? 처음엔 딱 그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너무 당황스러웠거든요. 근데,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너무 순하고 얌전한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턴 마음이 훨씬 놓였었죠. 휴우. 뒤에 일어날 일은 꿈에도 모르고.”
은호의 개별 인터뷰 화면과 함께 나타난 다음 장면.
바로 은호와 쌍둥이들만 남겨져 있는 모습이었다.
-으아…… 제발 그만 좀 울자, 아가들아…… 오빠가 이렇게 부탁 좀 할게. 응?
아까의 자신만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아가들을 달래는데 여념이 없는 은호의 모습.
구세희도 잠시 태블릿에서 시선을 떼고는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깡총! 깡총!
의미심장한 표정과 함께 방으로 사라졌던 은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구세희는 자신도 모르게 육성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쟤 뭐야? 저런 옷은 대체 어디서 구한 거래?”
머리부터 발끝까지 토끼 복장을 한 채로 쌍둥이들 앞에서 폴짝폴짝 뛰고 있는 은호의 모습.
구세희는 모니터링까지 잠시 제쳐두고선 그런 은호의 모습을 귀엽다는 듯 바라봤다.
“역시 아이돌이라 그런가 은근히 잘 어울리는데? 쟤 원래 저런 캐릭터야?”
하준에게 묻자, 하준은 대답 대신 미소만 지어 보이며 마시던 맥주를 마저 털어 넣었다.
-에…… 아아?
“어머, 쟤네 반응 보이는 것 좀 봐! 푸하. 토끼 변신술이 통했나 본데?”
이미 해당 장면을 알고 있는 하준과는 달리, 처음 접하는 구세희는 마치 한 명의 시청자가 된 것처럼 꽤나 몰입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장보기를 마친 멤버들이 현관문을 열고 등장했고, 동시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은호를 발견했다.
그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멍한 표정을 한 채 입을 반쯤 벌리는 멤버들.
그 모습을 끝으로 예고편의 화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뭐임. 기대 1도 안 했는데 의외로 재밌네 이거. 완전 시간 순삭이었음ㅋㅋ
-은호 졸귀다 진짜ㅋㅋ 맏형이라고 얘기 안 하면 그냥 팀 내 막내인 줄 알겠음ㅋㅋ
-앞으로 금요일은 이걸로 픽해야겠음ㅋㅋㅋㅋㅋ 개꿀잼ㅋㅋ
-레티 방송으로 사전 정보 입수하고 보니까 더 몰입됨ㅋㅋㅋ 얘네 더 뜨기 전에 팬 해야쥐. 나중에 팬부심 가지게ㅋㅋㅋ
큰 기대를 가지지 않았던 첫 방송.
하지만, 구세희마저 시청자의 마음으로 방송에 몰입할 만큼 프로그램의 재미는 기대 이상이었다.
그를 방증하듯, 실시간 TALK 창의 반응들도 방송 초반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프로그램의 재미, 시청자들의 반응, 멤버들의 인지도까지.
의외의 수확을 얻었다는 생각에 구세희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가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런 구세희의 표정을 일순간 바꾸어 버린 어느 한 장면이 예고편 속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야. 유, 유하준. 저거 뭐야? 윤채경이 갑자기 저기서 왜 나와? 게다가…….”
잠시 말문이 막힌 듯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던 구세희가 이내 하준에게로 시선을 옮기고는 황당하다는 어투로 물어왔다.
“같은 회사 식구라고? 아, 아니. 대체 언제부터 윤채경이 니네 회사 식구였는데?!”
구세희의 격앙된 톤에도 불구하고, 하준은 그저 소파에 기댄 채 여유로운 표정만 유지할 뿐.
그러고는 시청자 반응을 마저 살피라는 듯 구세희의 태블릿 PC를 가리켰다.
구세희는 여전히 멍한 표정을 거두지 못한 채 자신의 태블릿 PC로 시선을 옮겼다.
아니나 다를까, 구세희가 켜놓은 태블릿 PC 화면 위로 엄청난 화력의 채팅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