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꾸는 스타 메이커-30화 (31/165)

30화

또 한 번 하준의 앞에 나타난 그녀.

분명 아까 사무실에서의 만남이 끝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때의 일들은 완전히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윤채경은 하준을 향해 친근함과 온화함이 가득 섞인 미소를 보내오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조금 전 멘트에 반박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듯이.

아니나 다를까, 윤정유와 작가진, 그리고 멤버들을 포함한 모든 스태프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준에게로 달라붙기 시작했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모두가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인 채로.

하준에게만 들릴 만한 작은 목소리로 윤정유가 물어왔다.

“대, 대표님. 윤채경 씨가 대표님 회사 소속이었어요……? 아니, 왜 그런 중요한 사실을 여태껏…….”

좀처럼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던 윤정유도 이번만큼은 적잖게 놀란 듯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윤채경은 하준의 곁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와 하준에게만 들릴 만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가 얘기했죠? 제가 어떤 사람인지 조만간 알게 해드리겠다고. 훗, 똑똑히 보세요. 제가 대표님한테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

그러고는 곧바로 표정을 바꾸며 윤정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매번 TV로만 보다가 이렇게 실제로 뵈니까 꼭 셀럽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인데요? 제가 너무 갑자기 찾아와서 괜히 촬영에 방해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 아뇨. 그럴 리가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최고의 배우 윤채경 씨가 이렇게 와주셨는데 오히려 저희가 영광이죠.”

“어머,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고요.”

하준 쪽을 살짝 흘깃해 보이고는 윤채경이 윤정유에게 다시 말을 이었다.

“혹시 PD님만 허락하신다면 제가 같은 회사 식구들을 위해 지원사격을 좀 해주고 싶은데. 어떻게, 프로그램에 방해가 안 되는 선에서 괜찮을까요?”

“지원사격이라면…….”

“음. 뭐 깜짝 방문 식으로 제가 숙소에 찾아와서 멤버들이랑 간단히 얘기 나누는 정도만 찍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그 말씀은 지금…… 저희 프로그램에 출연하시겠다는……?”

“아, 혹시 너무 갑작스러운 얘기일까요?”

윤채경의 물음에 윤정유의 옆에 있던 작가진들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럴 리가요! 저희야 무조건 오케이죠!”

“그, 그럼요! 오브 콜스!!”

잠시 멍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윤정유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곧바로 반색을 했다.

“윤채경 씨가 이렇게 직접 저희 프로그램에 출연해 주시겠다는데 저희가 마다할 이유는 전혀 없죠. 오히려 저희 쪽에서 감사해야 할 상황 같은데요?”

그러고는 윤정유가 하준을 쳐다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렇죠, 대표님?”

하준을 향한 윤정유의 물음에, 윤채경의 시선이 다시 하준에게로 달라붙었다.

마치 지금의 상황에서 어디 거절할 수 있으면 한번 해보라는 듯.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갑자기 전개돼 버린 상황.

촬영장 내의 모든 시선은 다시 하준에게로 집중되기 시작했고, 멤버들 또한 다소 얼떨떨한 표정으로 하준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들을 한 몸에 받으며 하준은 이마 위로 손을 얹었다.

윤채경의 제안을 거절했던 건 분명 진심이었다.

애초에 멤버들만을 바라보고 한국에 돌아왔던 자신이었으니까.

물론 자신이 본 꿈과 지금의 이 윤채경이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도 있었지만, 그게 계약이라는 중대한 결정으로까지 이어지는 건 분명 또 다른 문제였다.

게다가, 현재의 분위기만 놓고 본다면 굳이 윤채경의 도움이 필요한 건지도 잘 모르겠고.

“…….”

하지만, 이렇게까지 상황이 전개되다 보니 하준 또한 생각을 달리할 수밖엔 없었다.

지금껏 경험해 온 미래 예지를 봤을 땐, 지금의 이것 또한 분명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게다가, 멤버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것 또한 분명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긴장된 침묵 사이로 하준이 짧은 한숨을 내뱉은 건 그로부터 일 분여 정도가 흘렀을 시점이었다.

“후우, 그렇게 하시죠.”

* * *

“슬레이트 치겠습니다! 하나, 둘, 셋!”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시작된 촬영은 바깥이 모두 깜깜해지고 나서야 끝이 났다.

촬영 종료를 알리는 슬레이트 소리와 함께 멤버들이 곧장 하준에게로 다가왔다.

“대표님.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윤채경 선배님이 왜 저희 숙소에…….”

“저 진짜 심장 멎는 줄 알았어요. 제가 본 게 정말 윤채경 선배님이 맞나 싶어서!”

방 안쪽에선 현재 윤채경의 인터뷰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

행여나 방문을 열고 윤채경이 나올까 싶어 문 쪽을 계속 힐긋거리며, 멤버들이 쌓아두었던 말들을 빠르게 내뱉어왔다.

“나도 촬영하는데 진짜 꿈인가 싶더라. 어떻게 그렇게 예쁘실 수가 있는지.”

“제 말이요! 정말 숨도 못 쉬겠더라니까요?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예요.”

숨도 안 쉬고 마구 쏟아내는 멤버들의 말에 하준은 희미한 미소를 살짝 머금으며 말했다.

“다들 잘했으니까 그렇게 호들갑 떨 것들 없어. 다음 주 첫방 나가고 나면 이제 본격적으로 합숙 촬영 시작되는 거 알지? 그때부턴 24시간 내내 카메라 달려 있을 거니까 그 전까지 충분히들 쉬어 둬.”

하준의 얘기에도 여전히 멤버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고, 곧바로 지호가 되물어왔다.

“근데요, 대표님. 정말 윤채경 선배님이 저희랑 같은 회사 식구가 된 거예요? 아까 촬영하면서도 계속 그렇게 말씀하시던데 선배님이…….”

지호의 얘기에 멤버들 또한 가장 궁금한 질문이었다는 듯 하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나, 하준은 쉽사리 답을 할 수가 없었다.

하준이 대답할 말을 찾던 그때, 근처에 있던 윤정유가 하준과 멤버들에게로 다가왔다.

“다들 고생했어. 고생했어요, 대표님. 그래도 촬영 몇 번 해봤다고 이제 쌍둥이들 돌보는 게 다들 꽤 자연스럽던데? 훗. 이게 다 든든한 이준 엄마 덕분인가?”

“아니에요. 다들 촬영 없을 땐 책이나 영상으로 육아 공부들을 많이 하거든요. 그게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오오, 그래? 그래도 너무 열심히 하지들 마. 그랬다가 시청자들이 우리 프로그램 다큐로 오해하면 큰일 나는 거니까.”

“크윽. 그럴까 봐 저는 아예 공부 안 하고 있어요, 피디님! 모든 건 실전 감각으로 익혀야 제 맛이죠!”

“역시. 은호가 뭘 좀 아네. 후훗.”

멤버들을 향해 싱긋 웃어 보인 윤정유가 닫혀 있는 방문 쪽을 바라보며 하준에게 말했다.

“윤채경 씨가 이렇게나 열심히 촬영에 임해주실 거라곤 정말 생각도 못 했어요. 기껏해야 잠깐 있다 가실 줄 알았는데. 따로 인터뷰까지 응해주신다길래 오히려 저희가 더 당황했다니까요?”

“…….”

“가뜩이나 멤버들 인지도가 없어서 어떻게 화제를 키워야 하나 했는데. 이거 완전 대박도 이런 대박이 없겠는데요? 첫방송 끝에 예고편으로 윤채경 씨만 넣어도 따로 홍보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겠어요. 윤채경 씨랑 같은 소속사 식구라는 것만으로도 멤버들에 대한 시청자들의 인식도 완전 바뀌게 될 거고.”

윤정유의 얘길 집중해서 듣고 있던 멤버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입을 반쯤 열어왔다.

“하, 참. 피디 생활만 10년을 넘게 해오면서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좀 얼떨떨하긴 하네요. 이쯤 되면 유 대표님 정체부터 먼저 파헤쳐 보는 게 맞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윤정유가 하준의 얼굴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는 다시 입을 열었다.

“대체 윤채경 씨랑은 어떤 관계시길래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서주시는 거예요? 게다가, 윤채경 씨가 같은 회사 식구라는 건 대체 왜 그동안 숨기셨던 거고?”

자칫하면 코가 닿을지도 모를 만한 거리에서 꽤나 진지하게 물어오는 윤정유의 질문에, 하준은 잠시 한 발자국을 물러서고는 입을 열었다.

“아, 오해가 좀 있으신 것 같은데.”

그때, 인터뷰가 진행 중이던 방의 문이 열리더니 곧 밝은 표정의 윤채경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제가 예능 출연은 좀 낯설어서 잘했는지 잘 모르겠네요. 아무쪼록 방송에 잘 좀 내보내 주세요!”

“아이, 그럼요! 윤채경 씨가 출연해주신 것만으로도 저희 프로그램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데요! 화제성이야 말할 것도 없고요. 호호호. 늦은 시간까지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

작가진들과 인사를 끝마친 윤채경의 시선이 하준이 있는 방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하준과 눈을 마주친 그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곧장 하준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피디님, 고생 많으셨어요. 덕분에 즐겁게 촬영하다 가는 것 같아요. 편집 좀 잘 부탁드릴게요.”

“저야말로 감사하죠. 어젯밤 꿈자리가 좋다 싶더니, 이렇게 좋은 일이 있으려고 그랬나 본데요? 훗.”

윤정유와 훈훈한 대화를 주고받은 윤채경이 하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저, 대표님? 지금 매니저가 잠시 다른 일 때문에 자릴 비운 상탠데. 저 좀 데려다주실 수 있으시죠?”

말을 내뱉는 와중에도 연신 입꼬리를 거두지 않고 있는 윤채경.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하준도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하시죠.”

“그럼 다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너희들도 저녁 챙겨 먹고 조만간 또 보자~”

“아, 네 선배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숙소를 빠져나와 엘리베이터에 나란히 몸을 싣는 하준과 윤채경.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힘과 동시에 윤채경이 정면을 응시하며 입을 열어왔다.

“이렇게 촬영까지 해버렸으니, 이젠 저랑 계약 안 하시면 큰일 나는 거 아시죠, 대표님?”

“…….”

“인터뷰에서 같은 회사 식구라는 걸 제가 다 말해 버려서 이젠 주워 담을 수도 없게 됐고. 이제 그만 마음 바꾸시는 게 어때요, 대표님?”

굳이 윤채경의 입으로 듣지 않아도 하준 또한 이미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촬영에 동의한 순간부터, 이렇게 될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게다가, 미래 예지를 떠올리고 난 후부터는 결국 이렇게 될 일이었다는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도 했고.

1층 도착을 알리는 엘리베이터 소리와 함께 하준이 말했다.

“주셨던 계약 조건은 그대로 이행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단, 하나만 제외하고요.”

“어머? 거들떠도 안 보시는 것 같더니, 그래도 다 읽어보시긴 하셨나 보네요?”

의외라는 듯 하준을 올려다보던 윤채경이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물어왔다.

“그 하나가 뭔데요?”

“계약 기간을 5년으로 정해놓으셨던데. 굳이 명시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요. 윤채경 씨가 원하실 때 언제든 해지해 드리는 걸로 수정하도록 하죠.”

“어머나…….”

줄곧 느껴왔지만, 일반적인 기획사 대표의 태도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하준의 모습.

윤채경은 고개를 절레 내젓고는 엘리베이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말 당최 속을 알 수 없는 분이네요. 다른 회사라면 어떻게든 계약을 더 이어가려 애걸복걸하고 난리였을 텐데.”

1층 로비를 빠져나오며 윤채경이 말을 이었다.

“그래요. 그럼 대표님이 원하는 대로 수정해서 내일 사무실에서 사인하는 걸로 하죠. 오후에 잠깐 들르도록 할게요.”

“네, 그러시죠.”

협상이 끝나고 바깥으로 걸어 나오며, 하준이 주머니에서 차키를 꺼내려던 그때였다.

이미 로비 밖에선 검은색 축제 차량이 시동을 켠 채로 대기하고 있었고, 윤채경이 다가가자 차량의 뒷좌석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잠시 자릴 비웠다는 매니저 또한 운전석에서 하준을 향해 인사를 건네왔고.

“대표님이랑 얘기는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아서 데려다 달라 했던 거예요. 그럼 내일 사무실에서 뵐게요.”

“아,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윤채경이 밴에 몸을 싣자 차량의 뒷좌석 문이 다시 자동으로 닫혔다.

곧바로 밴의 창문이 열리며 윤채경이 하준을 불러왔다.

“아 참, 대표님. 근데 계약금 관련한 얘기는 안 하시네요? 대표님이 부담스럽다 하시면 얼마든지 낮춰 드릴 의향이 있었는데.”

윤채경이 내건 조건에 포함되어 있던 계약금의 액수.

신생 기획사의 입장에선 분명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금액이었다.

의아한 듯 물어오는 윤채경의 얘기에 하준은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적어두신 계좌와 금액으로 이미 입금드렸습니다. 가시는 길에 한번 확인해 보세요.”

눈동자가 커지는 윤채경을 일별하며 하준이 짧게 덧붙였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 * *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찾아온 첫방 날.

집으로 들어온 하준은 모니터링을 위해 곧바로 TV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잠시 피로한 눈을 풀기 위해 소파에 기대고는 양쪽 눈을 지그시 감는다.

“후우.”

한국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5개월째. 쉴 틈 없이 달려온 것 같은데도 여전히 가야 할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무엇보다, 이미 먼 미래를 알고 있는 자신이었기에.

가만히 눈을 감고는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목을 뒤로 젖히는 하준.

그런데, 하준의 집에서 들리지 말아야 할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였다.

-삐빅. 삐빅.

자신 외엔 그 누구도 비밀번호를 알지 못하기에 절대 들려선 안 되는 그 소리.

-띠리링.

도어록 해제 소리와 함께 하준의 시선은 곧장 현관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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