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윤채경이 떠나고 다시 룸에 마주 앉은 하준과 최윤섭.
그녀와의 대화 이후 줄곧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최윤섭이 조금 전 하준의 말로 인해 눈동자를 키워왔다.
“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대표님? 갑자기 윤채경 기사를 덮으라니.”
“말 그대롭니다. 애초에 제보받은 내용부터가 사실도 아닐뿐더러, 기자님이 그런 치졸한 일에 이용당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가 않아서요.”
“그게 무슨…….”
단번에 알아듣기 힘든 하준의 얘기들에 최윤섭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준은 테이블 위로 자신의 휴대폰을 올려두고는 녹음된 파일 하나를 재생시켰다.
-이 바닥 생활하면서 구린 곳 하나 없이 백 프로 깨끗한 인간이 있을 것 같냐? 설령 있다 한들, 그런다고 흠집이 안 날 것 같아? 나 같은 인간이 언제든 맘먹고 달려들면 얼마든 끝장낼 수 있는 건데.
그의 정체를 안 이후, 하준이 곧바로 녹음해 두었던 파일.
파일 속 그들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내가 최 기자 그놈한테 그 비싼 선물까지 바쳐가면서 고작 그런 허술한 기사나 써달라고 했을까 봐? 크큭, 두고 보라고. 아마 최 기자 그놈이라면 내가 던진 떡밥 하나로 아주 휘황찬란한 소설 하나 써낼 테니까.
녹음 파일 속 목소리만으로도 이미 그의 정체를 알아차린 듯한 최윤섭의 얼굴.
자신의 이름이 내뱉어지자 급격히 표정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어때, 이 정도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리기에 충분한 기삿거리 아니겠어? 크크큭.
그의 비열한 웃음소리를 끝으로 약 5분여간 이어지던 대화가 끝을 맺었다.
하준이 맞은편을 바라보자, 최윤섭의 얼굴은 배신감과 격노의 감정으로 마구 뒤섞여 있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선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 이거 완전 누굴 지 꼭두각시 정도로 생각했나 보구만. 사람을 병신 취급해도 유분수지.”
말을 내뱉고는 연속으로 스트레이트 잔을 입안에 들이붓는 최윤섭.
길게 호흡을 내뱉은 뒤, 하준의 눈을 마주했다.
“이거, 언제 녹음하신 겁니까?”
“아까 잠시 자릴 비웠을 때 제 차에서 녹음한 겁니다. 주차된 제 차 옆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더군요.”
“하…… 그럼 윤채경이 했던 말들이 정말 다 사실이었나 보네. 그냥 어떻게든 무마시키려고 이것저것 다 지어낸 얘기들인 줄로만 알았더니.”
고갤 떨구고선 다시 긴 한숨을 내뱉은 그가 하준에게 아까의 상황을 설명해 나갔다.
“아까 윤채경이 그러더라고요. 자기는 애초에 숨길 생각도, 그럴 마음도 없었다고. 그래서 데뷔 전 회사와 처음 계약할 당시부터 이미 다 오픈했던 얘기들이라고요. 근데 데뷔하고 보니까 부모도 없는 천애고아로 자라온, 바르고 꿋꿋한 소녀처럼 포장이 돼 있었다 하더군요.”
“…….”
“그래서 지금이라도 비난받을 거 다 감수하고 털어놓을 테니 며칠만 기다려 달라 했는데. 후우, 제가 거절했어요. 진실이 어느 쪽이든 그건 두 사람이 다툴 문제고 저야 당연히 더 화제성이 높은 쪽으로 기사를 쓰는 게 좋은 거니까요.”
담담하게 내뱉던 그의 표정이 이내 냉소로 바뀌었다.
“하, 참. 이게 다 박성환 그 인간 농간에 놀아나는 일인 줄 알았더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텐데. 그것도 모르고 괜히 엄한 사람 인생만 망칠 뻔했으니.”
내내 차고 있던 고급 시계를 풀어 테이블 위로 내던지는 최윤섭.
“이젠 상황이 바뀌었으니 얘기도 달라져야겠죠. 그런 쓰레기만도 못한 인간의 농간에 놀아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그러고는 하준의 휴대폰을 가리키며 말했다.
“유 대표님. 그 녹음 파일 저한테도 좀 보내줄 수 있으시겠습니까? 뭐 그걸로 당장 뭘 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나중을 대비해 저도 가지고 있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명색에 저도 차장 대우 기잔데, 꼭두각시 취급까지 받고선 마냥 넘어갈 수만은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언제가 되더라도 기필코 복수는 해야지요.”
하준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휴대폰을 들어 해당 파일을 최윤섭에게 전송한 하준은 사뭇 진지한 얼굴을 하고선 최윤섭을 바라봤다.
“제보받았던 기사는 당연히 쓰지 않으실 거고. 기자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복수도 꼭 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 개인적인 부탁인데 하나만 들어주시겠습니까.”
“부탁이라면 어떤.”
자신과 눈을 마주하고 있는 최윤섭에게 하준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윤채경 씨가 비난도 감수하고 하겠다는 그것. 기자님께서 직접 도와주시죠.”
그러고는 곧바로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 일로 인해 누군가에게 약점 잡히는 일 같은 건 두 번 다시 생기지 않도록요.”
* * *
“대박…… 윤채경한테 이런 사연이 있었다니.”
사무실 모니터 앞에 앉은 김지혜가 오늘자 기사를 보며 연신 입을 벙긋거렸다.
김지혜가 보고 있는 화면 오른편으론 실시간 검색 순위가 나와 있었다.
상위권 대부분은 윤채경과 관련한 키워드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나저나 용기가 진짜 대단하네. 이렇게 자발적으로 인터뷰까지 해가면서 자기 가정사를 고백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윤채경 정도 되는 배우면 이미지에 타격 갈 것도 어느 정도 감수했어야 했을 거고…….”
무수히 쏟아져 나온 어뷰징 기사들을 스크롤해 가던 김지혜의 눈에 또 다른 기사 하나가 띈 건 그때였다.
“잉? 이건 또 뭐야. 모 기획사 대표 해외 원정 접대 및 스폰서 의혹?”
눈으로 빠르게 기사를 훑어나가던 김지혜가 곧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음…… 이상하네. 이 정도 내용이면 파장이 꽤 클 만한 기산데. 이건 왜 이렇게 잠잠하지? 실시간 검색 순위에도 없고.”
직접 포털사이트에 관련어 검색까지 이어가던 김지혜는 이내 키보드와 마우스에서 손을 떼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에휴, 하도 바람 잘 날 없는 연예계다 보니까 다들 그냥 그러려니 하는 건가? 어뷰징 기사도 하나도 없고.”
말을 내뱉고는 대표 자리에 앉아 있는 하준에게로 시선을 옮기는 김지혜.
오전부터 내내 떠들썩한 연예계 사건에도 불구하고, 하준은 별다른 관심이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대표님은 이런 거에 원래 별로 관심 없으세요? 실시간 검색 순위부터해서 지금 연예란 댓글들까지 완전 떠들썩한데?”
“글쎄. 우리랑은 딱히 상관없는 일이니까. 연예란 시끄러운 거야 늘 있는 일이기도 하고.”
덤덤한 어투로 내뱉고는 하준이 화제를 돌렸다.
“오늘 애들 촬영 날인데 진웅이랑 예슬이는 숙소로 바로 간 건가?”
“아, 아뇨! 아까 대표님 출근 전에 잠시 사무실 들렀다가 곧바로 나갔어요. 다음 주 첫방 나가고 나면 한동안 계속 촬영 있을 거라고, 애들 먹을 거랑 필요한 것들 미리 사놓는다고 하던데요?”
김지혜의 말에 하준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한 주 앞으로 다가온 첫방 날짜.
물론 가수로서의 정식 데뷔는 아니지만, 라는 이름을 세상에 처음 알리는 날인 만큼 하준 또한 긴장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번 윤채경과의 만남이 미래 예지와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만 남아 있는 상태였기에.
하준이 잠시 상념에 빠져 있던 때.
자리 위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에서 진동이 일기 시작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하준은 통화를 연결했다.
“네, 최 기자님.”
-출근은 잘하셨습니까. 유 대표님? 오늘 날씨가 화창하니 아주 좋은데요?
“네, 그런 것 같네요.”
-하하. 아, 뭐 다른 건 아니고요. 오늘 자로 뜬 기사 보셨나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댓글 반응들 보니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응원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것 같더라고요? 게다가, 이번 일로 윤채경 씨 이미지도 더 좋아질 것 같고.
“네, 그렇지 않아도 관련 기사들이 많이 떠 있길래 봤습니다. 최 기자님께서 좋은 방향으로 잘 써주신 것 같더라고요.”
-하하, 별말씀을.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유 대표님이 얘기한 그날 바로 윤채경 씨한테 연락했어요. 윤채경 씨도 마음의 짐을 빨리 내려놓고 싶다면서 그러자 했고요. 뭐 그래서 이렇게 속전속결로 진행해 버린 거죠. 하하.
웃음소리를 내오던 최윤섭이 이내 목소리 톤을 낮추고는 말을 이어왔다.
-아 참, 혹시 박 대표 관련한 기사도 보셨습니까? 암만 생각해도 그 인간 하는 짓이 너무 괘씸해서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데스크에 말도 안 하고 그냥 제 맘대로 기사 하나 써서 올려 버렸는데.
“아, 네. 보긴 했습니다. 근데 별다른 이슈가 된 것 같진 않더라고요. 관련 기사도 전혀 없는 것 같고.”
-뭐, 그럴 수밖에요. 박 대표 그 인간이 단번에 지인 줄은 알았는지 재빠르게 손써서 싹 다 내리게 했거든요. 아마 남은 것도 곧 내려갈 겁니다. 뭐 예상했던 일이기도 하고 대충 이 정도면 그 인간한테 경고 정도는 날린 셈이니까 이걸로 만족해야죠. 쓰읍.
그가 이번 일을 그냥 넘기지 않을 거란 건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하준이 그에게 건넨 녹음 파일엔 B&D 대표 박성환의 접대 관련 내용 또한 함께 녹음돼 있었으니까.
꽤 파장이 클 만한 사건임에도 이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에, 이 바닥에서 박성환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대충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아, 그러고요, 대표님. 박 대표랑 언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제보자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그 인간 찍소리도 못 하게 하려면 그 방법밖엔 없을 것 같아서…… 뭐 물론 그게 대표님이라는 건 절대 알 수 없겠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대표님한테 피해라도 갈까 봐…….
꽤나 조심스럽게 내뱉는 최윤섭의 얘기에 하준은 담담한 어투로 답했다.
“네. 어떤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그 부분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이거 제가 안 해도 될 얘기를 해버려서 괜히 대표님만 곤란하게 만든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무쪼록 조만간 식사 한번 하시죠, 대표님! 제가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그러시죠. 들어가세요.”
통화를 종료한 하준은 휴대폰을 다시 책상 위로 올려두고는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날 밤, 굳이 하지 않아도 됐을 행동들을 자처했던 하준.
분명 미래 예지의 ‘그 이름’과 윤채경이 동일 인물이라는 근거는 아무 곳에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스스로도 그때의 행동들이 쉬이 납득이 가질 않고 있었고.
무엇보다, 최윤섭에게 윤채경을 도와주길 부탁했던 일은 원래의 자신이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행동이니까.
다만, 그 순간 하준이 이성보단 감정에 더 치우칠 수밖엔 없었던 이유.
박성환의 입에서 내뱉어진 두 글자 때문이었다.
‘고아’.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이성을 앞서 버렸던 거고.
“후우.”
긴 한숨과 함께 상념을 털어 버리고 왼쪽 손목을 들어 올린 하준.
곧 그는 겉옷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시게요, 대표님?”
“애들 숙소에. 진웅이 볼일 다 보고 오면 아무래도 늦을 것 같아서.”
“아하, 넵! 그럼 운전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대표님!”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출입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나가는 하준.
머릿속으론 오늘의 일정들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런데, 하준이 문 앞에 다다라 손잡이로 손을 뻗으려던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바깥쪽에서 먼저 문손잡이를 돌리는 듯싶더니.
서서히 문이 열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하준의 시야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 계셨구나? 혹시나 벌써 나가고 안 계시면 어떡하나 했는데.”
하준을 올려다보며 씩 웃어 보인 그녀는 사무실 안쪽으로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다시 몸을 반쯤 돌려 하준을 올려다보는 그녀.
“뭐, 초면은 아니니까 소개는 따로 필요 없을 것 같은데. 그렇죠? 유 대표님?”
바로, 윤채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