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여보세요? 제 말 듣고 계세요, PD님?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를 귓바퀴로 흘리며, 윤정유는 곧바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하준을 꽤나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기사의 내용뿐 아니라, 최윤섭으로부터 들은 얘기들이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까닭.
하준이 가까이 오자, 윤정유는 곧바로 막내 작가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유 대표님. 이 기사, 정말 유 대표님이 제보하신 건가요? 이거 쓴 기자 말로는 대표님이 직접 제보하신 내용이라는데.”
윤정유의 입에서 뱉어진 얘기에 옆에 있던 메인 작가와 막내 작가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저, 정말 대표님이 제보하신 거라고요?!”
순간 자신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는 걸 깨닫고는 이진주가 곧바로 주변을 훑었다.
그러고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을 덧붙였다.
“아니, 대체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내용을…….”
하준은 자신에게 달라붙은 세 사람의 시선을 마주하며 침착함을 유지했다.
이미 이곳에 오기 전 기사가 나갔다는 사실은 확인을 끝마친 상태.
이제 하준에게 남은 건 작가진뿐 아니라 연출자인 윤정유을 아무런 오해 없이 충분하게 납득시키는 일이었다.
“네, 제가 제보한 게 맞습니다.”
말을 내뱉은 하준이 이진주를 바라봤다.
“물론 사실 여부에 대해선 모두 확인을 끝마친 내용이고요.”
“사, 사실 확인을 끝내셨다고요? 아니 그럼…….”
하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사의 내용은 모두 사실이 맞습니다. 아마 제가 제보하지 않았더라도 곧 머지않아 터지고 말았을 일일 거고요.”
하준이 내뱉은 말들에 작가진들이 입을 벙긋거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고는 이내 기사의 내용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준은 이전보다 한층 더 어두워진듯한 표정의 윤정유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우선, PD님께 아무런 상의도 없이 기사를 제보하게 된 건 죄송합니다. 만에 하나 PD님을 설득시키지 못 했을 경우를 대비해 우선 내용만 전달했던 건데, 저하고 한 약속을 바로 어기고 기사를 내보낼 줄은 전혀 예상 못 했습니다. 꽤 유명한 기자분이라길래 믿고 전달했던 건데.”
“저를 설득시키지 못했을 경우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죠?”
평소의 윤정유와는 달리, 표정과 어투에 냉담함이 다분히 묻어 있는 듯한 모습.
“사실 아까 낮에 PD님께 섭외 과정에 대한 얘길 듣고는 막내 작가님께 따로 프로필을 요청드렸었습니다. 물론 충분한 논의 과정을 거쳐 결정하셨을 거란 건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때때로 출연자들의 과거 사건들로 인해 일이 커지는 경우도 생기다 보니 한 번 더 꼼꼼히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었습니다.”
하준의 얘기에 막내 작가가 입술을 더듬으며 말했다.
“아, 그래서 아까 요청하셨던 거구나…….”
하준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프로필을 보니 SNS상에서 꽤나 인지도가 있는 인플루언서라고 체크되어 있더라고요.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저희 회사 경리 직원한테 프로필을 보여줘봤습니다. 그런데.”
“그런데요?”
“당장 섭외를 취소시켜야 한다는 말이 돌아왔습니다.”
하준의 얘기에 윤정유의 눈이 순간적으로 가늘어졌다.
“알고 보니 SNS를 하기 이전에 파워블로거로서 활동을 한 이력이 있는 분이더군요. 기사의 내용처럼 꽤나 껄끄러운 문제들로 피해자들도 이미 한둘이 아닌 상황처럼 보였고요. 만약 저희 직원이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면 방송이 나가기 전에 해당 사실을 내부에서 알아차리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일 것 같았습니다.”
이어지는 하준의 설명에 윤정유가 표정을 유지한 채로 되물어왔다.
“그 직원이라는 분은 어떻게 그걸 기억하고 있었던 거죠? 저희 섭외 과정에서 누구도 알아내지 못했던 사실을?”
“저희 직원이 바로 그 당시 피해자였으니까요.”
하준이 내뱉은 말에 작가진들의 입이 또 한 번 벙긋거렸다.
이내 이어지는 나지막한 탄식들.
내내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오던 윤정유의 표정 또한 조금 전 하준의 말로 인해 사뭇 달라진 듯한 모습이었다.
“물론 피해 규모가 그렇게 크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그래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큰 악재를 막기 위해 출연을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고요.”
물론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해 김지혜에게는 대략적인 상황 설명을 해놓은 상태였지만, 당연하게도 그녀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었다.
다만 그 짧은 시간 안에 윤정유를 납득시킬 방안을 찾기 위해선 이게 최선이었던 거고.
무엇보다, 연출자인 윤정유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기에.
조금은 누그러진 듯한 윤정유를 바라보며, 하준도 차분한 톤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처음부터 제보를 목적으로 기자님을 만났던 건 아니었습니다. 우연찮게 식사 자리가 생기게 됐고,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만약을 대비해 내용만 전달해 놓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었습니다. 만에 하나 제 얘길 듣고도 PD님께서 섭외를 강행하신다면, 저한테 남은 방법은 그거 하나뿐이니까요.”
하준의 얘기에 윤정유의 얼굴 위론 여러 생각들이 교차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준이 무얼 염두하고 내뱉은 말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기사를 내보내는 건 정말 최후의 보류였는데, 그렇게 말이 끝나자마자 기사를 내보낼 거라고는.”
이제야 상황을 모두 이해했다는 듯, 작가진들은 하준의 얘기에 말들을 보탰다.
“어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기자랑 약속이란 걸 하다니! 대표님이 잘 모르셔서 완전 속으신 거예요. 이 바닥에서 얼마나 유명한 분인데, 그분이!”
“맞아, 맞아!”
“휴우…… 그나저나 오늘 촬영분도 거의 다 진행된 상태에서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그러게요…… 저희가 사전에 더 꼼꼼히 조사를 하고 알아봤어야 했던 건데.”
말을 내뱉은 작가진의 시선이 조심스럽게 윤정유에게로 향했다.
입술을 질끈 깨물며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던 윤정유도 시선을 느끼고는 짧게 말을 뱉어왔다.
“어떡하긴. 싹 다 엎어야지.”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윤정유가 이내 길게 한숨을 내뱉고는 하준을 올려다봤다.
“휴우. 뭐, 대표님의 방법이 정말 최선이었던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게 맞는 것 같긴 하네요. 우리가 늦게 알면 알수록 피해는 더 커졌을 테니까.”
윤정유의 얘기에 작가진들도 반성과 수긍이 섞인 듯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윤정유가 이마를 짚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지금은 그것보다 죄송하다는 말을 먼저 하는 게 도리인 것 같아요. 그래도 나름 경력 있는 PD라고 자부했는데, 하마터면 아직 데뷔도 안 한 그룹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뻔했으니까. 프로그램 하나를 통째로 말아먹을 뻔한 건 말할 것도 없고.”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는 듯, 윤정유는 손가락으로 이마를 누르며 고개를 연신 내저었다.
그러고는 잠시 후, 조금 전과는 사뭇 달라진 표정으로 하준을 다시 올려다봤다.
“유 대표님.”
“네, PD님.”
“제가 입사 이래 단 한 번도 이런 약속을 제 입으로 직접 꺼내본 적이 없는데요.”
꽤나 비장한 표정의 윤정유는 곧이어 신중한 음성으로 말을 덧붙여왔다.
“ 멤버들.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책임지고 띄워 드릴게요. 제 모든 커리어를 걸고.”
* * *
한 주가 지나고, 다시 시작된 정식 육아 촬영날.
본의 아니게 갖게 된 일주일이라는 재정비 시간 덕에, 현장의 분위기는 지난번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카메라의 위치와 개수, 더욱더 정교하게 세팅된 매직 미러, 멤버들의 숙소를 보다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각양각색의 소품들까지.
여전히 멤버들에 대한 미안함이 남아 있는 윤정유의 디테일한 지시 사항들로부터 비롯된 것들이었다.
분주한 촬영 현장을 둘러보던 윤정유가 이제 막 도착한 하준을 발견하고는 곧장 다가왔다.
“대표님!”
“네, PD님. 일찍 오셨네요.”
“그래야죠. 재촬영인 만큼 작은 실수도 일어나지 않게 만반의 준비를 해둬야 하니까. 까딱하다 오늘 촬영도 지난번처럼 엎어지기라도하면…… 어휴. 정말 상상도 하기 싫어요.”
고개를 절레 내젓고는 윤정유가 다시 입을 열어왔다.
“대표님도 오늘 촬영은 지켜보실 건가 보네요? 지난번엔 내내 안 보이시더니?”
“그럼요. 그땐 당장 수습해야 할 문제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자릴 비웠던 거니까.”
하준의 말뜻을 이해 못 할 리 없는 윤정유는 금세 반성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으흠…… 제가 괜한 얘길 꺼내서 제 무덤을 팠네요.”
“하하, 그럴 의도로 한 얘기는 아니었는데.”
“아녜요. 저야 그래도 싸죠 뭐.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저 정말 평생을 두고두고 후회하며 살았을 거예요. 제 남은 커리어랑은 별개로.”
윤정유가 고개를 절레 내젓고는 말을 이어갔다.
“후우. 암튼, 그 인플루언서라는 여자는 지금 줄줄이 고소당하고 아주 난리도 아니라더라고요. 대표님이 제보하신 기사 보고 맘카페부터 해서 온갖 피해자들이 다 들고 일어서는 바람에. 보니까 그동안 아예 배 째라 식으로 대처했었나 보던데요. 당연히 피해 회복은 전혀 안 됐던 상태고.”
“이젠 그러지 못할 겁니다. 고소 건수에 따라 처벌 수위는 계속 높아질 테니, 어떻게든 한 사람이라도 더 합의 보려고 노력하겠죠.”
“그래야죠. 진즉 그렇게 됐어야 했던 일이기도 하고. 휴,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도 가해자는 떵떵거리며 살고, 피해자들은 계속 고통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을 텐데. 다 대표님 덕분이에요. 물론 저야 말할 것도 없고.”
하준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동시에,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듯 이마를 한번 짚어 보이고는 윤정유가 촬영 현장을 가리켰다.
“그래서 저도 이번엔 아주 만반의 준비를 갖췄어요. 카메라 숫자부터 해서 디테일한 사항들까지 제가 직접 일일이 다 체크하고 살폈거든요! 지난번 실수도 실수지만, 대표님과 한 약속 꼭 지키려고.”
“그렇지 않아도 지난번 때랑은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싶었는데. 왠지 벌써부터 든든한 마음이 드는데요.”
“그렇죠?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신뢰, 믿음. 이런 건 아주 목숨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라니까요? 제가 내뱉은 말은 꼭 지킬 테니까 두고 보세요.”
윤정유의 비장한 표정에 하준은 온화한 미소로 화답했다.
“아 참, 그럼 섭외 건은 전에 말씀하신 그 쌍둥이들로 된 걸까요?”
“그럼요. 촬영이 엎어진 바람에 자연스럽게 그쪽 일정에 맞출 수 있게 됐으니까요. 원래 플랜대로 다시 돌아온 거죠. 물론 뭐…… 그 덕에 첫방을 2주도 안 남기고 첫 촬영을 하게 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긴 했지만.”
앞으로 첫방까지 남은 기간은 고작 10일.
오늘의 촬영을 제외하고도 편집과 예고편 작업, 프로그램 홍보 관련 등의 빡빡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는 만큼, 결코 여유로운 시간은 아니었다.
보통의 프로그램 제작 과정과 비교한다면 미친 짓이나 다름없는 셈.
하준은 잠시 윤정유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거실에 모여 있는 멤버들을 바라봤다.
지난번 촬영이 엎어졌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그래도 프로그램이 엎어진 게 아니라 다행이라고 안심하던 모습들이 떠올랐다.
매번 실패의 연속이었을 멤버들에겐 그것만으로도 무척이나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을 것.
그래서인지 저마다의 얼굴 위로 강한 의지들이 다분히 느껴지고 있었다.
“자, 그럼 준비 다 끝났으면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조연출의 말과 함께 곧이어 FD가 카메라 앞으로 다가왔다.
“자 슬레이트 치겠습니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시작된 촬영.
거실에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는 멤버들의 얼굴 위론, 곧 맞이할 손님에 대한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잠시 후.
“어……?”
현관문을 열고 등장한 전혀 예상치 못한 ‘존재들’로 인해, 기대감은 일순간에 다른 것으로 바뀌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