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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스타 메이커-22화 (23/165)

22화

잠시 후, 흐릿해졌던 시야가 조금씩 선명해지며 어떠한 장면 하나가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하준은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바로, 미래 예지.

하준은 마른침을 삼키며 뒤이어 나타나는 장면들에 집중했다.

“하, 어떡하죠 PD님? 지금 시청자게시판부터 해서 프로그램 폐지하라는 글들이 끝도 없이 올라오고 있어요. 내용 보니까 대부분이 맘카페 글 보고 올리는 것 같은데…….”

“맘카페에 올라온 글 보면 피해자들도 한둘이 아닌 것 같아요. 이미 몇 년 전에 올린 글들도 보이고…… 하, 이런 것도 모르고 섭외를 하다니.”

“일단 저희도 어떤 입장이든 빨리 내놔야 하지 않을까요……? 이대로 가만히 있기엔 여론이 너무 안 좋은데. 기자들도 이때다 싶어서 온갖 악의적 기사들만 마구 뽑아내고 있고.”

지금의 대화만으로는 어떤 상황인지 쉽게 판단이 서질 않고 있었다.

다만, ‘폐지’라는 단어까지 언급되는 걸 보면 무척이나 심각한 상황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하준 또한 복잡한 감정들로 머릿속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이전의 미래 예지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으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뿐이야.”

내내 입술만 질끈 깨물던 윤정유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어왔다.

“섭외를 다시 해서 계속 밀고 나가든.”

잠시 말을 멈추고는 이내 덧붙였다.

“아니면 프로그램을 폐지하든.”

‘폐지’라는 단어에 일순간 심각해진 분위기.

윤정유는 표정을 유지한 채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근데, 섭외를 다시 해서 진행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당장 다음 주 방송 일정에 맞추기도 어려울뿐더러, 그런다고 돌아선 시청자 민심을 회복시키긴 힘들 테니까.”

윤정유의 얘기에 작가진들 또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죄송해요, PD님…… 저희가 확실히 조사를 했어야 했는데…….”

“아냐. 어차피 최종 결정은 내가 한 거잖아. 게다가 쌍둥이 쪽 섭외가 불발되는 바람에 우리한텐 딱히 선택지가 없기도 했고.”

말을 내뱉은 윤정유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결국,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이고는 이마에 손을 짚었다.

“젠장! 세상 평범한 애 엄마인 척하더니 뒤에선 사람들 등이나 처먹는 여자일 줄이야. 진짜 살면서 이렇게 뒤통수 맞기는 또 처음이네.”

참았던 분이 터지고 만 듯, 윤정유가 책상 위를 주먹으로 격하게 내리쳤다.

“제 말이요! 올라온 피해자들 글 보면 정말 가관도 아니더라니까요? 인플루언서랍시고 자기한테 협찬 거부하는 가게는 온갖 악의적인 글들로 피해 주고. 공구 진행했다가 문제 생기면 완전 배 째라 식이고. 진짜 무슨 그런 여자가 다 있나 모르겠어요!”

“문제는 그런 여자가 육아프로그램에 나왔다는 거고, 그게 바로 우리 프로그램이라는 거야. 가뜩이나 피해자들 대부분이 애 엄마들인 상황에서.”

작가진들의 연이은 말들에 윤정유가 이마에서 손을 떼고는 말했다.

“그만하자. 지금 와서 얘기해 봤자 다 소용없는 얘기들뿐이니까. 어쨌든 섭외 전에 제대로 조사 못한 우리 잘못이 제일 커.”

그녀의 말에 작가진들도 고개를 숙이고는 입을 닫았다.

이후로 한동안 회의실 내엔 침묵만이 흘렀다.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못한 채, 윤정유의 결정이 내려지길 기다리고 있는 듯한 모습들.

그때, 막내 작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왔다.

“저, 그런데…… 만약 저희가 프로그램 폐지를 하게 되면 멤버들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침묵을 깨고선 내뱉은 그녀의 말에 팀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달라붙었다.

그리고 곧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듯 옅은 한숨들을 내뱉었다.

“지금 멤버들에게까지 비난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 끝내게 되면 너무 큰 타격이 될 것 같은데…… 게다가 지금처럼 데뷔를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말끝을 흐리며 그녀가 고개를 떨구었고, 다시 회의실 내엔 침묵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상석에 앉아 있는 윤정유 또한 입술만 질끈 깨물 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결심을 내린 듯한 얼굴로 윤정유가 천천히 말을 꺼내왔다.

“아무래도 프로그램은…….”

그때, 하준의 눈앞 장면들이 일순간 흩어지기 시작하더니, 아까와 마찬가지로 또 한 번 시야가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하준의 귓바퀴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듣고 계세요?”

서서히 회복되는 시야와 함께 드러나고 있는 촬영장의 모습.

하준의 눈앞엔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한 윤정유가 자신에게 손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듣고 계시냐니까요, 대표님? 설마 지금, 서서 주무시는 건 아니죠?”

“아.”

하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선 짧게 운을 뗐다.

하지만, 여전히 조금 전 장면들로 인한 충격은 가시질 않고 있었다.

“얘기하다 말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세요? 난 또 하도 멍만 때리시길래 대표님한테 기면증이라도 있나 싶었네.”

살짝 눈썹을 들썩이고는 윤정유가 말을 이었다.

“무튼, 섭외 과정은 그렇게 됐어요. 뭐 좀 아쉽기는 해도 또 모르죠? 오히려 이렇게 된 게 대박의 전초일 지도? 훗.”

앞당겨진 편성 날짜, 그로 인해 바뀌게 된 섭외 인물.

앞으로 일어날 엄청난 미래에 대해 조금도 알 리 없는 윤정유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고 있었다.

하준은 미래 예지 속 대 화장면들을 떠올리며 윤정유에게 물었다.

“PD님, 혹시 아기 엄마도 방송에 노출이 될 예정인가요?”

“그럼요. 아기가 직접 자기소개를 할 순 없으니까. 좀 있다 오시면 인터뷰 장면도 찍을 예정이에요.”

역시 예상대로였다.

아마도 이게 발단이 되어 피해자들이 맘카페에 호소 글을 올리게 되는 걸 거고.

하준은 머릿속이 복잡할 수밖엔 없었다.

연출자인 PD에게 함부로 반대 의견을 꺼낼 수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자신이 본 미래 예지를 입밖으로 내뱉는 건 더더욱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준은 촬영 스케줄표를 훑고 있는 윤정유를 앞에 두고선 빠르게 생각들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섭외 과정이 어찌 됐건, 중요한 건 이 섭외 하나로 프로그램이 폐지 위기까지 놓이게 된다는 것.

그로 인해 막내 작가의 마지막 말처럼 멤버들은 데뷔도 전에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될 거고.

어떻게든 지금의 상황을 바꿔야만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좀처럼 혜안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잠시 후면 예정대로 모든 촬영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에.

“자자, 다들 촬영 준비 서둘러 주세요! 한 시간 내로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조연출의 말과 함께 스태프들이 더욱더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실 중앙에 모여 있는 멤버들 또한 의상과 메이크업을 다듬느라 여념이 없는 모습들이었다.

하준이 어두운 표정으로 촬영장을 훑고 있던 그때,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 진동이 일기 시작했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구세희로부터 온 전화였다.

잠시 고민하던 하준은 구석으로 가 통화를 연결했다.

-유하준, 어디야?

“촬영장. 왜?”

-참나, 왜? 넌 어떻게 된 애가 나한테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없지? 어쨌거나 섭외든 편성이든 최종 사인을 해준 건 난데!

“그 말 들으려고 전화한 거면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 지금은 내가 좀 처리할 일이 있어서.”

-야야! 이게 진짜. 내가 고작 그런 말이나 들으려고 전화했겠냐? 나도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아주아주 바쁜 사람이거든?

하준이 말이 없자, 통화가 끊겼나 잠시 확인하는 듯싶던 구세희는 끊기지 않은 걸 확인하고는 곧바로 말을 이어왔다.

-아직 촬영 전일 테니까 잠깐 시간 좀 내서 나와. 근처에서 점심 약속이 생겼는데 너도 알고 지내면 여러모로 좋을 사람일 것 같아서 소개 좀 시켜주려고 하니까.

“소개?”

-응. 썬데이미디어에 최윤섭 기자라고 있는데 이 바닥에선 꽤 유명한 사람이야. 알아둬서 나쁠 거 없는 사람이니까 잠깐 나와서 얼굴이나 비춰.

평소라면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러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하준은 거절을 위해 입술을 뗐다.

그런데 그때, 수화기 너머에서 구세희의 뾰족한 목소리가 다시 쩌렁하게 울려왔다.

-아이, 진짜! 너도 그일 계속 하려면 기자 한 명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거 아냐? 말했잖아, 이 바닥에선 꽤 유명한 사람이라고. 이 기자가 기사 하나 쓰면 조회 수가 얼만지나 알아? 잔말 말고 그냥 나와. 나와서 밥 한 끼만 먹으면 되는 거니까.

구세희의 계속되는 채근에 하준은 한숨과 함께 이마를 문질렀다.

자신을 위해 굳이 자리까지 마련한 그녀의 성의를 마냥 무시하기도 쉽지 않았기 때문.

그런데, 하준이 양쪽 관자놀이를 짚으며 고민을 이어가던 때, 문득 하준의 머릿속으로 어떠한 생각 하나가 강하게 스쳐 가기 시작했다.

하준은 곧바로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그 기자 기사에 조회수가 높다는 건 그만큼 신뢰도가 높다는 뜻이겠네. 그렇지?”

“신뢰도? 뭐…… 그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긴 하겠다만.”

구세희의 말에 하준은 왼쪽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어차피 곧 시작될 촬영을 막을 수는 없기에 하준이 이곳에 남아 있는 건 무의미한 상황.

게다가, 해당 촬영분 또한 의미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고.

결정을 내린 하준은 수화기에 대고 곧바로 말을 내뱉었다.

“지금 출발할 테니까 문자로 주소 찍어줘.”

* * *

잠시 후 하준이 도착한 곳은 강남 모처의 고급 차이나 레스토랑.

직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룸 안엔 먼저 도착해 메뉴판을 훑고 있는 구세희가 있었다.

“바로 온다더니 정말 바로 왔네? 최 기자는 차가 막혀서 좀 늦는다고 하니까 일단 메뉴나 고르고 있자.”

하준이 옆자리에 앉자, 구세희가 메뉴판을 건네며 말했다.

“그나저나 끝까지 거절할 줄 알았더니 웬일로 오케이했대? 너도 이 일 하다 보니까 인맥의 필요성이 좀 느껴지기는 했나 보지?”

피식 웃어 보이고는 구세희가 말을 이어갔다.

“아까 얘기한 대로 썬데이미디어에 최윤섭이라는 기잔데, 나한테 이것저것 도움 받은 게 좀 있어서 오늘 그 빚 갚을 겸 만들어진 자리야. 마침 연예부 기자기도 하니까 서로 얼굴도 터놓고 하면 언젠간 도움 주고받을 날도 있지 않겠어?”

“빚?”

“아, 뭐 얘기하자면 좀 길고. 암튼 그것 때문에 오늘 나한테 거하게 쏘기로 한 거니까 넌 그냥 편하게 밥만 먹으면 돼. 어디까지나 오늘은 내가 갑인 거니까. 호호.”

새침하게 웃어 보인 구세희는 다시 메뉴판으로 시선을 옮겨갔고, 하준은 그런 구세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미 이곳에 오는 동안 계획들에 대해선 모두 끝마쳐 놓은 상황.

게다가 필요한 조사들까지도.

그럼에도 하준에겐 좀 더 확실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하준은 메뉴판을 내려놓고 구세희에게 말했다.

“네가 받기로 했다는 그 빚, 오늘 내가 대신 좀 써도 될까? 너한텐 내가 나중에 따로 갚는 걸로 하고.”

하준의 뜬금없는 말에 구세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오늘 내가 그 기자한테 좀 부탁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자세한 건 나중에 따로 설명하기로 하고.”

“……흠.”

하준을 오랫동안 봐온 구세희였기에 그의 이런 부탁이 꽤나 낯설게 느껴질 수밖엔 없었다.

잠깐 동안 하준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던 구세희는 이내 알겠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왔다.

“그래, 뭐 그렇게 해. 대신 나중에 너한텐 더 크게 받아낼 거니까 그때 가서 딴소리하지나 말고.”

“그래, 고마워.”

말을 내뱉은 구세희는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메뉴판으로 시선을 옮겨갔다.

그리고 누군가의 노크 소리와 함께, 닫혀 있던 룸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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