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꾸는 스타 메이커-19화 (20/165)

19화

룸의 문이 열리며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문을 닫자, 틈을 비집고 들어왔던 소음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하하. 김명섭이라고 합니다. 유하준 대표님 맞으시죠?”

꽤 험상궂은 외모에 헤어젤을 잔뜩 바른 듯 윤기가 좔좔 흐르고 있는 짧은 스포츠머리.

김명섭의 첫인상을 확인한 하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짧게 인사에 답했다.

“네. 바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앉으시죠.”

하준이 상석을 가리키자, 김명섭이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리로 향하는 동안, 김명섭이 테이블 위를 빠르게 훑었다.

빼곡히 깔려 있는 온갖 종류의 고급 양주들을 보고는 그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자리에 앉고 나자, 곧장 담배와 라이터를 테이블 위로 올려두며 하준의 얼굴을 바라봤다.

“팔도에 새 대표님이라길래 어떤 분이신가 했는데. 이거, 상당히 젊은 분이셨군요? 하하. 그나저나 전혀 일면식도 없는 분이 갑자기 제게 대접을 하고 싶다 하시길래 솔직히 조금 당황스럽긴 했습니다.”

“네, 이해합니다. 회사 초기에 저희 애들을 케어해 주셨다고 하길래 직접 얼굴도 뵙고 감사 인사도 드릴 겸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아, 그 녀석들요? 하긴, 체계도 없는 회사에 아무것도 모르는 코찔찔이들 챙기느라 제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긴 했습죠. 크하하. 뭐 아무튼,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앞으로 잘 지내보도록 합시다!”

호탕하게 웃어 보인 김명섭이 하준을 향해 악수의 손길을 내밀어왔다.

그러나, 하준이 양주를 집어 들기 위해 자리를 떼는 바람에 그의 손은 허공을 쓸쓸히 맴돌 수밖에 없었다.

민망해진 김명섭은 내밀었던 손을 방황하다 눈앞에 있는 담배를 집어 들었다.

“한 잔 받으시죠.”

“그럽시다.”

하준이 따라주는 술을 받기 위해 김명섭도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그런데, 눈앞에 이어지는 장면에 김명섭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잔을 채우는 하준의 손이 한 손뿐이었기 때문이다.

“흠, 지혜한테 듣자 하니 미국에서 꽤 오래 계셨다고요?”

“네, 맞습니다.”

“허허, 그래서 미국 문화에 더 익숙하신가 보군요. 뭐, 좋습니다.”

평소 같았다면 한소리 내뱉었을 법도 했지만, 오늘은 자리가 자리인 만큼 김명섭은 쿨하게 넘어가기로 했다.

무엇보다, 눈앞에 놓인 수많은 고급 양주들이 그의 마음을 한껏 관대하게 만들고 있기도 했고.

잠시 후, 빠르게 술잔을 비워가던 김명섭이 꽤 취기가 올라온 듯한 어투로 테이블 위를 훑었다.

“끄윽. 그나저나 우리 유 대표님, 술 한번 특이하게 먹는구만그래. 보통은 뜯어놓은 거 다 먹고 새거를 뜯지 않나?”

그의 말처럼 테이블 위에 놓인 모든 양주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마개를 오픈한 상태였다.

하준은 조금 전 오픈한 새 양주를 김명섭의 잔에 따르며 답했다.

“이렇게 자리할 날이 언제 또 있을지 모르니까요.”

하준의 의미심장한 말에도 김명섭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눈치였다.

“크큭, 없긴 왜 없어. 이 바닥 넓어봤자 얼마나 넓다고. 내 앞으로 우리 유 대표 하는 일이라면 힘 닫는 데까지 밀어줄 테니까 든든한 형님 하나 생겼다 생각하라고! 크하하.”

거하게 취한 듯 반말로 내뱉는 김명섭의 말에도 하준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잠시 후, 하준은 왼쪽 손목의 시계를 한번 확인하고는, 김명섭의 테이블 위로 장부 하나를 툭 던졌다.

“……응? 뭐야?”

김명섭이 풀려 있는 눈으로 장부를 펼쳤다.

그러자, 그 안엔 멤버들과 회사 간의 맺었던 계약서들이 첨부돼 있었다.

“제가 오기 전 회사의 장부를 보니 이상한 점들이 꽤 보이더군요. 아마 보면 바로 아시리라 생각이 돼서요.”

“알긴 뭘 안다는 거야? 난 봐도 도통 뭔지 모르겠는데.”

“흠, 그런가요.”

하준은 담담한 어투로 말을 내뱉어갔다.

“분명 계약서엔 멤버들에게 지급되어야 할 계약금 액수가 명시되어 있습니다. 단순 연습생이 아닌 데뷔가 확정된 멤버들에게 지급되는 금액이죠. 그런데, 장부엔 그 금액이 체크되어 있지 않더군요.”

그제야 하준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 김명섭의 표정이 조금씩 반응하기 시작했다.

“듣자 하니 전 사장님으로부터 무척이나 신임을 받는 분이셨다 하더군요. 그래서 이런 중요한 사안들도 대부분 도맡아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고.”

“지금 뭐 하자는…….”

“아까 체계가 없는 회사라고 하셨던가요? 확인해보니 정말 그랬던 것 같더군요. 일개 팀장의 직급으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짓들을 아주 유용하게도 활용했던 걸 보면.”

하준은 김예나의 입에서 김명섭의 이름이 내뱉어졌을 때 보였던 강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은호로부터 듣게 된 김명섭과 멤버들 간의 일들까지.

하준은 격노로 번지려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치셨습니다. 중간에 돈을 빼돌린 것도 모자라, 멤버들 모르게 부모님들로부터 돈까지 뜯어내고. 어떻게든 참고 넘기려 해도 도저히 그것만은 넘길 수가 없겠더라고요.”

김명섭이 말을 내뱉기 위해 입을 오물거렸지만, 하준은 틈을 주지 않고 곧바로 장부를 집어 들었다.

“이 장부는 내일 아침 고소장과 함께 경찰서에 제출할 예정입니다. 그럼 사기, 횡령, 갈취 등의 혐의로 조사와 재판을 받게 되겠죠. 금액이나 횟수, 재질로 미루어 보아 절대 실형은 면치 못 하실 겁니다. 물론 합의 같은 건 꿈도 못 꾸실 거고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내내 풀려 있던 김명섭의 눈이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하준은 그런 김명섭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을 보탰다.

“아, 그리고. 제가 좀 알아보니 이게 다가 아니더군요. 지금 회사에서도 여전히 몹쓸 짓들을 많이도 하고 계신 것 같던데. 피해자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형량은 계속 추가될 테니, 그 부분도 감안하셔야 할 겁니다.”

할 말을 모두 끝낸 하준은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김명섭이 다급히 뛰쳐나와 하준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유, 유 대표! 아니, 유 대표님! 갑자기 저한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이렇게 그냥 가버리면 어떡하자고요!”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죗값 받으시면 된다고.”

싸늘한 하준의 눈빛에 김명섭은 다급히 애원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그것만은 절대 안 됩니다! 제가 감옥에 가면 제 처자식들은 어떻게 하라고요…… 부디 이번 한 번만 너그럽게 넘어가주시죠……!”

“그렇게 자식 걱정하시는 분이 자식 같은 아이들한텐 왜 그러셨습니까.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아이들의 꿈을 담보로. 어떤 걸로도 용서받지 못할 짓을 하신 겁니다.”

김명섭이 붙잡고 있는 옷자락을 뿌리치고선 하준이 문손잡이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이번엔 무릎까지 꿇고선 황급히 하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아왔다.

“아이고 대표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대표님이 하라는 건 뭐든 다 할 테니, 부디 고소만은 말아주십시오…… 정말 제가 이렇게 빌겠습니다……!”

몸까지 바르르 떨어가며 손바닥을 마구 비비고 있는 김명섭.

처음 룸을 들어왔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하준은 문으로 뻗으려던 손을 거두고는 김명섭을 내려다봤다.

“정말 제가 하라는 건 뭐든 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 그럼요……! 물론입니다 대표님! 뭐든 다 하겠습니다!”

자존심도, 체면도 다 내려놓은 듯 무척이나 절실한 모습을 보이는 김명섭에게 하준은 단호한 어투로 내뱉었다.

“그럼 세 가지만 얘기하겠습니다. 첫째, 아이들에게 지급되었어야 할 계약금을 포함해 부모님들로부터 받은 금액 일체를 지금으로부터 한 시간 안에 입금하도록 하세요. 딱 한 시간입니다. 물론, 계좌번호를 받는 것 외에 다른 얘기들은 일절 하실 필요 없고요. 가능하시겠습니까?”

“무, 물론입니다! 당장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둘째. 앞으로 이쪽 일을 하는 동안 두 번 다시는 같은 짓을 반복하지 않는 겁니다. 만약 제 귀에 또 이런 얘기가 들려온다면 그땐 결코 오늘처럼 끝나진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본인이 자식들한테 떳떳한 아버지가 되고자 하신다면 더더욱 그래야 할 겁니다.”

하준의 마지막 말에 고개를 떨구는 김명섭. 잠시 후,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기 시작했다.

“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김명섭의 답을 들은 하준은 거뒀던 손을 뻗어 다시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러자, 김명섭이 고개를 들고는 물어왔다.

“저, 대표님, 세 번째는…….”

김명섭이 묻자, 하준은 테이블 위에 쌓여 있는 고급 양주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는 룸의 문을 당기며 입을 열었다.

“다 드시든 안 드시든, 여기 있는 것들은 모두 계산하고 가셔야 될 겁니다. 물론 이미 다 개봉한 상태라 환불은 불가하실 거고요.”

말을 마친 하준은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소음들 사이로 유유히 걸음을 옮겨나갔다.

하준이 빠져나간 뒤, 김명섭은 멍한 시선으로 테이블 위를 바라봤다.

분명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마음껏 마실 줄 알았던 온갖 종류의 그것들이, 지금은 전혀 다른 상황이 되어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 * *

늦은 밤, 멤버들의 숙소.

오늘이면 마지막이 될 이곳에서, 멤버들은 이사준비가 한창이었다.

“후우, 내일이면 이삿날인데. 왜 이렇게 아직도 실감이 안 나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박스를 포장하던 은호의 얘기에 옆에서 장비를 챙기던 이준도 말을 보태왔다.

“다들 그럴 거야. 그래도 2년 넘게 살던 곳이니까. 아마 여긴 평생 기억에 남지 않을까?”

“크흐, 그렇겠지? 하긴. 우리가 여기에서 추억이 좀 많아야지.”

맏형들의 얘기에 다른 멤버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나저나 우리 내일 이사 가는 숙소는 어떨지 너무 궁금하지 않아요? 저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방은 딱 두 개만 있어도 좋겠는데! 둘, 둘 자고, 한 사람은 거실에서 잘 수 있게!”

“전 방은 따로 없어도 되니까 거실만 엄청 넓었으면 좋겠어요! 지금처럼 형들이랑 계속 자는 것도 좋아서, 헤헤.”

아직까지 이사 갈 숙소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멤버들. 저마다 희망하는 것들을 한마디씩 내뱉고 있었다.

좁은 반지하방에 포장박스가 하나 둘 쌓일 때쯤, 바닥에 놓아두었던 멤버들의 휴대폰 벨소리가 갑자기 일제히 울리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어, 엄마.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네, 아빠. 웬일이세요?”

시계가 자정을 향해가는 꽤 늦은 시간에 걸려온 부모님들로부터의 전화.

멤버들은 의아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통화를 이어가던 멤버들의 반응이 또 한 번 같아진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어? 돈이 들어왔다고? 어, 얼마나?”

“네……? 입금자가 누구라고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갑작스러운 소식에 멤버들은 일제히 눈들을 마주쳤다.

마치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얼굴들.

“아…… 우선 알겠어요, 엄마. 내일 회사에 물어보고 연락드릴게요.”

멤버들 중, 가장 먼저 전화를 끊은 건 강준이었다.

다른 멤버들 또한 순차적으로 휴대폰들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다들 같은 전화인 거지?”

“네…… 대체 이게 무슨.”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지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팀장님이 왜 돈을 보내온 거지? 그것도 몇 년이나 지난 지금 시점에…….”

“그러게요. 전 부모님 속상하실까 봐 일부러 얘기도 안 하고 있었는데. 형들도 그렇지 않아요?”

“당연하지. 부모님들이 그거 아셨으면 가만히 계셨겠냐. 다 때려치우고 집에 들어오라고 난리 치셨겠지.”

지호와 하늘의 대화에 다른 멤버들 또한 사뭇 진지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멤버들 또한 해당 사실을 알게 된 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일.

게다가, 그 소식을 처음 접할 당시만 하더라도 그런 일이 부당하다는 것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 하고 있었고.

물론 사실을 안 이후에도 별반 달라질 건 없었다.

이미 꽤 지난 일을 어쩔 도리도 없었거니와, 괜히 사실을 알려 부모님들의 속을 상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냥 묻는 게 더 낫다는 판단하에 합의를 보았던 것이었고.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멤버들 모두가 잠시 고민을 이어가던 때,

강준의 액정화면으로 문자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강준아, 잠깐 숙소 앞으로.]

* * *

하준의 메시지를 받은 강준은 곧바로 숙소 앞으로 나왔다.

그러자, 시동이 켜져 있는 고급 세단 차량 앞에서 하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표님!”

“어, 강준아.”

하준은 양손 가득 들고 있던 치킨 봉지를 강준에게 건넸다.

“들어가서 애들이랑 나눠먹어. 특별히 맥주도 넣어뒀으니까 한 캔씩 하고.”

“아, 감사합니다, 대표님.”

봉지를 건네받고는 강준이 곧바로 말했다.

“괜찮으시면 대표님도 같이 드시고…….”

“아냐, 난 뭘 좀 많이 먹었더니 배가 부르네. 대리기사님도 기다리고 계시고.”

“아.”

강준이 차 안을 살피자, 하준의 말대로 운전석에 누군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멤버들이랑 맛있게 잘 먹을게요.”

“그래. 오늘이 여기에서 마지막 밤일 텐데, 다들 이런저런 얘기들 나누면서 마음껏 떠들다 자. 내일 촬영도 있으니까 또 너무 늦게 자지는 말고. 알겠지?”

“네, 대표님!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강준의 인사에 하준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차에 올라탔다.

차량이 출발하는 걸 지켜보고 있던 그때, 뒷좌석의 창문이 열리더니 하준이 강준을 불러왔다.

“강준아.”

“네?”

“지나간 사람에 대한 가장 큰 복수가 뭔 줄 알아?”

다소 뜬금없게 느껴지는 하준의 질문에 강준은 선뜻 답이 나오질 않았다.

그러자, 하준이 그 어느 때보다도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다시는 그 사람이 넘볼 수도 없을 만큼 성공해서 잘나가는 거야. 잊지 마.”

“…….”

말을 남긴 하준은 강준에게 다시 한번 미소를 지어 보였고, 곧이어 차량의 바퀴도 천천히 움직임을 시작해나갔다.

멀어져 가는 하준의 차를 바라보며 강준은 조금 전 그 말의 의미를 차근차근 되새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준의 마음속엔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뜨겁게 올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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