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그럼 면접 결과 나오는 대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네! 뽑아만 주신다면 정말 뼈를 묻는다는 각오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 지원자가 사무실을 빠져나가자, 하준이 김지혜에게 물었다.
“이제 더 없는 거지?”
“아, 실은 한 명이 더 있기는 한데. 연차를 내고 오는 거라 조금 늦을 것 같다고 하네요. 어떻게, 그냥 취소시킬까요?”
김지혜의 물음에 하준은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이력서들을 훑었다.
그러고는 옅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아냐. 괜찮으니까 그냥 오라고 해. 이왕 보는 거 한 사람이라도 더 하는 게 낫겠지.”
하준의 표정을 읽은 김지혜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 마음에 드는 지원자가 없어서 그러시는 거죠? 하긴, 제가 봐도 다 별로긴 했어요. 다들 겉만 번지르르하게 얘기하고, 정작 매니저가 무슨 일을 하는지에 대해선 잘 모르는 것 같더라고요. 그러다 막상 일 시작하면 힘들어 죽겠다고 그만둘 게 뻔할 텐데.”
말을 내뱉고는 김지혜가 마지막 지원자의 서류를 하준에게 건넸다.
“그래도 지금 오고 있는 지원자는 매니저 경력이 좀 있는 것 같던데요? 연차까지 쓰고 온다고 하는 거 보면 이직을 생각 중인 것 같고.”
“흠, 그래?”
하준이 이력서를 훑는 동안 김지혜가 말을 이어나갔다.
“어느 엔터인지는 안 적혀 있긴 한데, 뭐 어디든 간에 저희보다는 큰 곳이지 않겠어요? 아무래도 저흰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니까. 근데 굳이 왜 여기로 이직을 하려는 건지 잘…….”
말을 내뱉던 김지혜가 하준의 눈치를 살피더니 곧바로 덧붙여왔다.
“아, 물론! 앞으로는 우리가 훨~ 씬 더 크고, 훨~ 씬 더 잘나가는 회사가 될 거지만요! 헤헤.”
“뭐,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밖에서 보는 거랑 안에서 직접 경험하는 건 다를 수 있는 거니까.”
하준이 이력서를 손에서 놓고는 잠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의 책상 위엔 수많은 이력서 외에도 다른 서류들이 꽤나 쌓여 있는 상태였다.
“아 참, 대표님. 그나저나 지난 장부랑 계약서들은 왜 갑자기 보고 싶다 하신 거예요? 그렇지 않아도 대표님 오고부터는 다 필요 없게 된 것들이라 조만간 폐기하려던 참이었는데.”
“뭐 좀 확인해 볼 게 있어서.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이 서류들은 버리지 말고 앞으로도 계속 보관해 둬.”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김지혜가 다시 자리로 돌아갔고, 하준은 책상 위에 놓인 장부와 계약서들을 바라봤다.
어젯밤 내내 그것들을 훑고 또 훑었던 하준.
혹시나 했던 우려가 전혀 기우가 아니었음을 확인하고는 좀처럼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저 지나간 일로 치부해 버리기엔 그간 멤버들이 겪었던 고생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에.
어두운 표정으로 하준이 이런저런 고민들을 이어가던 때, 사무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다급히 인사말을 내뱉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늦어서 죄, 죄송합니다!”
꽤나 급하게 뛰어왔는지, 그의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하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지원자에게 온화한 어투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우선 물부터 마시고 땀 좀 식으면 면접 진행하는 걸로 하죠.”
김지혜가 곧바로 냉수를 가져다주자, 남자는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서는 단숨에 물을 들이켰다.
“이제 괜찮습니다! 바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무척이나 열의에 찬 지원자의 모습에 김지혜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풉. 어차피 마지막 지원자라서 그렇게 급하게 안 하셔도 돼요. 천천히 숨 고르고 준비 다 되시면 말씀주세요.”
“아닙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이렇게 기다려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말을 내뱉은 지원자는 곧바로 하준 앞에 마련된 의자에 착석했다.
그 모습에 하준도 하는 수 없다는 듯 등받이에서 몸을 떼고는 이력서를 집어 들었다.
“그럼 먼저 간단히 자기소개 좀 부탁드릴게요.”
“네! 안녕하십니까! 저는 서울시 마포구에 사는 정진웅입니다! 밝고 희망찬 팔도의 미래를 함께하고 싶어 이렇게 지원하게 됐습니다!”
남자의 우렁찬 대답에 하준은 귀를 살짝 만지며 말했다.
“네, 진웅 씨. 그렇게 크게 대답 안 하셔도 다 들리니까 그냥 편하게 하시면 됩니다.”
“아, 네 대표님!”
“지원서에 보니까 나이가 스물다섯 살이라고 적혀 있던데. 맞나요?”
하준이 묻자, 옆에 있던 김지혜가 놀란 듯 입을 벙긋거렸다.
지원자는 각 잡힌 자세를 유지하며 주민등록번호를 읊기 시작했다.
“네, 맞습니다! 960523…….”
“아, 알겠습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겁니다.”
김지혜가 여전히 지원자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하준은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보니까 엔터 경력이 있으시던데. 이쪽에서 일한 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이제 일 년 조금 넘었습니다. 대표님!”
“혹시 이직을 생각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실까요.”
“아, 그게.”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지원자는 이내 진지한 어투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제 대답이 어떻게 들리실진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 매니저다운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자신의 소속 연예인을 위해서라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그 어떤 것이든 다 해낼 수 있는 진정한 조력자로서의 역할 말입니다. 그게 제가 이 직업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고요.”
“흠, 그 말은. 전에 회사에서는 그런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인가요?”
“……네, 맞습니다. 분명 매니저라는 직함을 달고 있기는 했지만, 제가 하는 일들은 그런 것들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었으니까요.”
어딘가 모르게 약간 어두워진 듯한 그의 표정에 김지혜와 하준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음, 그런 이유라면 저희 회사로 오더라도 별반 다르지 않을 수 있을 텐데요. 애초에 매니저의 업무라는 것 자체가 명확히 정해진 사이클로만 돌아가는 건 아니니까요.”
“아뇨, 그런 뜻이 아닙니다. 대표님.”
곧바로 말을 내뱉은 남자는 하준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말씀드렸듯이 소속 연예인을 위한 일이라면 그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고 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 어떤 누구보다도요! 하지만, 제가 지난 일 년 동안 해왔던 일들은 직장 상사의 개인 비서 같은 느낌이 더 컸습니다.”
“비서라면.”
“이 자리에서 자세히 말씀드리긴 좀 어렵지만, 중요한 건 그런 일들이 너무나도 부당하게 느껴지는 것들이었고, 또 더 나아가서는 소속 연예인들에게도 결코 좋은 영향이 가는 행동들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흠.”
꽤나 비장한 어투로 내뱉는 그의 말에 하준은 그의 지원 서류를 다시 확인했다.
“혹시 가능하다면, 현재 재직 중인 곳이 어딘지 얘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 물론, 지금 이 자리에서 했던 얘기들이 밖으로 새어 나가는 일 같은 건 없을 겁니다. 그저 개인적인 궁금증에 묻는 거라.”
하준의 물음에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곧 낮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메이 엔터입니다.”
메이 엔터. 지원자의 입에서 내뱉어진 그 단어에, 하준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그와 동시에 김지혜도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 메이 엔터면 명섭 팀장님이 계신 곳일 텐데?”
김지혜가 하준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덧붙였다.
“아, 명섭 팀장님은 전에 저희 회사에 있던 분이에요! 그때 혼자서 애들 다 케어하시느라 고생 많이 하셨었는데. 와, 거기서 일하고 계셨구나. 아시죠? 같은 회사니까.”
“아, 예…….”
그런데 웬일인지, 김지혜의 물음에 답하는 지원자의 낯빛이 이전보다 어두워진 듯한 모습이었다.
식어가던 이마에 땀방울까지 다시 맺히려 하자, 하준이 그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잠깐 쉬었다 할까요? 좀 힘들어 보이시는 것 같은데.”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대표님.”
괜찮다는 말과는 달리, 그의 얼굴은 처음 사무실을 들어왔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그 시점은, 김지혜의 말이 내뱉어진 이후부터였고.
정진웅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던 하준이 사뭇 진지한 어투로 입을 열어왔다.
“정진웅 씨. 혹시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 이건 면접과는 관계없는 질문이니 곤란하면 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네 대표님. 어떤…….”
“갑자기 표정이 안 좋아지신 것 같은데. 혹시 아까 얘기했던 그 상사라는 분과 저희 직원이 얘기한 그분이 어떤 관련성이 있는 겁니까?”
하준이 묻자, 옆에 있던 김지혜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그리고, 애꿎은 손가락만 매만지며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지원자의 모습에 하준은 뭔가를 확신한 듯 지원 서류를 놓았다.
그러고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다니셔야 할 직장일 수도 있으니 답하기 곤란하다는 거 충분히 이해합니다.”
“……아, 그게.”
“그럼 이렇게 하는 걸로 하죠.”
하준은 잠깐의 틈을 둔 뒤 곧바로 말을 내뱉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합격 통보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출근 날짜 또한 진웅 씨가 가능한 날짜에 맞출 수 있도록 해드리고요.”
하준의 입에서 내뱉어진 갑작스러운 말에 김지혜뿐만 아니라 지원자의 눈동자가 동시에 커졌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말을 덧붙인 하준은 표정을 유지한 채로 말을 이어나갔다.
“이제 저희 회사의 일원이 되셨으니, 그 전에 있던 대외비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러니 제가 지금부터 하는 질문들에 빠짐없이 답해주셨으면 하고요. 괜찮으실까요?”
잠깐의 침묵이 흘렀고, 지원자 정진웅은 하준의 말뜻을 이해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결심을 마친 듯 비장한 표정과 함께 고개를 끄덕여왔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표님.”
* * *
며칠 뒤, 강남 모처의 유흥주점.
시곗바늘이 밤 10시를 가리킬 즈음, 한 남자가 가게 입구로 들어섰다.
“어머, 오빠!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혼자 온 거야?”
마치 단골손님을 대하듯 자연스러운 여종업원의 인사에 남자는 음흉한 미소로 화답했다.
“웬일이긴. 비즈니스 때문에 왔지. 크큭, 오늘 애들 출근했지?”
“아 그러엄~ 애들 바로 들여보낼까?”
“아아, 일단 일 얘기 좀 먼저 하고. 나중에 타이밍 봐서 부를 테니까 그때 애들 들여보내. 오늘 내가 매상 팍팍 올려주겠으.”
“어머! 역시 우리 오빠 짱!”
대화를 끝마친 남자는 곧장 8번 룸으로 향했다.
문 앞에 다다라서는 앞머리를 손바닥으로 쓸어 넘긴 뒤, 곧장 문을 열어젖혔고.
그러자, 테이블 위로 빈틈없이 깔려 있는 수많은 고급 양주들과 함께, 깔끔한 포머드 헤어의 남자가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