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김강준? 너 김강준 맞지? 어머! 네가 여긴 웬일이야?”
낯선 여자의 입에서 내뱉어진 이름. 다름 아닌 강준이었다.
의아한 마음이 든 하준은 목소리의 방향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겨나갔다.
“……오랜만이네. 잘 지내지.”
“그럼. 나야 이제 막 컴백해서 한창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기니까! 지금도 리허설 막 마치고 나오는 길이야. 휴, 실컷 자본지가 언젠지 기억도 안 나는 것 같다니까?”
“안 그래도 TV에서 봤어. 늦었지만 축하해.”
“헷, 고마워. 그나저나 정말 넌 여기 무슨 일이야? 혹시…… 아르바이트?”
“아니, 그냥 일이 좀 있어서. 멤버들이랑 다 같이.”
“멤버들? 너, 설마 아직도 거기에 있는 거야? 듣기론 거기 사장님 도망간 지 오래라던데?”
아무래도 정황상 팔도를 얘기하는 듯싶었다.
불러두었던 엘리베이터가 6층에 도착했음을 알려왔지만, 하준은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느껴지는 온도차가 꽤나 크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 그대로 있어. 다른 형들이랑 동생들도 마찬가지고.”
“아, 아니…… 대체 왜?”
이해할 수 없다는 여자의 반응에 강준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곧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기서 꼭 꿈을 이루기로 했으니까.”
어딘가 모르게 의미가 담긴 듯한 강준의 얘기.
잠시 말이 없던 그녀는 그런 강준의 말뜻을 이해했는지 곧 화제를 바꿔왔다.
“음음. 뭐 아무튼 다들 잘됐으면 좋겠다. 그래도 한때는 같은 회사에 있던 사람들인데, 누구 하나만 잘 되는 것보단 다 같이 잘되면 좋잖아. 안 그래? 너도 거기서 꼭 데뷔하길 바랄게!”
“……그래.”
그때, 먼발치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예나! 안 오고 거기서 뭐 해? 리허설 모니터링 안 할 거야?”
“네! 갈게요, 언니!”
누군가의 부름을 받은 그녀는 강준에게 인사를 건네왔다.
“나 이제 가봐야겠다. 나 연락처 그대론 거 알지? 기회 되면 언제 한번 커피라도 마시게 연락 줘.”
“그래, 방송 잘 하고.”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멀어져 갈 쯤, 하준은 강준에게로 다가가기 위해 발걸음을 뗐다.
그때, 복도 저 편에서 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참, 강준아! 나 명섭 팀장님이랑 같이 있는 거 알지? 여기선 본부장 되셨는데, 너 거기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내가 본부장님한테 얘기해서 너 우리 회사로 들어올 수 있는지 물어봐 줄 테니까! 그래도 한때 우리 봐줬던 분인데 모른 척하진 않으실 거야. 그럼 또 보자!”
말을 남긴 그녀는 다시 하이힐 소리를 내며 반대 방향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모퉁이에서 나온 하준은 먼발치에 서 있는 강준을 바라봤다.
강준의 얼굴 위론 복잡한 감정들이 뒤엉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나 전후사정을 전혀 모르는 하준.
그럼에도 불쾌한 기분이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대화 내내 이어지던 그녀의 말들이 꽤나 거슬리기도 했고.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하준이 강준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 누군가 하준에게로 다가왔다.
“대표님, 아직 안 가셨네요!”
뒤를 돌아보자, 은호가 하준을 바라보며 씨익 웃고 있었다.
“화장실 갔다 왔는데 대표님 커피 사러 가셨다길래 제가 뒤도 안 돌아보고 바로 뛰어나왔죠! 그래도 저희 회사를 이끌어가시는 대표님인데 혼자서 그 많은 커피를 혼자서 들게 할 수는 없잖아요. 키킥, 저 잘했죠?”
특유의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이는 은호에게 하준은 대답 대신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강준이 있는 쪽을 잠시 바라본 뒤, 은호를 데리고 엘리베이터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나갔다.
“은호야, 네가 멤버들 중에 가장 먼저 이 회사에 들어왔다고 했지?”
“네, 맞아요. 저랑 이준이가 먼저 들어오고 그 뒤에 강준이가 들어왔었죠.”
“그럼 회사를 거쳐간 사람들 중에 네가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겠네.”
“뭐, 그렇긴 하죠. 어쩌다 보니까 저랑 이준이가 전 사장님보다도 더 오래 남아 있는 격이 됐으니까.”
은호가 곧바로 되물어왔다.
“근데 그건 왜요, 대표님?”
“음, 아냐. 일단 내려가자.”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엘리베이터가 하강을 이어가는 동안 하준은 턱 끝을 매만졌다.
대화의 내용상, 아마도 강준의 지극히 개인적인 일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기에 하준 또한 굳이 나서서 관여할 생각은 없었고.
하지만, 하준은 왠지 그녀의 마지막 말들이 계속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 그 말을 내뱉을 때의 강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 보였기 때문에.
* * *
“예나가요?! 여기에?”
하준의 얘길 듣고 난 은호가 눈동자를 키워왔다.
그러고는 곧 상황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걔는 이제 데뷔했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 하필이면 여기서 걔를 만나다니.”
잠시 한숨을 내뱉고는 은호가 하준에게 설명을 이어갔다.
“실은, 강준이를 이 회사에 처음 데려온 게 예나 걔거든요. 예나도 거의 초기 멤버인데 회사에서 보이그룹을 준비한다고 하니까 강준이한테도 오디션 추천을 했나 봐요. 지금은 아니지만 그땐 둘이 한창 만나고 있을 때라.”
“흠.”
얘길 듣고 나자, 아까의 상황들이 조금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대표님도 아시겠지만 강준이가 원래는 솔로를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근데 거기서도 연습생 생활은 길어지고 또 데뷔는 안 보이고 하니까, 강준이도 예나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하다 결국은 오디션을 보게 된 거였죠. 그러다 저희와 만나게 된 거고.”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 은호는 양손에 캐리어를 받아 들고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뭐 어쨌거나 본인이 선택한 거고 당시엔 회사도 나름 잘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다 좋아 보였죠. 금방 데뷔도 할 것 같았고. 근데 문제는 그 이후에 생겼어요. 예나가 강준이랑은 한마디 상의도 없이 갑자기 다른 회사로 가버렸거든요. 그러고는 몇 달도 안 지나서 데뷔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고요.”
“……그럼.”
“네, 데뷔한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강준이를 차 버리더라고요. 후, 진짜 나쁜 기집애죠.”
하준의 머릿속에 아까의 대화 내용들이 상기되고 있었다.
왜 그렇게 온도차가 느껴졌는지 이제야 온전히 이해가 되었고.
“그 뒤로 회사는 점점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고 저희는 반지하방에만 갇혀 데뷔는 꿈도 못 꾸는 상황이 됐으니까, 아마 강준이는 저희보다 더 힘들었을 거예요. 물론 저희 앞에서 크게 내색은 안 했지만.”
“흠…….”
다른 멤버들에 비해 유독 꿈에 대한 집착이 커 보였던 강준.
얼마 전 예능프로그램 출연 의사를 물었을 때도 그 누구보다 가장 먼저 의사를 밝혀왔던 그였다.
은호로부터 몰랐던 사실을 접하게 된 하준은 그동안의 모습들이 오버랩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휴, 그래도 시간이 꽤 많이 지나서 이젠 강준이도 잊고 지냈을 텐데. 예나 그 기집애가 또 나타나서 괜히 강준이 마음만 심란하게 만들었겠네요.”
“어차피 데뷔하고 나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생길 수 있는 일이지. 그때마다 매번 피할 수는 없는 거고.”
“그거야 그렇지만…….”
다시 6층에 도착한 하준과 은호는 회의실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나갔다.
문 앞에 다다를 쯤, 문득 하준의 머릿속에 아까의 대화 중 하나가 떠올랐다.
“아, 은호야. 뭐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될까.”
“네, 뭔데요 대표님?”
“듣기론 전에 명섭 팀장이라는 사람이 너희를 봐줬던 것 같던데.”
잠시 말을 멈춘 하준은 회의실 유리 너머의 강준을 바라보고는 덧붙였다.
“혹시 그 사람이랑 너희들 사이에도 어떤 일들이 있었던 건가 해서.”
* * *
“자 그럼, 오늘은 첫 미팅 겸 인사자리니까 이쯤 하는 걸로 할까요? 다들 고생하셨어요.”
윤정유가 펜을 놓으며 회의 종료를 알려왔다.
약 두 시간에 걸친 회의가 끝이 나자, 다들 기지개를 켜며 마무리 인사들을 나눴다.
“고생하셨습니다, PD님.”
“훗, 고생은요. 생각보다 다들 너무 밝기도 하고 또 잘 따라와줘서 저도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왠지 시작부터 느낌이 아주 좋은데요?”
“하하, 그런가요? PD님 느낌이 좋다고 하니 저도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요.”
“어머, 이렇게 부담 주시는 거예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는 얘깁니다.”
미소를 지어 보인 하준이 화이트보드 옆 캘린더를 바라보고는 물었다.
“아, 저번 통화 때 편성이 이미 잡혀 있다고 하셨는데. 언제쯤인지 알 수 있을까요?”
“아마 다음 달 중순쯤이지 않을까 싶어요. 뭐, 시간이 조금 촉박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도 오늘 미팅으로 어느 정도 윤곽은 잡힌 것 같아서 맘은 훨씬 놓이네요. 잘 준비해서 프로그램도, 멤버들도 다 대박나게끔 해야 하지 않겠어요? 훗.”
윤정유의 말에 하준도 미소로 화답했다. 화이트보드를 훑던 하준이 다시 한번 질문을 건네왔다.
“혹시 촬영 장소는 정해졌을까요?”
하준이 묻자, 윤정유가 옅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 않아도 알아보는 중이에요. 얼른 정하긴 해야 하는데 딱히 마땅한 곳이 떠오르지가 않네요. 시간도 촉박한데.”
“흠.”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싶던 하준이 곧 팔짱을 끼고선 말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희 애들 숙소에서 진행하는 건 어떨까요? 아무래도 리얼버라이어티다 보니까 그게 더 친근하게 다가갈 것 같긴 한데.”
“어머! 정말요?”
하준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윤정유가 눈동자를 키워왔다.
그러고는 곧 두 손바닥을 맞부딪히며 무척이나 반기는 표정을 지어왔다.
“그럼 저희야 너무너무 감사하죠! 근데 정말 그래도 괜찮을까요? 혹시나 멤버들만 있기에도 불편한 환경이면…….”
“그 부분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마침 곧 이사도 예정이라.”
“이사요? 어머…… 설마 이것 때문에 이사하는 건 아니시죠? 그럼 너무 죄송스러운데.”
“하하, 아뇨. 지금 숙소가 여러모로 불편한 게 많아서 원래 계획 중에 있었습니다. 촬영 예정일 정해지는 대로 알려주시면 그 전에 준비는 마쳐놓도록 하겠습니다.”
하준의 얘기에 윤정유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싶더니 곧 다시 입을 열어왔다.
“아!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는데요, 대표님. 이사 과정도 촬영에 포함시키면 어떨까요? 새로운 식구를 맞이하는 느낌으로!”
윤정유의 제안에 하준은 흔쾌히 수락했다.
“음, 좋은 것 같은데요?”
“굿! 그럼 팀원들이랑 얘기해서 이사 날짜에 첫 촬영 나갈 수 있도록 진행해 볼게요. 아무튼 감사드려요 대표님! 한시름 덜었네요, 호호.”
두 사람은 서로 훈훈한 미소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하준과 멤버들이 회의실을 빠져나갈 즈음, 윤정유가 다시 하준을 불러왔다.
“아 참, 대표님.”
“네, PD님.”
“이건 뭐 제가 관여할 건 아니긴 한데. 앞으로 멤버들 활동하려면 개인 스태프들이 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촬영하다 보면 이런저런 일들도 많아질 텐데 그때마다 대표님이 일일이 다 처리하시긴 어렵지 않을까 해서요. 물론 저희 입장에서도 불편할 수도 있을 거고.”
윤정유의 조언에 하준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생각하고 있던 부분이긴 했는데. 서둘러 봐야겠네요. 말씀 감사합니다, PD님.”
“에이, 제가 뭘요. 그럼 또 연락드릴게요!”
첫 미팅을 무사히 끝낸 하준과 멤버들은 곧장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왔다.
멤버들을 벤에 태운 하준은 주머니속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네, 대표님!
“사무실이지?”
-그럼요. 뭐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세요?
“나중에 시간 될 때 매니저 채용 공고 좀 올려줘. 의상이랑 헤어 담당할 직원도 같이 알아봐 주고.”
-오오! 드디어 애들 개인 스태프가 생기는 건가요? 후훗, 알겠습니다 대표님! 바로 진행할게요!
“응. 그리고 하나 더.”
말을 내뱉은 하준은 차 안의 멤버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혹시 이전에 관리하던 회사 장부랑 계약서들 있으면 내 책상에 좀 올려놔줘. 확인해 볼 게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