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아.”
카인의 소개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준만을 제외하곤, 여전히 그의 정체가 낯설게 느껴지고 있는 듯한 얼굴들.
잠깐의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곧 은호가 먼저 입을 떼왔다.
“그럼 혹시 저희 데뷔곡을 만들어주실…….”
카인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했잖아. 너희의 향후 ‘모든 앨범’을 맡게 될 거라고. 그럼 당연히 데뷔곡도 포함이겠지?”
“아.”
고개를 주억거리는 은호 옆으로 아이들이 조금씩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근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같지 않아요……? 되게 낯이 익는데.”
“저도요. 어디서 들었더라…….”
“응? 왜? 유명하신 분이라 그런 거 아니야?”
지호와 하늘이의 나지막한 대화에 은호가 끼어들었고, 맞은편의 강준도 기억을 마구 헤집고 있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때, 이준이 꽤 진지한 표정을 하고선 카인에게 물어왔다.
“혹시, 제가 아는 그 프로듀서 카인 님이 맞으실까요?”
이준의 물음에 카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음, 뭐. 프로듀서 중에 같은 이름은 없으니까. 아마도 맞겠지?”
이준과 카인의 짧은 문답이 끝나자, 일순간 아이들의 표정이 완전히 바뀌기 시작했다.
“헐. 지, 진짜 그분이시라고?”
“말도 안 돼…….”
“혀, 형. 형이 제일 존경하는 분이잖아요! 진짜 그분 맞아요?”
이준을 향한 지호의 물음에 카인이 눈썹을 올리며 되물어왔다.
“하하, 정말이야? 날 존경까지나 했어?”
이준 대신 지호가 격하게 고갤 끄덕였다.
“네! 진짜요! 이준 형이 예전에 TGM에서 오디션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카인 선생님이 너 꼭 잘 될 거라고 작곡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하셨었대요! 그때부터 완전 팬 됐다고. 그쵸, 형?”
이준이 민망한 듯 살짝 고개를 주억거렸고, 그런 이준의 얼굴을 카인이 유심히 바라보았다.
“아! 얼핏 기억나는 것도 같은데? 그때 혹시 자작곡으로 오디션 보지 않았었나? 나도 그때 탈락시키고 아쉬워서 인상에 꽤 남았었는데.”
카인이 위로하듯 덧붙였다.
“원래 대형 기획사라는 게 상업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는 곳이라 그런 거니까 그때 일로 괜히 상처받을 필욘 없어. 뭣보다, 그때 내가 했던 말은 정말 다 진심이었을 거니까.”
씨익 웃어 보인 카인이 의아하다는 듯 이준에게 물었다.
“근데, 내가 카인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심사위원 이름이 적혀 있던 것도 아니었을 텐데.”
“아, 너튜브 TGM 채널에서 봤었어요. 스치듯 잠깐 나온 거긴 하지만 저한텐 잊지 못할 얼굴이라.”
“하하, 그래? 그게 벌써 5년은 된 것 같은데. 아직도 이렇게나 날 좋게 봐주고 있다니, 이거 오히려 내가 더 고마워해야겠는데?”
“아니에요.”
처음보는 이준의 수줍은 얼굴이 하준에게도 낯설게 느껴졌다.
카인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하준에게 물어왔다.
“혹시 대표님께서 말씀하신 친구가.”
“네.”
하준의 긍정에 카인이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이준을 바라봤다.
하준이 아이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다들 잘 아는 것 같으니까 소개는 이쯤 해두기로 하고. 아까 하던 얘길 마저 하자면, 이제부턴 본격적으로 데뷔 앨범 제작에 들어가게 될 거야.”
“아, 네! 대표님!”
말을 마친 하준이 카인 쪽으로 시선을 옮겼고, 카인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일단 곡 작업을 들어가야 하는데, 그 전에 내가 너희들에 대한 정보들이 좀 필요한 상황이야. 뭐 그런 의미로 당분간은 우리 서로 간에 교류가 좀 잦아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다들 생각은 어때?”
“그럼요!”
“당연하죠!”
“저희 남는 게 시간이에요!”
“하하, 좋네.”
하준의 입에서 나온 ‘데뷔’라는 단어에, 아이들의 얼굴엔 생기가 넘치는 듯한 모습이었다.
한껏 들떠 있는 얼굴로 은호가 물어왔다.
“저희 그럼 뭐부터 하면 될까요? 아! 저희끼리 롤링페이퍼 같은 거라도 해서 전달해 드릴까요?”
“큭, 평소에도 그런 거 자주 하나 보지? 음, 그런 것보단.”
카인이 턱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일단, 같이 밥이라도 한 끼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들 나눠보는 게 좀 더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다들 아직 식사 전이지?”
“아, 네!”
“좋아. 그럼 좀 편하게 얘기할 수 있게 내 작업실로 자릴 옮기자. 어제 하루 종일 청소만 해대서 아주 깨끗할 거야.”
“좋습니다!”
마치 복명복창이라도 하듯 아이들이 우렁찬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테이블을 정리하기 위해 커피잔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때, 카인이 이준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말했다.
“아쉽지만 넌 다음에 나랑 꼭 따로 먹는 걸로 하자. 알겠지?”
카인의 갑작스러운 얘기에 움직임을 멈춘 아이들의 시선이 이준에게로 옮겨졌다.
이준 또한 그런 아이들의 표정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상태였다.
카인이 태연스러운 얼굴을 하고선 입을 열어왔다.
“아, 아직 못 들었어? 대표님이 너랑 어디 좀 다녀올 곳이 있다고 하시던데?”
말을 마친 카인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고, 이준은 여전히 영문을 모른다는 얼굴로 하준을 쳐다봤다.
하준이 카페 입구 쪽으로 고갯짓을 하고는 먼저 발걸음을 옮겨나갔다.
* * *
제법 한산한 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하준의 고급 세단.
여전히 목적지를 모르는 상태의 이준은 말없이 전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신호등의 색깔이 빨간불로 바뀌자 브레이크를 밟고는 하준이 조수석을 바라봤다.
“소감이 어때? 이제 곡만 나오면 그토록 바라던 데뷔를 하게 되는 건데.”
하준의 물음에 이준이 오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직 맞닥뜨리지 않아서 그런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지금 이 상황들이 실감이 잘 안 나기도 해서.”
“음, 그래?”
“제가 처음 연습생 생활을 시작한 게 14살 때였거든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8년이라는 시간 동안 항상 안 되는 것만 경험해 왔었는데. 근데 대표님을 만난 이후로는 너무 모든 것들이 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니까 잘 믿기지가 않는 것 같아요.”
“음.”
다시 신호등의 색깔이 초록불로 바뀌었고, 하준은 서서히 액셀을 밟아나갔다.
“그런 경험들이 있었으니까 지금의 너도 있는 거겠지. 원래 각자마다의 시간들이 정해져 있는 거라고 하잖아.”
이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뿐만 아니라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야. 실력이든 운이든, 또는 간절함이든. 너희가 이전에 그런 실패들을 경험하고 이곳에 모이게 됐고, 또 2년이라는 긴 시간을 버텨냈으니까 이런 기회도 잡을 수 있었던 거지. 그게 아니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만날 일도 없었을 테니까.”
하준이 핸들을 부드럽게 꺾으며 덧붙였다.
“그러니까 너흰 이미 충분한 자격을 갖춘 거야.”
“감사합니다, 대표님.”
고개 숙여 인사하는 이준에게 하준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나저나, 팀 리더로 다 이준이 너를 추천하던데.”
“저를요?”
“응. 한 명도 빠짐없이 만장일치로. 김 선배님이나 안무 코치님은 이미 너로 정해진 줄 알고 있더라고. 평소 너희들 모습이 그래 보였는지.”
“……아.”
“물론 나도 동의하는 바야. 항상 뭘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다들 네 의견부터 물어보더라고. 이준 형이랑 같은 생각이라면서. 물론 그건 은호도 마찬가지였고.”
팀의 맏형인 동시에 멤버들에게 있어 정신적 지주이기도 한 이준의 존재감.
리더를 정하는 과정은 전혀 복잡할 것이 없었다.
하준이 온화한 미소를 짓고는 화제를 돌렸다.
“작곡은 언제부터 하기 시작했던 거야?”
“음…… 첫 번째 소속사를 나오고 난 뒤부터였던 것 같아요. 그땐 제가 뭐 하나 특출한 게 없다는 생각에 항상 자신감이 떨어져 있었거든요. 연습생 생활은 항상 경쟁의 연속인데.”
이준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근데, 그런다고 크게 달라지는 건 없더라고요. 데뷔를 해야 그게 조금이나마 장점으로 발휘될 텐데, 데뷔 자체를 못 하고 있었으니까.”
이준의 기죽은 목소리에 하준은 별다른 코멘트를 달진 않았다.
지금의 자신감 결여된 모습이, 훗날엔 완벽히 다른 형태로 바뀌어 있을 거라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내비게이션의 도착 안내와 함께 하준이 주차장으로 들어섰고, 잠시 후 주차를 끝낸 하준의 차량이 시동을 멈추었다.
“자 그럼, 이제 내려볼까?”
“아, 네. 근데 저희 어디 가는 거예요 대표님?”
같은 멤버들, 그리고 강아지를 위해 아끼던 장비들을 헐값에 팔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준.
하준이 안전벨트를 풀고는 답했다.
“아까 들어오면서 못 봤어? 여기 낙원상간데.”
“아, 보긴 했는데. 여긴 왜…….”
“하하, 내가 너랑 데이트나 하자고 여기까지 오자 했을까 봐? 당연히 장비들 사러 왔지.”
“장비요?”
눈동자를 키운 이준에게 하준이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네가 만든 곡들이 팀에 얼마나 큰 공헌을 하게 될지 모르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장비가 없어서 작업을 못하는 상황은 없어야 할 거 아냐. 안 그래?”
“…….”
“그동안 작업하면서 필요했던 것들, 사고 싶었던 것들 금액 신경 쓰지 말고 오늘 다 사. 사준 거에 대해선 나중에 꼭 다시 다 돌려받을 거니까 괜히 부담 같은 건 가질 필요 없고.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대표님.”
괜히 낯간지러운 분위기가 연출될 것만 같아 하준은 문손잡이로 손을 옮겼다.
“나중에 꼭 돌려받겠다는 말, 빈말 아니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고 얼른 내리기나 해. 여기 다 둘러보려면 시간 한참 걸릴 것 같은데.”
“대표님 그게 아니라…….”
“응? 그럼?”
입술을 달싹거리던 이준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혹시 오늘 여기서 못 산 것들이 있으면 인터넷으로 사도 될까요……? 꼭 사고 싶었던 것들이 있었는데 제가 다 장바구니에 넣어놔서…….”
“……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얘기에 오히려 하준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곧 희미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그래, 그렇게 해.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 그 장바구니 챙겨 오라 할 걸 그랬네.”
“헤헤, 감사합니다. 대표님!”
지금껏 본 모습 중에 가장 들떠 보이는 이준의 모습에 하준도 입꼬리를 올렸고, 곧 둘은 차에서 내렸다.
그렇게 가게 몇 개를 스쳐 지나갈 무렵, 하준의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일기 시작했다.
발신자를 확인하자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고, 하준은 곧바로 수신 버튼을 눌렀다.
“네, 유하준입니다.”
-안녕하세요, 여기 방송국인데 잠시 통화 괜찮으실까요?
‘방송국’이라는 단어에 순간 의아한 마음이 든 하준.
그런 하준의 반응을 눈치챘는지, 수화기 너머의 상대가 다시 목소리를 내어왔다.
-아 우선, 저는 NTV의 윤정유 PD라고 하구요. 저희 신규 프로그램 섭외 관련해서 대표님과 얘길 좀 나누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