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와…… 진짜 실화예요?”
이준의 얘길 들은 레티가 놀라움과 감탄이 섞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채팅창에 올라오는 시청자들의 반응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진짜 엄청난 열정이 아니면 절대 불가능한 일일 것 같은데! 그럼 그동안 뭐 안 해본 일이 없었겠네요?”
레티의 이번 질문엔 은호가 답을 해왔다.
“그쵸. 카페, 식당, 고깃집, 뷔페, 야구장, 막노동…… 또 뭐 있더라.”
“베이비시터.”
이준의 어시스트에 레티가 눈동자를 키우며 되물었다.
“예? 베이비시터요? 와, 그런 일도 해봤어요? 그런 건 대체 어떻게 구하는 거예요?”
“아, 그게. 제가 키즈카페에서 꽤 오랫동안 알바를 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어떤 보호자분이 한번 해보지 않겠냐고 하시더라구요. 물론 저야 시급이 높으니까 거절할 이유가 없었구요.”
“근데 보통 그런 건 남자보단 여자를 더 선호하지 않나요? 차별이라기보단 아무래도 그게 좀 더 일반적이긴 하니까.”
레티의 의아함에 시청자들이 대신 답을 내주었다.
-당연히 얼굴 때문이겠지 ㅋㅋㅋ
-원래 잘생기면 특이한 일들이 많이 생김ㅋㅋㅋ
-저 얼굴이면 시급 두 배로 줘야 하는 거 아님? ㅋㅋㅋㅋ
-존잘은 존잘이네 진짜 ㅋㅋ
-근데 이렇게 얘기해도 레티는 절대 공감 못 함ㅋㅋㅋ 저런 얼굴로 살아본 적이 없어서.
채팅창을 확인한 레티가 반격했다.
“네, 다들 화장실 가서 거울부터 보고 오시구요.”
다시 아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화제를 이어나갔다.
“와, 아이돌이 육아하는 모습은 어떨지 진짜 좀 궁금하긴 하네요. 그나저나 레전드는 레전드다. 혹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들은 없었어요?”
“엄청 많죠.”
지나간 기억들이 스쳐 가는 듯, 저마다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먹을 게 정말 하나도 없을 때는 3일 동안 물만 마셔본 적도 있었고요. 뷔페 알바 할 때는 가지고 온 음식들이 다 상했는데도 그냥 참고 먹었던 적도 있었어요.”
“근데 희한하게 배탈은 아무도 안 나더라구요!”
“언제 한번은 산에 가서 쑥이랑 나물을 한번 캐보자고 해서 다 같이 산을 탔던 적도 있었어요.”
“근데 뭐가 쑥이고 나물인지 몰라서 그냥 아무거나 캐 와서 먹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독초였더라고요. 그때 먹은 애들 다 식중독 걸리고 막…….”
“강아지 몰래 사료나 개껌 조금씩 훔쳐 먹는 건 일상이었어요! 헤헤.”
담담하게 내뱉는 아이들의 모습에 레티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무슨 만화에나 나올 법한 얘기들 같네요. 아니, 그 정도면 부모님한테 조금은 손 벌릴 수도 있었을 텐데. 전혀 그런 건 없었어요?”
이번에도 역시 무의식 중에 지호를 쳐다보며 질문을 건넨 탓에 지호가 입을 열어왔다.
“아, 안 그래도 저희 부모님께서는 사정 아시고 이것저것 많이 해주려고 하셨었는데, 제가 극구 반대했었어요. 절대 세태와는 야합하지 않기로 형들이랑 약속했었거든요!”
“응? 부모님 도움받는 게 왜 세태와의 야합이지?”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지호를 바라보며 은호가 고개를 절레 내젓고는 대신 답했다.
“지호 아버님이 중소기업 사장님이신데, 얘 말로는 그걸 받게 되면 형들의 간절함을 배반하는 것 같다나 뭐라나. 얘는 우리랑 다르게 굶고 이러는 걸 즐기는 것 같더라고요.”
“애초에 세태와의 야합 뜻이 뭔지도 모를 확률이 높고요.”
강준이 덧붙인 얘기에 채팅창은 금세 웃음으로 도배가 됐다.
“이야, 금수저였구나? 내가 만약 형들이었으면 제발 그것 좀 받아오길 바랬을 것 같은데.”
“얘가 생각보다 눈치가 많이 없더라고요.”
“푸하하하. 역시!”
진심으로 몰랐다는 얼굴을 하고선 지호가 눈을 동그랗게 떠 보였다.
레티는 완전히 바뀐 채팅창 분위기를 한번 살피고는 계속해서 토크를 이어나갔다.
“아니 근데, 소속사에서 2년 동안이나 방치를 했으면 거의 희망은 없는 거라고 봐야 하지 않나요?”
“그랬죠. 저희 대표님이 찾아오시기 전까진.”
레티가 손바닥 소리를 내며 시청자들에게 말했다.
“아 맞아, 여러분. 여기 대표님이 지금 밖에 계시는데 진짜 연예인 뺨치는 외모다? 처음에 다 같이 스튜디오로 들어오는데 누가 대표님이고 누가 소속 가수인지 구분을 못 하겠더라니까? 아, 일단 그래서. 계속 얘기해 주세요.”
하준과의 첫 만남 당시부터 시작해, 짧은 시간 동안 있었던 많은 변화들에 대해 설명을 시작하는 이준.
레티의 감탄 섞인 리액션이 나올 때마다, 채팅창 또한 하준에 대한 궁금증들로 도배되고 있었다.
중간중간 시청자 수가 차오르고 있는 걸 확인한 레티는 6만이라는 숫자를 돌파하고 나자 대본을 수정하기로 마음먹었다.
‘평일에 6만 명이라니. 이거 완전 대박인데?’
“지금 채팅창에서 대표님 궁금하다고, 당장 불러오라고 물 타기들을 엄청하기 시작했어요. 근데 뭔가 저도 듣다 보니까, 대표님의 정체가 궁금해지긴 하는 것 같거든요? 어떻게, 한번 모셔볼까요, 형님들?”
채팅창은 레티 찬양으로 도배되기 시작했다.
레티는 만족한다는 표정을 짓고는 아이들 쪽을 바라봤다.
“자, 그럼 이렇게 하도록 할게요 형님들! 일단 준비한 콘텐츠를 안 할 순 없으니까, 여기 이 다섯 친구들과 제가 따로 모셔온 ‘몰래 온 손님’들로 5 : 5 푸드파이터 대결을 한번 진행해볼게요. 그래서 제 쪽이 이기면 바로 대표님이 방송 출연하는 걸로. 그리고 만약 저희 쪽이 지면 제가 이 친구들 소원 들어주는 걸로 하고! 어때요, 형님덜?”
-극락!
-오ㅋㅋㅋㅋㅋㅋ개꿀잼일 듯
-푸파ㅋㅋㅋㅋㅋ몰래 온 손님 누구냐
-몰래 온 손님 개궁금하네ㅋㅋㅋㅋㅋ
-얘네가 푸파를 어째 이김ㅋㅋ완전 말랐는데
-시청자 찬다, 찬다!
채팅창의 분위기와는 달리 머뭇거리는 아이들의 반응에 레티가 물었다.
“왜요, 자신 없어요?”
“아뇨, 그것보단…… 대표님 허락이 필요한 문제인 것 같아서.”
“아, 그런가? 오케이, 잠깐만요. 대표님!”
하준에게 동의를 구하기 위해 레티가 잠깐 화면 밖으로 벗어났다.
그리고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곧바로 돌아와 말했다.
“와, 여러분! 지금 대표님이 뭐라고 하셨는 줄 아세요? 만약 이 친구들이 지면 방송 출연뿐 아니라 즉석에서 바로 달풍선 10만 개 쏘겠다고 하시는데요? 와 진짜 대박이다, 이 형님!”
아이들이 눈동자를 키우는 동안 레티가 이어 말했다.
“자 그럼, 다시 한번 정리해서 말씀드릴게요! 5 : 5 푸드파이터 대결이고, 종목은 짜장면 15그릇 빨리 먹기. 그리고 내기 조건은 저희가 이기면 대표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고, 만약 여기 이 친구들이 이기면.”
레티가 잠깐의 긴장감을 연출하고는 덧붙였다.
“실시간 검색 순위에 이 친구들 올려주기 어때요, 형님덜?”
-ㅋㅋㅋㅋㅋㅋ식은 죽 먹기지
-우리만 믿어!
-만약 이기면 레게노다 ㅋㅋㅋ홍보 제대로 되겠네
-근데 키워드 뭘로 해서 올려야 됨? 그룹명 있음?
-난 얘네 응원한다!
-레티가 누구 불렀을지 궁금하네 ㅋㅋㅋㅋㅋ
생방송 시청자들의 화력을 이용한 실시간 검색 순위 올리기.
고정 팬층을 보유한 메이저 BJ의 방송에선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고, 그 문화를 완벽히 이해한 하준의 선제안이었다.
물론 레티 또한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기에 성사된 것이었고.
“여기에 플러스로, 제가 아는 기자분들에게 부탁드려서 홍보 기사도 나갈 수 있게 해드릴게요! 달풍선 10만 갠데 이 정도는 돼야 엇비슷하지 않겠습니까, 형님덜?”
어그로를 위해 다시 한번 방제를 바꾸는 레티.
“후후후. 저도 오랜만에 푸파라 상당히 긴장되는데연. 그럼 대망의 ‘몰래온 손님’들을 모셔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다들 나오쎄요!”
레티의 얘기와 함께 웅장한 BGM들이 깔리기 시작했고, 채팅창에선 온갖 BJ들의 이름들이 언급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짜장면 15그릇을 들고 등장하는 그들의 모습에 채팅창은 또 한 번 들썩일 수밖에 없었다.
-이건 너무 사기 아님?
-ㅋㅋㅋㅋㅋㅋㅋ이럴 줄 알았다. 무조건 졌네 ㅋㅋㅋㅋㅋ
-파프리카 먹방 BJ들 다 불러놓고 푸파 내기하면 어떻게 이김ㅋㅋㅋㅋㅋ
-달풍선 받을라고 용을 쓰네 레티 ㅉ
-ㅋㅋㅋㅋㅋㅋ할 말이 없다ㅋㅋㅋㅋ
-그냥 방종해라, 볼 것도 없다
등장만으로도 안 봐도 훤하다는 듯 비난들을 쏟기 시작하는 채팅창.
하지만 웬일인지, 다섯 아이들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해 보였다.
그리고 대망의 푸드파이터 대결이 시작되었다.
* * *
-와…… 내가 지금 뭘 본 거?
-미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얘네 사람 맞음?
-ㅋㅋㅋㅋㅋㅋㅋㅋ보고도 안 믿기네ㅋㅋㅋ
-먹방계의 초신성들이 나타났다!
-아이돌 말고 먹방 BJ로 다들 전향 어떰? ㅋㅋ
-레티 달풍 10만 개 날라갔네 ㅋㅋㅋㅋ
-실시간 검색어 가즈아!
도합 20분도 안 돼서 끝나 버린 5 : 5 푸드파이터 대결.
먹방 BJ들과 레티를 비롯한 다섯 아이들의 입가엔 검은색 소스가 잔뜩 묻어 있었다.
이미 승자는 정해진 상황.
어느새 시청자 수 8만을 돌파한 채팅창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운 상태였다.
“커억. 진짜 다 먹은 거 맞아요? 밑으로 흘린 거 아니고?”
싹 비워 버린 아이들의 빈 그릇을 살피며 먹방 BJ 중 한 명이 믿기 힘들다는 듯 물어왔다.
“아주 설거지를 해놨네…….”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릇 상태에 이내 혀를 내둘렀다.
무엇보다, 싹 비우고도 자신들의 남은 짜장면 그릇을 탐내고 있는 듯한 그 얼굴들로 인해 더더욱.
“자, 제 달풍선 10만 개는 날아갔지만 패배는 깔끔하게 인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다들 어떻게 그렇게 잘 먹어요? 무슨 며칠 굶은 사람들처럼?”
레티의 물음에 은호가 별거 아니라는 듯 답해왔다.
“저희야 며칠이 아니라 2년을 거의 굶다시피 했으니까요.”
“커억.”
수긍할 수밖에 없는 답변에, 먹었던 짜장면이 올라오려는 듯 레티가 헛구역질하는 시늉을 했다.
“크흠, 역시 인생은 배움의 연속이네요. ‘간절함을 이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자, 좋습니다! 그럼 내기는 내기니까 바로 이행하도록 할게요. 형님덜! 8만의 화력 한번 보여주실 수 있으시져?!”
어느새 8만을 넘어 9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시청자 수.
방송 초반 때와는 아이들에 대한 호감도 또한 180도 달라져 있었다.
이미 내기 조건에 응해줄 준비가 돼 있는 그들은 검색어에 올릴 ‘키워드’를 묻고 있었고, 레티는 하준이 사전에 알려준 그것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네, 키워드 말씀드릴게요! 키워드는 이 친구들의 그룹명으로 해주시면 되구요. 그룹명은 바로…….”
* * *
같은 시각, NTV 예능국 회의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난 자정임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집으로 돌아갈 생각조차 않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못 하고 있었다.
“휴우…… 오늘은 아무리 생각해도 안 나올 것 같은데, 이만 퇴근하는 게 어떨까요?”
이미 머리가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진 메인 작가의 제안에, 피로가 가득 묻은 얼굴 몇 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이번 주 내로 기획안 제출해야 하는 거 까먹었어? 편성 날짜는 이미 정해졌는데 소재도, 콘셉트도 아무것도 못 정해놓고 퇴근은 무슨 퇴근이야?”
메인 PD 윤정유의 짜증스러운 어투에, 퇴근하려던 마음들이 쏙 들어간 팀원들.
이미 수일째 같은 회의를 반복하고 있었고, 그동안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내뱉어졌지만, 어느 것 하나 윤정유의 선택을 받진 못했다.
윤정유.
지상파 출신으로 이미 여럿 유명 프로그램을 만들어낸 경험이 있는 그녀.
대부분의 스타 PD들이 그러하듯, 여러 종편 채널에서 숱한 러브콜을 보내왔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그녀가 선택한 곳은 바로 NTV.
다른 방송국들에 비해 설립연도뿐 아니라 유명 프로그램의 수도 적은 곳이었기에 그녀가 이곳을 선택할 거라곤 누구도 예상하지 않았었다.
거기에, NTV의 규모상 월등한 계약조건을 제시했을 리는 만무했고.
그녀가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
“너도나도 다 하는 그런 뻔한 아이디어들 말고, 좀 신선한 것들을 내놓아보란 말이야. 뭔지 감들이 안 와?”
바로, 연출의 자유성.
시청률만을 좇으며 공장에서 물건 뽑아내듯 너도나도 다 똑같이 만들어내는 프로그램은 그녀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NTV는 거기에 대해 일절 터치하지 않기로 계약서에 명시까지 해주었던 것.
이미 지상파에서부터 쭉 합을 맞춰온 탓에 누구보다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팀원들은 군말 없이 노트북 자판 위로 손을 옮겼다.
‘이것도, 저것도 다 아니란 말야. 아오, 미치겠네, 정말.’
NTV로 이적한 이후 그녀가 맡게 된 첫 프로그램.
주변의 기대치가 높은 상황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 또한 티를 내진 않았지만 적잖은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고.
한동안 말없는 침묵이 이어지고 있던 그때, 막내 작가가 의아한 표정과 함께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V.V.I.P? 이게 뭔데 실시간 검색어 1위지?”
“실시간 검색어? 왜, 뭐 떴어?”
막내 작가의 얘기에 다들 궁금하다는 듯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 순위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에이, 뭐야. 고작 인터넷 방송에 한 번 나온 거잖아? 에휴, 이런 걸 기사로 써주는 기자도 참 할 짓 없나보다.”
“보니까 3위, 5위, 9위 다 얘네 관련 키워드인 것 같은데. 참 이럴 때 보면 인터넷 방송 화력이 은근 센 것 같단 말이에요, 그쵸?”
“세기는 개뿔.”
괜히 시간만 허비했다는 반응들을 보이고선 다시 하던 일을 이어가는 팀원들.
하지만 웬일인지, 윤정유의 시선만큼은 여전히 모니터를 향하고 있었다.
올라온 지 채 몇 분도 되지 않은 기사 하나에 꽤 오랜 시간 집중을 이어가고 있는 윤정유.
잠시 후, 사뭇 달라진 눈빛으로 막내 작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유진아. 얘네 이거 방송한 거 어디 가면 풀 영상으로 볼 수 있는지 좀 찾아봐. 지금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