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꾸는 스타 메이커-5화 (6/165)

5화

아이들과의 만남 후 집으로 돌아온 하준.

겉옷을 벗어 소파에 대충 얹어두고는 커피머신 앞으로 걸어갔다.

뜨거운 블랙커피가 잔을 채워가는 동안, 맨 윗단추를 풀고는 넥타이를 살짝 내렸다.

잠시 후, 채워진 잔을 들고는 어디론가 향하는 하준.

발걸음을 멈춘 그곳엔 그림 액자 하나가 걸려 있었다.

커피 한 모금을 입으로 옮기며 하준이 액자 아래로 손을 뻗었다.

-덜컹.

잠금장치가 풀린 듯한 소리와 함께 벽인 줄만 알았던 그것이 빈틈을 보였고, 하준은 약간의 힘으로 이를 옆으로 밀어냈다.

열려진 벽면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긴 하준.

차가운 공기가 감돌고 있는 어두운 공간 안에 LED 조명 몇 개만이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커피잔을 든 하준은 조명 아래로 다가가 걸음을 멈췄다.

그곳엔 검은색 글씨들과 포스트잇으로 가득 매워져 있는 거대한 유리보드가 붙어 있었다.

잠시 정면을 응시하던 하준은 곧 앞쪽에 놓인 보드마카를 집어 들고 유리보드 한편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2020.02.24.> 아이들과의 첫 만남.]

그리고 해당 문장 오른쪽에 ‘V’자 모양의 체크마킹을 하고는 다시 보드마카를 내려놓았다.

7년 전 날짜부터 시간의 순서대로 적혀 있는 그곳엔, 내용만 다를 뿐 조금 전 하준이 적어낸 것과 비슷한 형태의 문장들이 채워져 있었다.

시선은 여전히 유리보드에 고정시킨 채 말없이 커피만 넘겨대던 하준이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휴우.”

벌써 7년째.

처음엔 그저 같은 꿈을 반복하는 것쯤으로 여겼던 일들.

하지만, 꿈이 현실 세계로 나타난 순간부터, 하준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하준은 반쯤 비워진 커피잔을 내려놓고 유리보드 가장 첫줄에 적힌 문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2013.06.04.> 산타클라라의 노숙자.]

예지몽을 통해 얻은 정보들이 실제로 일치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된 그날.

반신반의의 마음으로 하나씩 실행했던 일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마어마한 결과들을 가지고 왔다.

[<2014.01.17.> 그래미 어워드 수상.]

하준이 발견하고 키워낸 산타클라라의 노숙자는 정확히 일 년 후 그래미 어워드에서 신인상을 수상했고.

그는 눈물 젖은 수상소감을 통해 자신의 모든 공을 하준에게 돌렸다.

갑자기 나타난 믿기 힘든 현상들은 그 이후로도 계속되었고,

하준은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굳이 거부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거부할 수 없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예지몽으로 시작했던 그것은 어느 순간부턴 일상생활에도 불쑥 튀어나왔고, 그때마다 하준은 그 정보들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분적인 정보들만을 알려주는 미래 예지였기에, 그 과정을 해결해 나가는 건 오롯이 하준 본인의 몫이었던 것.

“…….”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하준의 머릿속에 어떠한 생각 하나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 일련의 모든 사건들이, 결국엔 어떠한 최종 목적지 하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하준은 지난 수년간 미래 예지로 보았던 대부분을 실천에 옮겼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결과물이 바로 지금의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런 하준도 아직까지 풀어내지 못한 몇 개의 장면들.

그것들이 주는 강렬한 불안감이 바로 하준이 한국으로 돌아온 가장 주요한 이유였다.

지- 잉.

지- 잉.

유리보드 앞에 선 채로 꽤 긴 상념을 이어가던 그때.

하준의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일기 시작했다.

액정화면에 찍힌 이름 세 글자를 확인하고는 하준이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여보세요.”

-뭐?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가시 돋친 목소리.

톤에서부터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온도를 감지한 하준은 곧바로 수화기를 한 뼘 멀리 두었다.

아니나 다를까, 뾰족한 목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뚫고 들어왔다.

-여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 줄……!

* * *

상암동 NTV 앞에 위치한 커피 전문점.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 사이의 음료 두 잔은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주문과 동시에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원샷 하듯 삼켜 버린 구세희가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남은 얼음까지 마구 씹어대고 있었기 때문에.

오득오득.

“네가 감히 내 전화를 맘대로 끊었다 이거지?”

무려 7년 만에 재회한 구세희는 외모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만 달라졌을 뿐, 여전한 모습 그대로였다.

하준이 자신의 아메리카노를 구세희의 유리잔에 채워주며 말했다.

“전화가 안 터지는지 네 목소리가 잘 안 들리더라고. 그래서 일단은 끊고 문자로 대신했지.”

“놀고 있네. 전화가 안 터지는데 문자는 잘될 리가 있냐?”

하준이 다시 가득 채워준 유리잔을 받아 들며 구세희가 또 한 번 하준을 노려봤다.

“이게…… 너 일부러 끊었지.”

하준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지? 방송국 일은 잘 돼가고?”

“뻔뻔한 것 좀 봐. 7년 동안 잠수 탄 네가 지금 나한테 그런 질문할 입장은 아닌 것 같은데?”

“정확히 얘기하면 잠수는 아니었지. 보내온 음성메시지는 일일이 다 확인했고, 아저씨한테 안부도 계속 전했으니까.”

“……하, 얘 좀 봐? 진짜 기가 막혀서!”

다시 한번 아메리카노를 입안으로 들이붓고는 구세희가 말을 이었다.

“너! 한국에 들어온 지 한참 됐으면서 왜 이제야 얼굴을 비추는 건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랑 아빠한테는 바로 왔어야 하는 거 아냐?”

이미 오전에 하준의 집을 찾아갔던 구세희.

그곳에서 우연히 부동산 소장을 만나게 되었고, 이미 하준이 3개월 전부터 들어와 있었다는 뜻밖의 얘기를 듣게 되었다.

하준 또한 부동산 소장의 전화를 받았던 터라 담담한 반응이었다.

“준비해야 할 일들이 좀 있었어. 끝나자마자 바로 아저씨 찾아뵌 거고.”

“하! 나는? 너 내가 먼저 연락 안 했으면 아주 나한텐 코빼기도 안 비췄겠다?!”

“마침 오늘 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타이밍에 너한테 연락이 온 거지.”

“안 본 사이에 너 진짜 뻔뻔해졌다. 재수 없어.”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는 구세희가 하준을 쳐다봤다.

“근데 너 말야. 이런 게 바로 전형적인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경우인 거 알지? 내가 너 코찔찔이 시절부터 데리고 다니면서 얼마나 챙겨줬었는데!”

“데리고 다닌 게 아니라 끌고 다닌 거겠지.”

“이게 진짜 씨…….”

역시나 던지는 족족 반응이 오는 구세희였다.

이젠 20대 후반의 나이가 됐음에도 여전히 한결같은 그녀의 성격.

9살이 되던 해 홀로 남게 된 하준을 구명호가 집으로 들인 이후, 둘은 매일을 붙어 있다시피 지내왔다.

하준의 모친과 각별한 사이였던 구명호는 하준을 친아들처럼 대해주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구세희 또한 그런 하준의 존재가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때론 가족 같기도, 때론 친구 같기도.

그러던 어느 날 하준이 돌연 미국 유학 소식을 전해왔고, 그렇게 떠난 그는 무려 7년 동안이나 제대로 된 연락 한 번이 없었다.

그런 탓에 하준이 돌아올 날만 잔뜩 벼르고 있었고.

얼굴을 붉히고 있는 구세희에게 하준이 말했다.

“어쨌든, 앞으로는 여러모로 자주 보게 될 것 같으니까 이제 그만 그 표정 좀 풀어. 만날 때마다 그러고 있을 건 아니잖아?”

하준의 얘기에 갑자기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 구세희가 손바닥을 마주쳤다.

“아 맞아! 너 아빠 말로는 엔터 사업 할 거라고 했다며? 진짜야? 아니지?”

“응.”

“뭐야? 어떤 거에 대한 대답인데!”

“진짜.”

“헐…… 얘 좀 봐. 내가 그렇게 방송국 얘기해 댈 땐 관심도 안 가지던 녀석이. 너 그럼 벌써 회사까지 차린 거야? 회사 이름이 뭔데?”

“팔도 기획.”

“뭐, 뭐라고? 팔, 뭐?”

“팔도 기획.”

“……헐. 무슨 엔터 이름을 그렇게 지었대?”

눈을 동그랗게 뜬 구세희가 낮게 혼잣말로 덧붙였다.

“무슨 라면 회사도 아니고…….”

구세희는 여전히 의아하다는 표정을 거두지 않고 하준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그럼 네가 오디션 봐서 애들도 뽑고 트레이닝 시켜서 데뷔까지 하고 그러는 거야? 솔로? 아이돌? 아이돌이면 보이그룹? 걸그룹?”

“하나씩만 질문해. 숨넘어가겠다.”

“그래서, 실력들은 있고? 프로듀싱은 누가 하는데?”

또다시 질문들을 쏟아내던 구세희가 갑자기 입을 닫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만…… 근데 너 음치잖아? 음치도 아이돌 그룹을 키울 수 있는 거야?”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구세희의 뜬금없는 소리에 하준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무엇보다 구세희의 머릿속에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남아 있다는 사실 때문.

하준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구세희를 일별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머진 얘긴 차차 하기로 하고, 오늘은 늦었으니까 그만 일어나자. 곧 매장 문 닫을 시간인 것 같은데.”

“응? 벌써?”

왼쪽 손목을 들어 올려 시간을 확인한 구세희가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휴…… 하루 종일 정신없이 일했더니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네.”

이내 가방을 챙겨 구세희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두 사람은 카페를 빠져나왔다.

카페 앞에 주차된 두 대의 차량 앞에 걸음을 멈춘 하준과 구세희.

구세희가 차량의 문을 열고는 하준을 쳐다봤다.

“다음부터 내 전화 씹거나 또 오늘처럼 끊어 버리면 진짜 가만 안 둬, 너. 아무리 미국 물을 먹고 왔어도 네가 유하준인 건 변함없는 사실이라고. 알겠어?”

피로가 잔뜩 묻어나 있는 얼굴을 하고서도 하준을 향해 경고를 잊지 않는 구세희.

하준은 대답 대신 구세희의 차량 문을 가리켰다.

“알겠으니까, 일단 그 문 닫고 따라와.”

“뭐? 어디 가는데?”

구세희의 물음에도 하준은 말없이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에 구세희도 급하게 차문을 닫고는 따라붙었다.

“어디 가냐니까?”

“밥 먹으러.”

“이 시간에?”

“그러게. 누가 이 시간까지 밥을 안 먹어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하준이 구세희의 배를 가리켰다.

“아까부터 계속 꼬르륵거리는 소리 때문에 대화를 할 수가 있어야지.”

그러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하준.

갑작스러운 하준의 행동에 구세희는 꽤나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구세희가 혼잣말을 내뱉었다.

“……뭐야. 안 본 사이에 외모만 달라진 줄 알았더니, 성격도 변한 것 같잖아…….”

자신의 주린 배를 쓰다듬고 있는 구세희의 얼굴엔 어느새 옅은 홍조가 띄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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