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360화 (완결) (360/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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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표범의 혼(豹之魂) (14)

윤성제 6년 1월 열엿새 새벽, 청주.

익천첨 고막 사달극이 12척 길이의 흰 날개를 펼치고 소리 없이 높은 나무에 내려앉았다. 뒤를 돌아보자 청도 방향에서 뭉게뭉게 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수천 년 역사의 우족 도성이 화염에 무너졌다. 오래된 나무들인 청장, 자단, 백화, 적송은 모두 부유하는 먼지로 변했다. 분명 지금 하늘에 대고 죽기 전 슬픔에 찬 원망을 내뿜고 있으리라. 익씨 가문이 다시 빛나는 날이었다. 익씨 사달극 가문의 용감한 자손인 익림 유탑사 사달극은 4만 대군을 투입하여 장장 반년에 걸친 공성전 끝에 우씨에게 충성하는 수비군을 깡그리 멸했다. 그는 이제 곧 시뻘건 피와 산산이 부서진 하얀 깃털을 밟고 왕좌에 올라 우족 전체에게 절을 받을 것이었다. 그에게 거역하는 자는 모두 죽을 것이다. 유탑사는 이미 신의 뜻을 따르지 않고 활과 자신의 의지로 푸른 대지를 다스리기로 결심했다.

신 또한 더 이상 뜻을 전하지 않았다. 유탑사가 교섭 회의에서 손에 쥔 날카로운 화살로 대사제의 심장을 찌른 뒤, 우족 중에는 더 이상 하늘에서 전해오는 뜻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익천첨은 두 손을 합장하고 장문승의 예로써 죽어간 청도의 전사들을 기렸다. 익천첨이 저 숲에서 도망쳐 나올 때 마지막 전우 12명은 화살집의 모든 화살을 꺼내 자신의 앞에 꽂고 장궁을 들고 사달극 가문의 궁수 5천 명을 상대했다.

익천첨은 자기가 정말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었을 적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후퇴하지 않았다. 당시 동륙 벗들에게서 야만인 같은 모습을 배운 익천첨은 피투성이가 된 채 으르렁거리며 자기보다 수십 배는 더 강한 적을 상대로도 필사적으로 싸우며 물러서지 않았다. 화살집에 화살이 한 대라도 남아 있는 한 여전히 살육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이므로 절대 그 화살을 지닌 채 전장에서 도망치지 않고 반드시 적의 심장에 쏘았을 것이다.

익천첨은 두 팔을 벌려 곁에 있는 공주를 끌어안고 살며시 공주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익한, 더는 망설이지 말고 우연을 데리고 떠나라. 소란스러운 영혼들은 걱정 말고 고요의 좌에 들어가라. 태격리사 춤이 그 숲을 열어줄 것이고 우족 선조의 영혼이 너희를 지켜줄 것이다.”

익천첨은 옆의 청년에게로 돌아섰다.

“조급해하지 말고 때를 기다려라.”

“할아버지! 뭐 하려고요?”

우연이 익천첨의 소매를 꽉 붙잡았다.

“소리는 왜 지르느냐, 바보 같은 녀석.”

익천첨은 무표정한 얼굴로 우연의 손을 빼냈다.

“내가 여기서 죽으려는 고집센 늙은이로 보이느냐? 나는 고요의 좌에 들어갈 수 없다. 70년 전 나는 이미 우족이 버린 백성이 되었다. 그 영혼들은 내가 성지를 더럽히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익천첨은 멀리 서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실 나는 한주 땅에 묻혔어야 했다. 70년 전에 그곳에서 죽었어야 해. 하지만 내 벗들이 자기들 목숨과 맞바꿔 나를 살려냈다. 나는 이렇게 헛되이 죽고 싶지 않다. 벗들의 무덤에 참배하러 한주로 돌아가야 해.”

“정말요? 거짓말 아니죠?”

우연이 익천첨의 목을 그러안고 눈을 똥그랗게 떴다.

“같이 동륙에도 돌아갈 거죠? 그렇죠?”

“무겁다. 애 같은 짓 그만해라.”

익천첨은 하얀 화환을 벗듯 목에서 우연을 떼어냈다.

“그래, 언젠가 그때처럼 말을 타고 동륙에 데려가마. 가는 길에는 맛있는 음식도, 재미난 것도 많을 게다. 희야, 여귀진과 약속하지 않았느냐? 나도 너와 약속하마. 어떤 맹세가 듣고 싶으냐?”

“맹세는 됐어요. 할아버지가 안 돌아오면…… 맹세가 다 무슨 소용이에요?”

우연의 눈에서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이 늙은이의 말을 믿어라. 우리는 거짓말로 누굴 떠나보내고 혼자 남아서 죽는 그런 가식적인 청년들과는 다르다.”

익천첨이 우연의 머리를 토닥였다.

“나를 못 찾으면 동륙 남회로 가라. 우리가 전에 살던 곳에 새로 집을 한 채 지을 것이다. 빨리 와야 한다. 이 할아비는 너무 늙어 언제 침상에서 죽을지 모르니까.”

“녹나무도 아직 있겠죠?”

“녹나무는 재가 되지만 않으면 탔더라도 봄에 새로운 수피를 피워낸다. 불을 지를 때 말해주지 않았느냐? 우리 같은 늙은이도 마찬가지다.”

우연은 자그마한 손바닥을 익천첨 앞에 내밀었다. 익천첨은 우연의 손을 보고 제 손바닥을 마주쳤다. 우연은 뒤돌아 익한과 함께 날개를 펼치고 하얀 제비처럼 민첩하게 날아올랐다.

익천첨은 잠자코 손바닥을 보았다. 우렁차게 마주친 손뼉에 손바닥이 아릿했다. 동륙 청년들이 맹세하는 방식이라 했던가. 손바닥을 마주치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평생 약속을 잊지 않는다고 했다. 두 사람은 다시 동륙으로 돌아가야 했다. 우연은 두 소년과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이런 성격의 공주이니 태격리사 춤을 배워서는 안 되었으리라. 더더욱 그녀 스스로를 우족 운명의 제단에 바쳐서는 안 되리라고, 익천첨은 생각했다.

“대장, 70년이 지나도 거짓말로 사람을 떠나보내는 대장의 방법은 여전히 효과가 있단 말이지.”

익천첨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익천첨은 아직도 그 우람하고 무뚝뚝한 사내가 한주 초원의 밤하늘 아래에서 그에게 이 말을 할 때 얼마나 엄숙했는지 기억했다.

“이 형 말을 믿어. 우리는 거짓말로 누굴 떠나보내고 혼자 남아서 죽는 그런 가식적인 청년들과는 달라.”

저 멀리 하늘에서 어렴풋이 하얀 형상이 흐르는 구름을 갈랐다. 그들이 왔다. 매처럼 빠르게.

익천첨은 천천히 날개를 펼치고 강한 풍압(風壓)을 일으키며 높은 곳으로 쏘아지는 날카로운 화살처럼 곧게 하늘로 올라갔다. 익천첨의 발아래 낙엽이 폭설처럼 흩날렸다. 12척 길이의 날개 위로 넘쳐 흐르는 광채는 거의 투명했다. 익천첨의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숲은 그의 발아래에서 점점 멀어졌다. 하늘로 솟구쳐 오른 익천첨은 구름 사이로 들어갔다.

학설들은 공기 중에 들끓는 힘을 느끼고 조심스럽게 선회하며 숲 상공에 멈춰 서서 동북쪽의 검푸른 구름을 바라보았다. 절대 걷히지 않는 그 구름은 한 마리 거대한 용처럼 수백 년간 내내 동북쪽 숲 상공에 머물러 있었다. 그 아래는 진녹색 고요의 좌였다. 목령과 우인의 영혼이 봉쇄하고 있는 금지(禁地). 전설에 의하면 그곳은 산 한 채에 휩싸여 있으며 그 산에 있는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커다란 나무는 늘 나뭇가지를 구름 사이로 뻗고 있다고 한다.

학설들은 계속 쫓아가야할지 망설였다. 금지에 침입하자니 불안했다. 대대로 우황과 대사제만 자유롭게 드나들었고 다른 이는 들어가면 처벌을 받았다.

학설들은 감지되는 힘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고요의 좌에서 전해지는 힘이 아니라 누군가가 남긴 것이었다. 이렇게 강한 힘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것은 버려진 학설, 반역자 고막뿐이었다. 이리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의 비행 궤적에 숨겨진 힘은 청년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학설들은 하얀 우전을 활시위에 얹고 원을 만들어 사방의 기척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들의 바로 위, 구름 속에서 익천첨이 나직이 말했다.

“철갑은 영원하리!”

익천첨은 휙 날개를 오므리고 곧게 추락했다. 그의 오래된 창, 풍화가 선처럼 곧은 은빛을 일으켰다.

“위쪽이다!”

학설 우두머리가 호령했다.

“발사!”

학설의 화살이 하늘로 쏘아져 올라갔다.

십 수 리 떨어진 거리에서 말을 몰고 질주하던 화벽해가 말고삐를 바짝 잡아당겼다. 그의 뒤를 쫓아 질주하던 제자들이 급히 걸음을 멈추었다.

“스승님?”

“저기.”

화벽해가 제자들은 보이지 않는 하늘 끄트머리를 가리켰다.

“내가…… 은빛 유성을 하나 본 것 같구나.”

윤 성제 6년 1월 열엿새, 새벽. 동운산 지맥의 가장 높은 산봉우리. 광풍에 흰색 거대한 늑대의 긴 털이 휘날렸다.

“여표은 액로 파소이가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어젯밤 알적근, 탈극륵 가문 가주 둘과 여응양, 여하가 북도성 내분 중에 모두 죽었답니다.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현재 북도성은 완전히 방어할 힘을 잃었는데 여숭의 막내아들 여귀진이 수천 여 명을 규합해 매복을 시도하려 한다며 조심하시라 전해왔습니다. 그 외에 늑대왕께서 북도에 들어오시는 길은 이미 깨끗이 치워두었다 합니다.”

척후가 거대한 늑대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보고했다.

누염은 힘줄이 울퉁불퉁한 거친 손으로 늑대의 목을 쓰다듬으며 아침 햇살 아래 북도성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누염의 곁에는 상도로합음이 서 있었고 상도로합음의 목에는 다리가 잘린 산벽공이 타고 있었다.

“여응양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지 못했어? 정말 예상 밖이로군. 그래도 다른 외손자가 뜻밖의 기쁨을 주는구나. 와라, 여숭 곽륵이 파소이의 아들아. 네 녀석이 이 늙은이의 피를 다시 끓어오르게 할 수 있는지 보자!”

그들의 발아래에서 하얀 치랑이 수만 기병 사이에 끼어 빠른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설령가 종 군마와 거대한 늑대로 이루어진 대오가 홍수처럼 지세를 따라 쏟아져 내려가 커다란 모퉁이를 돌았다.

산벽공은 남쪽으로 손을 뻗어 다섯 손가락 사이로 대지를 굽어보았다.

“신이시여, 이 시대의 불이 더 활활 타오르게 해주소서.”

【역사】

윤 성제 6년 봄, 북도성에는 내란이 일어났다. 큰 불이 나 하룻밤 사이 성 절반이 타버렸다.

내란 중에 대군 여수우 비막간 파소이, 여응양 나안, 여하 나안이 횡사했고 여복 나안은 실성해 그 후로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다. 파소이 가문의 사내들이 삽시간에 몰락했다.

성 밖에서 기다리던 삭북부 대군도 북도로 출발했다. 초원의 패주를 상징하는 우뚝 솟은 성을 순조롭게 손에 넣을 참이었다.

북도성이 함락되기 직전, 기고를 맨 소년 하나가 얼마 남지 않은 청년들과 각 가문의 노예들을 데리고 성문을 나섰다. 그들은 각양각색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누군가의 무기는 정교했지만 누군가는 고작 사냥활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술에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술냄새를 풍기며 청양의 표범 깃발을 높이 들었다.

여씨 파소이 가문의 마지막 아들, 여귀진 아소륵 파소이가 이날부터 북륙의 대군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삭북부의 백랑단과 이 청년들은 마지막 교전을 벌였다.

하루 뒤, 칸 여표은 액로 파소이가 대군을 상징하는 구미대독을 들고 성을 나와 투항했다. 늑대 등의 용사, 누염 몽륵화아 알이한은 마침내 소원대로 북도성으로 진군했다. 30년 전 한을 품고 북쪽으로 도망쳤던 그는 오랜 세월이 지나 드디어 꿈을 이루었다. 누염이 스스로를 대군이라 칭하지도 않았는데 그의 위세와 잔혹함을 두려워하며 사방에서 잇달아 항복해왔다. 초원에서는 그를 ‘대랑주(大狼主)’라 불렀으며 책에서는 그를 ‘찬왕(篡王)’이라 칭했다.

북쪽 황야의 엄동설한과 고요함에 익숙해진 까닭인지 이듬해 누염은 백랑단을 이끌고 북도성을 떠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결국 북황의 주제산으로 돌아간 그는 눈 속에서 늙어 죽어 늑대 떼에게 먹혔다고 전해진다.

여숭 시대 마지막 용사의 죽음은 손왕 이후 초원의 500년 균형이 깨졌음을 의미했고 각 부락은 다시 혼전에 빠져들었다.

누군가의 역사는 끝이 났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역사는 이제 막 시작이었다.

구주표묘록(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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