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357화 (357/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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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표범의 혼(豹之魂) (11)

“주상, 한 말씀 하시죠?”

철안이 말을 건넸다. 철안은 아소륵과 등지고 앉아 있었다.

“무슨 말?”

“저처럼 둔한 사람도 주상께서 할 말이 있다는 걸 알 정도면 다들 알고 있을 거예요. 말씀하세요.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까.”

철안은 담담하게 말하고는 안정룡이 술에 취해 모닥불을 돌며 춤추는 모습을 보았다. 긴 머리를 흔드는 모습이 제사를 지낼 때 정신 나간 듯 보이는 그의 스승과 닮아 있었다. 철안은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철안, 너 지금 되게 네 백부 같았어.”

아소륵이 제 사발에 술을 따른 뒤 일어섰다.

들썩이던 분위기가 가라앉고 모닥불은 타닥타닥 타들어갔다. 청년들은 아무 말 없이, 웃음기도 지운 채 아까 분주하게 사람들에게 술을 따라주고 양을 구워주던 귀족 청년이 거대한 바위에 서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소륵이 입을 열었다.

“오늘은 소고절이야. 너희가 성인이 되는 날이지. 난 열여덟이야. 지난해 성년이 되었지만 고향에 없어서 이 술을 마시지 못했어. 그때 나는 동륙의 남회성에 있었거든. 너희들 중 대부분은 나를 처음 봤을 텐데, 이제는 내 이름을 알겠지.”

청년들은 놀란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소륵 파소이는 북도성의 유일한 대나안이자 예전의 세자였다. 이 존귀한 신분의 귀족은 노예와 평민들에게 너무나도 큰 인상을 남겼다. 이 소년은 지혜롭거나 용맹하거나 강인한 형들 사이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저 사람들이 선대 대군의 아들들을 헤아릴 때, 혹은 막내아들이 아소륵 세자라고 말할 때나 언급되는 정도였다. 그런 아소륵은 삭북인과의 전투에서 처음으로 초원인을 놀라게 했다. 누군가가 아소륵에게 전설의 흠달한왕과 똑같이 진귀한 청동의 피가 흐르며 그가 난전 중에 수백 명을 베어 죽이고 늑대왕 앞에서 거의 승리를 거두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 순간의 영광은 당시 전투의 처참한 패배에 묻혀버렸다. 너무나도 많은 사내가 전장에서 죽었다. 북도성 사람들은 비통해할 뿐 늑대왕 앞에 쓰러진 청년의 모습을 떠올리는 이는 몇 없었다.

“너희의 형제가 나와 함께 전장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면…….”

아소륵이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말아 물었다.

“정말 미안하다. 나를 욕하고 싶은 사람 있으면, 먼저 욕해. 내 얘기는 그 뒤에 할게.”

아무도 말이 없었다. 수백 쌍의 눈이 아소륵을 쳐다보았다.

“좋아.”

아소륵이 고개를 끄덕이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난 우리 아버지의 막내아들이었어. 어느 날 나도 어른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지. 내게는 형이 넷 있었고 다 나보다 월등했어. 아무리 어른이 되어도 내 마음속에서 나는 늘 어린아이였어. 영원히 형들보다는 어릴 테니까.”

아소륵이 씩 웃었다.

“어린애로 지내는 게 습관이 되니까 정말 나는 어떤 책임도 지려고 하지 않았어. 슬프면 엉엉 울거나 혼자 눈물을 흘렸지. 내 곁의 사람들을 지키겠다고 말했지만 그럴 힘은 없었어. 어떤 일은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늘 피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난 정말 제멋대로인 아이였지. 한번은 아버지께 진안부를 멸족시켜서는 안 되었다고 말하면서 펑펑 울었어. 진안부 친구들이 죽었다는 생각을 하니까 정말 괴로웠거든. 날 죽이고 싶을만큼 괴로웠어. 하지만 그때 나는 아버지의 눈빛을 보지 못했어. 아버지도 무척 괴로워하셨어. 스스로를 죽이고 싶을 만큼 괴로워하셨지. 아버지께서는 내 사촌형님인 백로합 고살이가 아버지의 가장 친한 벗이었다고, 목숨과도 맞바꿀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어. 하지만 청양부를 지켜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가 없었던 거야.”

아소륵이 나직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중에 난 당시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어. 초췌하고, 지치고, 또 나이든 그 얼굴이……. 하지만 난 목 놓아 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어. 욱달한 형님의 말이 맞아. 우는 게 무슨 소용이야? 눈물은 아무도 구할 수 없어. 그냥 겁쟁이가 감정을 터트리는 것일 뿐이지. 나는 서럽게 울었지만 진안부에 있을 때 내 유모였던 가륜첩은 그래도 죽었어. 지금까지도 난 가륜첩 유모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어.”

술이 약간 깬 안정룡은 제 가슴을 어루만졌다. 가슴속에 시큰한 괴로움이 소리 없이 흐르는 것 같았다. 안정룡은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대나안, 그렇게까지 자책하지 마세요. 대나안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어요.’

그러나 안정룡은 그리 말할 수 없었다. 아소륵이 파소이 성을 쓰지 않았다면 자기가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벌써 받아들였을 것이다. 파소이 가문의 사내는 언젠가 청양의 깃발을 쥐고 이 성을 지켜야 했다. 실패는 곧 수치였다.

“내 아버지는 돌아가셨어. 너희도 알겠지만 내 형님들도 죽었어. 둘째 형님은 실성했고 다리도 부러졌지. 그래서 갑자기 내가 철들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됐어. 올해 열여덟인 나는 파소이 가문에 마지막 남은 사내야. 더는 다른 사람이 도와주기를 기다릴 수 없어. 그들은 모두 죽었으니까. 펑펑 울 수도 없어. 내가 울면 어머니는 어떡하겠어? 그래서 오늘은 내가 어른이 되는 날이기도 해.”

아소륵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말을 이었다.

“곧 날이 밝을 거야. 최악의 소식이 있어. 삭북의 늑대왕이 동이 트면 성을 공격할 거야. 손왕의 방식대로 성 밖에 붉은 깃발을 꽂았으니 깃발 안의 사람은 모두 죽게 될 거야. 그 원 밖으로 도망치더라도 삭북인들이 초원 끝까지 쫓아가서 죽이겠지. 삭북의 늑대왕은 내 외조부이지만 그는 복수를 위해 왔어. 늑대왕은 성안 모든 사람의 피로 30년 전 내 아버지 손에 죽은 늑대 기병을 기리려고 해.”

청년들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한기가 느껴졌다. 한 시진이 지나면 날이 밝았다. 그때는 바람과 함께 삭북인들의 군도가 날아올 것이었다.

“난 이제 곧 성을 나갈 거야. 늑대왕이 북도성에는 더 이상 자기에게 대적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할 때 매복해 덮칠 거야. 한 번 암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어. 많은 사람이 죽고 불화랄 장군의 화살은 늑대왕의 몸을 쏘지 못했지. 그래도 난 한 번 더 해볼 거야. 이 성을 지킬 다른 방법은 생각나지 않거든. 이 성을 지키기 위해 내 형들은 물론 이미 많은 사람이 죽었고…… 난 가까운 사람들이 내 품에서 서서히 식어가는 느낌을 알게 됐어.”

아소륵이 청년들의 눈을 훑어보며 말했다.

“나와 함께 갈 사람이 있었으면 해. 성공은 장담할 수 없어. 살아 돌아온다는 약속은 더더욱 못해. 그래서 절대 강요하지 않을 거야. 난 내 가족과 벗을 지키겠어. 그들을 해치려는 사람은 내 시체를 밟고 지나가야 할 거야. 영웅이 되려면 우선 진정한 사내가 되어야지.”

아소륵은 옷깃을 젖히고 목에 걸고 있던 은사슬을 잡아 뜯었다. 그리고 은사슬에 걸어두었던 반지를 엄지에 끼고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우리 같은 사람을 동륙에서는 ‘천구’라고 불러. 이런 상황에 우린 늘 이렇게 말하지. ‘철갑은 영원하리.’”

아소륵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칠흑 같은 하늘을 배경으로 제 반지를 올려다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철갑은 영원하리.”

“영원하리!”

누군가가 불쑥 아소륵의 말에 대답했다.

인파 속에서 막속이 가문의 청년 무사 하나가 머리 위로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의연한 표정을 한 청년의 엄지에도 쇳빛이 반짝거렸다. 철엽은 깜짝 놀랐다. 그 청년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철엽이 어릴 적 친하게 지냈던 동무들에게 ‘쇄룡정’에 들어갈 거라고 비밀리에 연락했을 때 그 청년 무사가 소식을 듣고 자진해 찾아왔었다. ‘쇄룡정’으로 돌진하는 내내 청년 무사는 칼을 들고 철안에게 바짝 붙어서 그의 측면을 지켜주었다.

“철갑은 영원하리.”

철안이 손을 높이 들었다.

“철갑은 영원하리.”

철엽도 손을 들었다.

솟구치는 열기가 모든 괴로움과 무력감을 흩뜨리고 안정룡의 가슴을 뜨겁게 채웠다. 저 일곱 글자가 뜻하는 바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네 사람이 그 말을 할 때의 표정을 보면 주문 같기도 하고 옛 친우들 사이의 맹세 같기도 했으며 지난날 정인에게 속삭이는 밀어 같기도 했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 다시 그 말을 꺼내도 여전히 시간을 뛰어넘는 두근거림이 느껴질 것 같았다.

손을 들까 하던 안정룡은 살짝 머뭇거렸다. 주위는 타닥타닥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두리번거리는 수백 명 속에서 저들 네 명만 무쇠 같은 팔을 하늘로 들어올리고 있었다.

“철갑은 영원하리.”

갑자기 어느 노예 하나가 힘껏 팔을 들어올렸다. 노예의 눈에 불꽃이 일렁였다.

“철갑은 영원하리.”

또 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은근하게 물꼬가 터지자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손을 들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거듭할수록 그들의 목소리는 커졌다. 가슴에 흐르는 화염이 앞다투어 사방에서 뿜어져나왔다. 수백 명의 눈에 불꽃이 일렁거렸다. 누군가가 뛰어오르며 하늘을 칠듯이 허공에 대고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

“철갑은 영원하리! 철갑은 영원하리!”

안정룡도 청년들과 함께 팔을 흔들었다. 태어난 지 20여 년만에 이런 기쁨은 처음 느껴보았다. 안정룡은 열심히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맞추었다. 자기가 얼마나 기쁜지 알려주고 싶었다.

문득 제 옆에 있는 청년이 아까 제일 먼저 다가왔던 노예임을 깨달았다. 그 노예는 안정룡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무당이죠?”

“그럼 어때서?”

“같이 나가서 싸우게요? 무당은…… 다 허약하다고 하던데…….”

노예가 흘끔흘끔 안정룡의 안색을 살폈다.

“나 무시해?”

안정룡은 순간 어이가 없어 눈을 부릅뜨고 고함쳤다. 그러더니 소매를 걷어올려 근육이 조금 있는 팔을 드러내보였다.

“봐! 난 허약하지 않아!”

노예는 진지하게 안정룡을 쳐다보다가 ‘쿡’ 웃음을 터뜨렸다. 안정룡도 제 팔을 흘긋 보더니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손에 든 양다리를 들어 올리고 술잔을 부딪치듯 양다리를 부딪치고는 사정없이 고기를 한 입 물어뜯었다. 두 사람의 주위로 함성이 조수처럼 요동쳤다.

아소륵이 술 사발을 하늘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나 이제 가. 희야, 우연. 너희 모두 아주 멀리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서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겠지? 나도 그래. 너희를…… 꼭 다시 만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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