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355화 (355/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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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표범의 혼(豹之魂) (9)

“이곳을 지켜라! 누구도 금장궁에 발을 들여서는 안 된다! 감히 덤비는 자가 있다면 전부 죽여라!”

철안이 사납게 소리쳤다. 손에 든 장도에는 피가 뚝뚝 흘렀다. 벌써 몇 명이나 죽였는지 셀 수조차 없었다. 합로정 가문의 무사들이 끊임없이 몰려왔다. 철안 일행을 금장궁 문앞까지 데려온 1천 명은 거의 다 죽었다. 남은 것은 철안과 철엽이 이끄는 막속이 가문의 무사 일부뿐이었다. 금장궁을 딱 붙어 지킨 덕에 아직 부상병 서른 다섯이 남아 있었다.

“파찰, 대나안을 모시고 가.”

철안이 아우를 곁으로 잡아당기며 나직이 지시했다.

“같이 가!”

철엽은 말을 듣지 않고 철안의 갑주를 꽉 붙들었다.

“못난 새끼!”

이 순간 철안도 제 아우를 어쩌지 못했다. 그저 눈만 부릅뜬 채 무의미한 호통을 칠 뿐.

“작은 주인! 더는…… 못 지키겠습니다!”

막속이 가문의 무사 하나가 달려와 큰 소리로 외쳤다.

철안이 고개를 돌렸다. 수천 명이 넘는 무사들에 짓눌려 이들의 전선이 밀려나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았다. 칼조차도 휘두를 수 없을 정도였다. 막속이 가문의 무사들은 상대 무사들을 장도로 막았지만 인파의 압력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뒤편의 합로정 가문 무사들은 힘을 쓸 수 없자 횃불을 높이 든 채 미친 듯이 소리쳤다. 한 무더기의 불빛에 철안은 눈이 부셨다.

“금장궁 안으로 물러나라! 뒤편으로 들어가!”

철안이 명령했다.

철안은 금으로 수놓아진 양가죽 휘장을 젖히고 제일 먼저 금장궁으로 돌진했다. 철엽도 뒤따라 들어왔다가 제 형의 등에 머리를 부딪쳤다. 철안이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던 철엽은 전율을 느끼며 넋을 잃었다.

도처에 시체가 널려 있고 부드러운 양탄자는 시뻘건 피에 적홍색으로 물들었다. 피를 뒤집어쓴 아소륵 파소이는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황금 옥좌에 앉아 있고 옥좌 앞에는 선혈이 뚝뚝 흐르는 장도가 꽂혀 있었다. 아소륵은 두려움을 자아내는 공허한 눈동자로 모두를 훑어보았다. 잇달아 쏟아져 들어온 합로정 가문의 무사들은 어리둥절해하며 들고 있던 칼을 내렸다.

철안과 철엽은 아소륵을 따른 지 10년이었지만 제 주상과의 거리가 이토록 멀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대군의 옥좌에 앉은 이 청년은 새로운 파소이 가문의 가주이자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청동의 피 계승자였다. 아소륵은 돌연 훌쩍 자라 제 아버지처럼 외롭고 강대한 제왕이 되었다.

아소륵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손에는 머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여응양 욱달한 파소이의 머리였다.

아소륵은 차분하고 아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머리를 가져가 모두에게 보여주고 그만 싸우라고 해. 환란의 원흉이 죽었다. 지금 너희가 죽이는 사람은 같은 부족민이다.”

“늑대왕, 북도성의 동, 남, 서 성문 세 곳이 모두 열리고 청양인들이 우르르 도망치고 있습니다. 추격해 죽일까요?”

삭북부 척후가 빠른 말로 누염 앞에 달려와 보고했다.

연로한 삭북 늑대왕은 높은 곳에 올라 북도성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적홍색 화염이 성 가운데의 장막들을 집어삼켰고 수많은 사람의 함성 소리가 한데 모여 몇 리 밖에서도 들릴 정도였다. 그곳은 금장궁이 자리한 곳이었다. 소리로 보아 수천 명 넘게 모인 듯했다.

“천 명씩 부대 세 개로 나누어 성문 세 곳을 통제해라. 평민들은 보이는대로 죽이고 귀족이 섞여 있거든 절대 놔주지 마라. 단, 절대 성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나머지 인원은 북문에 소집한다. 해가 뜨면 북문으로 성에 들어갈 것이다.”

누염이 명령했다.

“북문은 안 열렸습니다.”

척후가 말했다.

“그럼 부셔야지. 나는 북쪽에서 왔다. 돌아서 가고 싶지 않다.”

“네!”

척후는 명령을 받고 바로 걸음을 뗐다.

“잠깐. 북도성에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누염이 물었다.

“아직 모르겠습니다. 내분이 일어났을 것으로 짐작할 뿐입니다. 대략 수만 명이 성안에서 서로 싸우고 있으며 누군가는 그 틈에 사람을 죽이고 약탈을 해 평민들은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도망치는 듯합니다.”

“다시 알아봐라.”

누염이 손을 내두르자 척후는 빠르게 떠나갔다.

“덫 안의 짐승들이 모두 미쳤군요. 최후의 격투겠지요?”

산벽공의 말에 누염이 나직이 말했다.

“끝날 때가 됐겠지? 끝나야지……. 지금 나는 정말 초조하게 태양이 떠오르기를, 북도성의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소. 나를 맞이할 사람이 여응양일지 모르겠군. 난 정말로 녀석이 마음에 드오. 그 젊은 늑대 녀석은 늑대의 우두머리가 될 자질이 있소!”

“그 이빨을 늑대왕께 겨눌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좋소. 나는 적수를 애타게 갈망하거든.”

누염이 한숨을 뱉었다.

“하지만 내 적들은 모두 죽었다오.”

아소륵은 눈밭의 갈림길에 서서 흰 장막 두 채를 바라보았다. 각 장막에는 모두 아소륵이 보고 싶은 여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가고 싶은 그 길을 아소륵은 선택할 수가 없었다. 들어가서 그 여인의 얼굴을 보고 무사히 살아있는지 확인하고 싶어도 그 장막의 문은 아소륵에게 열리지 않을 것이었다. 아소륵은 어머니의 장막으로 향했다. 소녀 노예가 일찌감치 휘장을 젖히고 아소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소륵을 보는 소녀 노예의 눈빛은 지난번과 달리 조심스러움과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금장궁에서 알이타까지는 멀지 않기에 벌써 소식이 전해졌다. 여응양이 죽은 순간부터 아소륵 파소이는 파소이 가문의 가주였다.

“나가봐.”

아소륵이 소녀 노예에게 말했다.

“어머니와 둘이 얘기 좀 할 테니 따뜻한 곳에 가서 쉬도록 해.”

아소륵은 안쪽 장막의 휘장을 젖혔다. 안에 있던 늑마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고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아소륵을 보는 늑마의 눈빛은 어리둥절했다가 또렷해졌다. 짧은 순간에 눈빛이 수차례 바뀌었다. 늑마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소륵은 한 걸음씩 어머니에게로 걸어갔다. 늑마의 눈에 불안한 기색이 비치며 헝겊 인형을 안은 채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어머니, 무서워 마세요. 저예요…….”

아소륵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질없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실성해 그를 못 알아본 지 오래였다. 하물며 이젠 10년이나 지났다. 늑마의 기억속 아소륵은 아직 사내아이일 터였다.

늑마가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불안한 기색은 조금 누그러졌다. 늑마는 헝겊인형을 안고서 나지막하게 어떤 노래를 흥얼거렸다. 어린 소녀처럼 아소륵이 곁으로 다가와 살며시 어깨를 감싸안아도 가만히 있었다. 고개를 들어 아소륵을 본 늑마는 순간 멍해지더니 안고 있던 헝겊 인형을 떨어뜨렸다. 아소륵이 허리를 숙여 인형을 주우려는데 늑마가 아소륵의 옷깃을 붙잡았다. 늑마는 아소륵을 흘끔거리며 조심스럽게 목덜미로 다가가더니 코를 목에 갖다대고 가볍게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아소륵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심장이 철렁했다. 목욕을 할 시간이 없어서 옷만 바꿔 입었기에 온몸에서 피비린내가 났다.

“아…… 소…… 륵.”

늑마가 조용히 아소륵의 이름을 불렀다.

아소륵은 잘못 들은 줄 알고 고개를 숙여 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늑마가 자세히 냄새를 맡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한번 확신에 차 말했다.

“아소륵.”

“어머니!”

아소륵은 벅찬 감정과 주체할 수 없는 떨림에 어머니를 와락 끌어안았다.

“내…… 아들!”

늑마가 더 세게 아소륵을 껴안았다.

“어머니…… 저를 기억하고 계셨군요.”

아소륵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얼굴은 웃고 있었다.

늑마는 아들 아소륵을 안고서 노래를 흥얼거렸다. 아소륵은 이미 키가 커서 어른이 되었지만 늑마는 여전히 아소륵을 인형처럼 안고 있었다. 하여 아소륵은 어쩔 수 없이 바닥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래야 어머니가 편안하게 아소륵의 머리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아소륵에게는 세 시진밖에 남지 않았다. 그중 한 시진을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데 쓰고 싶었다. 할아버지 때처럼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동륙에서 보고 들은 것과 친구들까지 모두 어머니에게 말할 작정이었다. 난세인 지금은 매 순간이 영원한 이별일 수 있으니까.

“아소륵, 무서워 마라. 무서워 마.”

늑마가 따스한 손길로 아소륵의 머리를 토닥였다.

“저도 제 성격이 애 같은 거 알아요. 늘 겁내고 항상 누군가가 용기를 북돋워줘야 하죠. 동륙에서 희야를 알지 못했다면……. 희야가 없었으면 저는 벌써 몇 번이나 죽었을 거예요.”

아소륵이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이제 다 커서 무서워하는 건 별로 없어요.”

아소륵이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시간이 없네요. 다음에 또 얘기나누러 올게요.”

바닥에서 헝겊 인형을 주워든 아소륵은 인형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늑마의 품에 안겨주었다. 그리고 인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없는 동안, 나 대신 어머니랑 있어.”

만들 때부터 입이 비뚤어져 있던 헝겊 인형은 지금도 똑같았다. 꼭 아소륵을 향해 부러 짓궂은 표정을 짓는 것 같았다. 아소륵은 씩 웃고는 자기가 참 유치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소륵은 몸을 숙여 어머니를 꼭 안고 머리에 입을 맞춘 뒤 장막을 나왔다.

뜻밖에도 소녀 노예는 떠나지 않고 장막 밖에서 팔을 감싸쥐고 발을 동동 구르며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왜 안 갔어?”

“측연지 장막에서는 아무 때나 자리를 비우면 안 돼요. 대나안께서 저를 못 찾으셔도 안 되잖아요.”

아소륵은 어깨의 담비 외투를 벗어 소녀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소녀는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녀는 사양하지도 못하고 감사 인사를 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이름이 뭐야?”

아소륵이 소녀에게 물었다.

“오운입니다.”

소녀는 벌벌 떨며 대답했다. 만족어로 오운은 ‘지혜’를 뜻했다.

아소륵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오운, 내 어머니 곁을 떠나지 말고 지켜라. 성이 함락되고 청양인이 여기 오면 여숭 곽륵이 파소이의 측연지가 계신다고 해. 삭북인이 오면 누염 몽륵화아 알이한의 딸이 머문다고 하고. 알겠니?”

“명심할게요.”

오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아소륵은 장도를 허리춤에 꽂고 북풍을 맞으며 떠나갔다.

오운은 장막 앞에 서서 점점 작아지는 아소륵의 뒷모습을 보았다. 갈림길에서 아소륵은 돌연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쌩쌩 부는 바람속에서 인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운은 아소륵 대나안이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사연이 많은 듯한데 한마디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오운은 몸에 걸친 담비 외투를 꼭 그러쥐었다. 그리고 또 생각했다. 이렇든 저렇든 대나안은 좋은 사람이라고. 한참이 지나고 아소륵은 뒤돌아 떠나갔고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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