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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표범의 혼(豹之魂) (7)
여응양은 무릎에 여하의 시체를 얹은 채, 오랜 세월 갈망해왔던 황금 옥좌에 앉아 있었다. 그는 이미 각성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금장궁에는 산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처음 여응양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옥좌 한쪽에 놓인 백은 꽃병이었다. 어머니의 영혼에 바친 꽃다발이었다. 두 번째로 아우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여응양은 이것이 얼마 후면 깨어날 악몽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여응양과 여하를 지켜주지 못했다. 어쩌면 일찌감치 흩어져 아들의 간곡한 바람을 듣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여응양은 여하의 몸에서 화살을 하나, 하나 뽑아내고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았다. 그러자 평소처럼 익숙한 아우의 얼굴이 보였다.
여응양은 연초를 태우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지금은 웬일인지 연초를 태우고 싶어졌다. 죽은 알적근 가문 가주의 몸을 더듬어 담뱃대와 연초를 찾아낸 여응양은 담뱃대를 입에 물고 금장궁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오래도록 침묵했다.
금장궁 밖 멀지 않은 곳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3대 귀족 가문의 무사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합로정 가문의 무사와 알적근, 탈극륵 가문의 연합군은 금장궁으로 오던 도중에 만났다. 액일돈달뢰는 진력을 다해 복수에 눈이 먼 사내들이 금장궁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북도성 전체가 꿈에서 깨어났다. 3대 가문의 무사들이 성안 곳곳에서 맞닦뜨렸다. 말은 필요 없었다. 그들은 곧장 칼을 휘둘러 적을 베었다. 합로정 가문의 마초장이 불탔다. 알적근 가문 가주의 아내들은 합로정 가문의 무사 수백 명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소식이 속속 금장궁에 전해졌지만 여응양은 듣고 싶지 않았다.
피로했다. 맹우인 액일돈달뢰를 지원하러 가야했지만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이제 이 성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사내들은 복수에 여념이 없었다.
여응양의 지략은 실패였다. 여하가 틀렸다.
합로정 가문의 무사들은 더 버티기가 힘들었다. 교전 소리가 점점 금장궁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여응양은 그들이 제 앞에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여전히 여응양은 아무도 이길 수 없는 파소이 가문의 청동의 피 계승자였다. 그의 옥좌 앞으로 달려들려면 죽을 각오를 해야 했다. 교전 소리는 어느새 100보 밖으로 가까워졌다. 그때, 금장궁 휘장이 젖혀지고 장도를 든 사람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그자를 흘긋 본 여응양은 의아한 미소를 지었다.
“아소륵? 아직 살아 있었느냐? 여기엔 어떻게 왔지?”
“알적근 가문의 차남에게 나를 금장궁까지 엄호해 주면 형님을 죽일 수 있다고 했어요. 나도 형님과 같은 청동의 피가 흐른다고요. 그랬더니 도와주더군요.”
“할아버지를 죽였느냐?”
“아뇨. 칼로 자기 할아버지를 겨눌 수는 없죠.”
여응양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럼 날 못 죽인다. 너는 너무 약하거든. 아소륵, 너는 우리 파소이 가문에 잘못 태어났다.”
“넷째 형님이 죽어서 많이 슬프죠? 이리 될 줄 알았더라도 그렇게 했을 건가요?”
“세상은 나약한 사람을 용납하지 않는다. 무척 슬프지만 나는 또 그리할 것이다. 영웅이 되려면 극도로 모질어야 한다. 너는 그걸 모르기 때문에 비막간의 시체에 엎드려 눈물이나 흘리는 것이다.”
“형님 말, 하나도 이해 못 하겠네요. 그냥 바보라고 생각해요. 난 오랜 세월을 바보로 살아서 안 바뀌어요.”
“북도성을 구할 사람은 나뿐인데도 어리석은 너희는 믿지 않는구나. 너희는 전부 나를 죽일 생각뿐이지. 나를 죽이면 늑대왕이 이곳에 쳐들어와 성안의 모두를 죽일 것이다. 그럼 만족하겠느냐?”
“동륙에서 줄타는 예인을 만난 적 있어요. 땅에서 수십 척 높이의 철사 줄 위를 걸어 다니고 재주도 넘죠. 떨어지면 다치고, 죽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들은 떨어지지 않는다고 믿어요. 늘 줄 위를 걸어 다니니까요. 철삿줄은 그들에게 평지나 똑같죠. 하지만 줄타기를 하던 늙은 예인들 대부분은 다리를 절어요. 형님, 평생 줄을 타다 보면 반드시 떨어집니다.”
“아소륵, 말하는 것이 너답지 않구나. 정말 나를 증오하는 것이 느껴져.”
여응양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 같은 아이가 진정으로 누군가를 원망하게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
“내가 많이 약하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벌써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요. 여기까지 오면서 수백 명이 죽었고 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어요. 형님이나 나나 등 뒤는 낭떠러지죠. 안 그래요?”
아소륵이 고개를 쳐들고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소륵은 영월을 회전시켜 왼손으로 칼을 잡았다. 칼끝은 여응양이 아닌 제 허리춤을 향했고 장도는 어느새 칼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소륵은 말없이 한 걸음 내디디며 허리를 낮추고 몸을 옆으로 틀었다. 다섯 손가락이 핏자국으로 얼룩덜룩한 칼자루에 놓였다. 아소륵은 칼을 뽑기 직전의 자세에서 멈추고 절대적인 고요에 잠겼다. 이마 앞으로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눈을 가렸다.
“순살(瞬殺)?”
여응양의 눈이 살짝 반짝였다.
들어본 적 있는 도술이었다. 동륙의 설국, 진북에서 유래한 이 도술은 세상 모든 도술 중에서 가장 무시무시하고 날카로운 종류로 알려졌다. 진북의 무사들은 기나긴 겨울 동안 얼음물로 목욕하며 정신과 육체를 단련하여 강렬한 살육의 기운을 가슴 깊숙이 숨겨둔다. 이는 전장에서만 내보낼 수 있는 위험한 마귀였다. 진북 무사들이 이 도술을 사용할 때는 칼의 살기가 이들을 조종한다. 피를 보지 않고 칼집으로 돌아온 칼은 불길하며 주인에게 해가 된다고 여겨졌다.
여응양은 여하의 시체를 살며시 바닥에 내려놓고 옥좌에서 걸어 내려오며 칼집에 숨어 있는 5척 길이의 장도를 쳐다보았다. 칼집을 뚫고 나온 짙은 피비린내가 얼굴에 확 스쳤다.
여응양은 두 발을 떼고 서서 가볍게 손목을 움직였다. 사자아를 손에 느슨하게 쥐고 칼끝을 바닥에 댔다.
아소륵은 눈앞의 형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는 ‘쇄룡정’에 갇힌 지 거의 사흘 만에 똑같은 청동의 피를 지닌 형과 정면으로 대치했다. 아소륵은 순살 기술을 사용하려 했다. 국면을 뒤집을 수 있는 일격이기 때문이었다. 상양관 결전을 앞두고 고월의에게서 이 도술을 배웠다. 고월의가 이 도술로 뇌기를 베어죽이는 모습을 본 적도 있었다. 그 모습은 요괴처럼 날카롭고 나비처럼 아름다웠다.
순살도의 정수는 칼을 뽑는 순간에 모든 힘을 응집하는 데 있었다. 그 순간 폭발하는 힘은 수문을 뚫고 나오는 거센 파도처럼 기세가 왕성해서 막을 수가 없었다. 칼을 쓰는 사람은 왕왕 이 힘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칼집의 힘을 빌려야 했다. 칼집의 위치와 각도가 칼이 나오는 방향을 제어했다. 칼은 필사적으로 칼집의 속박을 뿌리치고 나오는 순간 귀신처럼 속도가 빨라진다.
그러나 대개 칼을 휘두를 수 있는 기회는 한 번뿐이며 명중하지 못하면 등 뒤에 커다란 틈을 남기게 된다.
여응양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는 강한 상대를 좋아했다. 더 이상 평범한 검술 실력을 가진 3왕자의 모습으로 제 힘을 감출 필요가 없었다. 파소이 가문 최고의 무사이니 최고의 상대가 필요했다. 아소륵의 힘과 정신이 종이상자에 가둬둔 화염 같다는 것을 그는 알아보았다. 그 얇은 벽은 언제든 뚫릴 수 있었다.
여응양은 격렬하게 뛰는 제 심장 소리가 들렸다. 이미 피가 흐르는 속도도 지극히 빨라졌다.
“아소륵, 내가 그랬었지. 너 같은 사내는 영원히 남을 위해 살아간다고. 너는 끝내 이 형의 피로 다른 형의 영혼을 추모하려 하는구나.”
여응양이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그러나 네 사주는 외로운 곡현에 걸려 있어 너와 관계된 사람은 하나 둘 죽어나갈 것이다. 다 죽고나면 너는 누구의 피로 누구를 추모할 것이냐?”
“그건 그런 날이 오면 다시 얘기하죠.”
아소륵의 발걸음이 살짝 무거워졌다. 발뒤축에 땅이 흔들리며 거대한 망치가 내려쳐지는 소리가 나고 아소륵의 몸은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쏘아졌다. 질풍에 긴 머리카락과 옷이 뒤쳐지며 양쪽으로 펄럭펄럭 나부꼈다.
“아소륵, 역시 동륙에서 대단한 것을 배웠구나.”
여응양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눈동자에는 불꽃이 일렁이는 듯했다.
“의마덕, 고랍이, 납과이굉가, 이것은 내 조상의 피다.
조상의 영혼이 어둠 속에서 나를 보고, 내게 존귀한 피와 살을 전해주며, 천신의 축복을 전해주네.
우리는 초원의 왕이 될 운명이고, 세상의 황제가 될 운명이며, 신의 유일한 사자가 될 운명이다.”
여응양이 아소륵을 향해 포효했다. 그 오래되고 주문 같은 말은 불씨처럼 거의 말라버린 혈맥 깊숙이 떨어져 만신창이가 된 몸에 재차 불을 지피며 불사의 몸이 되도록 단련시켰다. 아직까지 연달아 두 번 청동의 피를 불러일으킨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여응양은 반드시 해내야만 했다. 그는 여응양 욱달한 파소이였다. 패배자로 쓰러지는 일은 용납할 수 없었다. 맞은편의 사람도 똑같은 피가 흐르니 더더욱 물러설 수 없었다. 이번 승리를 위해서 어떤 대가도 치를 수 있었다. 이제까지는 성공할 때마다 어떤 대가를 따져본 적 없었다.
“파소이 가문 선조의 영혼은 바로 여기, 내게 있다!”
여응양은 깊은 어둠에 빠져들었다. 짐승 같은 눈빛을 번득거리며 전력을 다해 몸을 내밀고 칼을 베었다.
여응양의 칼이 그린 궤적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가장 살기 어린 호선이었다. 천신이 도끼로 세상을 가른 일격이자 영구불변의 존재, 파소이 가문의 역대 선조들이 벤 것과 똑같은 원호(圓弧)였다.
여응양은 완벽하게 대벽지도를 재현해냈다!
아소륵의 칼이 칼집에 바짝 붙으며 귀를 찌르는 긴 울림을 일으켰다. 칼집을 떠난 영월은 보름달처럼 환한 빛을 발산했다. 아소륵은 온힘을 다해 폐속의 공기를 토해냈다. 칼집 속에 봉쇄되어 있던 흉악한 살기와 함께 가족의 죽음으로 생겨난 원한과 증오가 밀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칼빛은 한 가닥 실처럼 가늘었다.
두 형제가 스쳐 지나갔다. 아소륵은 십여 보를 더 돌진한 후에야 힘겹게 멈춰 섰다. 두 사람은 서로를 등지고 섰다. 여응양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사자아를 떨어뜨렸다. 아소륵의 손에는 칼이 없었다. 줄줄 흐르는 피가 팔뚝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가 늑대를 베었던 걸 보고 대벽지도를 배웠겠죠? 하늘을 가르는 칼……,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호선……. 그건 파소이 가문 도술의 정수예요……. 형님이 맞아요. 형님은 파소이 가문에서 가장 강한 무사예요. 한 번 본 것만으로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은 도술을 익혔으니까요.”
아소륵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사실 형님이 나보다 이 도술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에요. 형님은 늘 권력과 무력을 원하고 자기를 위해 세상을 개척하려 했죠……. 난 그저 내 곁의 몇몇을 지키고자 했을 뿐이고요.”
“이 와중에도 나를 비웃는 게냐? 순살도 다음 공격에서 사용한 건 무슨 도술이지?”
“그건 도술이 아니라 창술이에요. 극렬지창. 모든 원을 파괴하는 창술이죠!”
아소륵이 돌아섰다. 5척 길이의 날카로운 칼이 여응양의 가슴을 완전히 관통했다. 여응양의 가슴은 내내 칼자루에 괴어져 있었다. 완벽한 원을 벨 수 있는 것은 가장 맹렬한 직선뿐. 아소륵은 희씨 가문의 창술, 극렬지창의 ‘분하’를 도술 가운데 사용했다. 가장 흉맹한 찌르기 공격 중에 호흡과 근육과 정신을 어떻게 조절하는지는 희야에게 배웠다. ‘분하’를 내지를 때는 창 꼬리 부분을 쥐는 터라 그 점은 도술과도 별 차이가 없었다.
“동륙에서 정말 대단한 것을 배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