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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표범의 혼(豹之魂) (6)
알적근 가문의 영채 안. 알적근 가문의 차남과 탈극륵 가문의 장남은 금장궁 방향의 불빛이 하나하나 꺼지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은 금장궁 전투의 결과를 알게 되었다.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교전 소리에는 그들 아버지의 포효와 비명도 섞여 있을 터였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제 눈으로 본 것을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무사 500명에 달하는 군대가 보이지 않는 힘에 완전히 집어삼켜졌다.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죽임을 당했으니 반드시 복수해야 했다. 내일 당장 북도성이 도륙당한다고 해도 그들은 원수를 먼저 죽여야 했다.
두 가문의 사내들이 나란히 날카로운 칼을 뽑았다. 알적근 가문 차남의 함성과 함께 무사들이 말을 몰아 영채를 빠져나갔다. 그들은 말 위에서 횃불을 켜고 금장궁으로 달려갔다.
횃불을 높이 들어 올린 대오가 지세의 힘을 받아 미친 듯이 질주해 내려갔다. 멀리서 보면 한 마리 살아있는 용이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합로정 가문의 영채 안, 액일돈달뢰의 아우도 화룡(火龍)을 보았다. 그의 뒤로 합로정 가문의 사내 2만 명이 대오를 정렬하고 서 있었다.
액일돈달뢰의 아우가 휙 손을 흔들자, 합로정 가문의 마지막 남은 병력이 총출동했다.
“아버지, 숙부. 합로정 가문과 알적근, 탈극륵 가문 사람들이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잡아화가 장막 안으로 허둥지둥 달려 들어왔다.
“뭐라고?”
철진과 철익이 동시에 일어섰다.
“우리 영채 앞의 사람들도 모두 철수했습니다. 지금 3개 가문의 무사가 전부 금장궁으로 달려가고 있어요. 다들 금장궁에서 눈이 벌게져가지고 사람을 죽이고 있다고요! 여응양이 연회에서 알적근과 탈극륵 가문의 가주들을 죽였다 합니다.”
“여응양이 미쳤군. 이건 원한 맺힌 살인을 도발하는 짓이야. 지금 이 상황에 성안에서 아군끼리 전쟁이라니…….”
철진이 힘없이 땅에 주저앉았다.
“각 가문의 영채는 반응이 어떠하냐? 9왕 쪽은 소식이 없느냐? 목해양은?”
철익은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우라질! 여응양은 대체 무슨 생각이지?”
“다들 영채에 틀어박혀 있을 거다.”
철진의 말에 잡아화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버지 말씀이 맞습니다. 다들 문을 걸어 닫고 안 나옵니다.”
“우리도 나갈 수 없다. 지금 영채를 나가면 다 죽는다. 저들은 미쳤어. 모두가 미쳤어.”
철진이 술잔을 들고 천천히 술을 마셨다.
“파로와 파찰, 이 놈 새끼들은? 놈들도 못 나가게 해!”
철익은 불현듯 철없이 나부대는 두 아들이 떠올랐다.
“해가 지고부터 안 보입니다…….”
잡아화도 번득 두 사촌이 생각이 났다.
철익의 낯빛이 퍼렇게 질리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철안은 동굴 안을 미친 듯이 내달렸다. 자신들은 벌써 13명을 잃었는데 상대는 겨우 다섯 명밖에 잃지 않았다.
이곳을 지키는 무사는 생각 외로 적었다. 심지어 한 명도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곳의 무사들은 전부 상어 가죽 같은 몸에 붙는 갑옷과 검은색 덧옷을 입었다. 이들은 허깨비처럼 동굴 구석에 숨어 있었고 매번 하나 혹은 두 명이 나타나 눈치 채지 못한 각도에서 습격해왔다. 순전히 사냥을 목표로 하는 자객의 방식이었다. 철안이 귀복영에서 배운 것보다 더 은밀했다.
철안의 심장은 극도로 빨리 뛰었다. 몇 명이나 더 남아 있을지 알 수 없었다. 10명이 더 남아 있다면 철안 일행은 ‘쇄룡정’으로 가는 길에 모조리 죽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철안은 자기가 길을 제대로 찾았다고 확신했다. 모두에게 홰를 4대씩 챙기라고 한 것도 잘한 일이었다. 횃불이 한데 모이자 주위가 환하게 밝아졌다. 습하고 따뜻해서인지 동굴 안에는 여기저기 이끼가 자라 있었다. 사용하지 않고 버려진 지 오래된 듯했다. 길 대부분에는 사람이 걸어간 흔적이 없고 자신들의 발자국만 또렷하게 보였다. 철안은 이제 ‘쇄룡정’ 출구의 수위 무사가 아직 불을 지르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갑자기 전방의 어둠 속에서 별빛 같은 불빛이 번쩍였다.
“파찰! 노를 준비해!”
철안이 나직이 외치고 계속 걸어갔다.
불빛이 점점 가까워졌다. ‘쇄룡정’ 입구에 다다른 것이 틀림없었다. 제일 먼저 소기름 통을 관리하는 자부터 제압해야 했다. 모든 것이 철엽의 화살 한 대에 달려 있었다.
거대한 석실로 뛰어 들어갔다. 철안은 급히 걸음을 멈추고 칼을 가로놓으며 뒤편의 사람들을 막았다. 철엽은 석실 안을 슥 보고는 살짝 몸을 틀어 기병노를 등 뒤에 숨겼다. 막속이 가문의 무사들은 신속하게 자리를 옮기며 반월진을 만들어 철안과 철엽을 뒤편에 보호했다. 철엽의 손바닥에 땀이 났다. 땀은 소리 없이 기병노의 기괄 속으로 스며들었다.
석실은 금장궁 두 배 높이만큼 컸다. 천장에는 거대한 구멍이 하나 나 있고 달빛이 그리로 스며들었다. 지면에도 구멍이 하나 있었는데 두 아름 정도 되는 크기에 구멍 안은 새카맸다. 옆에는 기다란 쇠사슬이 연결된 청동 양화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구멍 옆으로 활활 타는 화톳불이 놓여 있고 마지막 남은 수위 무사 9명이 전부 그곳에 서서 사마귀 앞발 같은 얇은 칼을 들고 싸늘한 눈으로 철안 일행을 보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발로 거대한 소기름 통을 밟고 있었다. 힘껏 차기만 하면 통 속 수백 근에 달하는 기름이 콸콸 쏟아져 들어갈 것이었다. 그리고 대충 화톳불에서 불 붙은 장작을 하나 주워 던지면 구멍 아래의 동굴은 화정(火井)이 될 터였다.
9명이나 남아 있었다. 철안은 이길 자신이 없었다. 다행히 어둠에 숨어 있지 않아서 이길 가능성은 조금 더 생겼다. 철안은 소기름 통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없이 상대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막속이 가문 사람은 다들 용감하군.”
수위 무사 9명의 우두머리가 말을 꺼냈다.
철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어떤 말도 불필요했다. 수위 무사들의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동요 없는 음산하고 냉담한 눈빛. 죽더라도 사명을 완수할 사람들이었다.
“무기를 버려라.”
수위 무사의 우두머리가 재차 말했다. 소기름 통을 밟은 무사가 살짝 힘을 주자 기름 통이 기울어지며 위태롭게 균형을 유지했다.
“칼 버려.”
철안의 말에 다들 날카로운 무기를 바닥에 던졌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여분의 칼과 가슴 앞의 작은 칼도 버렸다.
“등 뒤의 장도도 버려.”
철안이 등에 매고 있던 5척 장도는 아소륵의 영월이었다. 머리 위로 튀어나온 것이 깃대 같았다. 철안은 가슴 앞의 매듭을 풀고 영월을 바닥에 던졌다.
“신발 속의 비수도 버려야지.”
“훌륭하네.”
철안이 대꾸했다. 상대는 철안 일행이 가진 모든 무기를 간파했다.
철안이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모두가 철안을 따라 허리를 굽혔다. 그 순간 무리 뒤에 숨어 있던 철엽이 나타났다. 철엽의 시야가 돌연 확 트였다. 철엽은 한손으로 기병노를 들고 곧장 방아쇠를 당겼다. 방아쇠에서 전해지는 이상한 느낌에 철엽은 이 공격이 완벽하게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스며든 땀에 노의 기괄이 헛돌면서 화살이 활송 장치1)를 떠나지 못한 것이다.
“형!”
철엽이 소리쳤다.
기름통이 넘어지고 소기름이 곧장 지하 동굴 깊숙이 콸콸 쏟아졌다.
철안은 마지막 기회가 남았다는 것을 알았다. 불씨가 던져지기 전에 철안은 몸을 숙여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무기, 영월을 잡았다. 철안은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돌격했고 칼집은 알아서 벗겨졌다. 칼자루는 주인의 위험을 감지한 듯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철안은 이를 악물고 칼자루에서 전해지는 무시무시한 살기를 참아냈다. 철안의 눈에는 상대측 우두머리 한 사람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우두머리는 칼끝의 갈고리로 불붙은 장작 하나를 걸어 올렸다.
이미 늦었다. 철안과 우두머리 사이의 거리는 너무 멀었다. 우두머리는 비아냥거리듯 웃으며 장작을 동굴 입구로 들어 올렸다. 그 불빛이 예리한 칼날처럼 철안의 눈을 찔렀다.
우두머리는 적을 농락하고 흡족해하면서 손목을 휙 털어 장작을 떨어뜨렸다.
순간 철안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피곤해지면서 이대로 다 멈추고 싶었다. 철안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둠 속으로 불씨가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불이 맹렬하게 솟구쳐 올랐다. 화산이 폭발하는 듯하기도 하고 거대한 용이 바닷속에서 숨을 내뱉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 사나운 화염 속에서 인영 하나가 공중으로 솟아오르더니 수중의 칼을 가로 휘둘러 우두머리의 두개골을 베어냈다. 그 인영은 소기름이 뭍어 불타고 있는 새빨간 설면자 장포를 휙 던져 버리고는 말없이 수위들 가운데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불타는 지하 굴을 바라보았다. 불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주위로 사마귀 앞발 같은 얇은 칼을 가진 자들이 있는데도 그는 피하지 않았다.
불빛에 벌거벗은 상반신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수위 무사들은 감히 그에게 공격을 가하지 못했다.
“주상…… 아직 살아계셨군요?”
철안은 웃고 싶었지만 웃을 수가 없었다. 철안은 너무 지쳤다. 과도하게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처럼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아소륵 파소이는 고개를 숙이고 ‘쇄룡정’ 안의 피가 다 말라버린 시체를 보았다. 늙고 하얗게 바랜 시체가 이글거리는 화염에 휩싸였다. 아소륵은 장포를 비틀었을 때 뚝뚝 떨어지던 새빨간 피를 생각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체온을 머금은 피가 아소륵의 손바닥을 따스하게 덥혔다…….
“주상! 칼 받으세요!”
철안이 큰 소리로 외치며 들고 있던 영월을 던졌다.
아소륵은 공중으로 훌쩍 뛰어오르며 칼자루를 잡았다.
미어지는 슬픔이 아소륵을 완전히 뒤덮었다. 그를 허물어버리고도 남을 만큼 강렬한 아픔이었다. 마음속에 숨어 있던 분노한 늑대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아소륵의 심장을 꿰찔렀다.
장도가 회전하며 허공에서 가장 완벽하고도 가장 스산한 호를 그렸고 머리 8개가 동시에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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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건을 미끄러뜨리듯 이동시키는 장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