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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표범의 혼(豹之魂) (5)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순간들이 온다. 둘 중 한 사람만 살 수 있는데 너는 그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지. 이 세상은 그렇게 잔혹하다……. 넌 아직 어려서 선택할 수 없을 테니 이 할아비가 대신 선택했다. 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안다. 나는 이미 나를 통제할 수 없게 되었고 이는 곧 죽는다는 징조다. 이 선택은 내게 아주 간단한 문제였다.”
흠달한왕은 소리 내지 말라며 피가 묻은 손가락을 아소륵의 입술에 댔다.
“앞으로 울 시간은 많다. 하지만 지금은 절대로 아니야. 네가 지금 울면 이 할아비의 죽음이 헛수고가 된다. 이곳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가르쳐주마. 30년도 더 전에 생각했지만 그때는 물이 없었다. 물이 생겼을 때는 지하 궁전으로 옮겨졌지.”
흠달한왕의 나직한 목소리에는 사람을 고무시키는 용기가 서려 있었다. 그의 용기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고 차분해지게 만들었다. 죽음에 직면해서도 무신 같은 흠달한왕은 상대에게 신뢰를 주었다.
아소륵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네 겉옷을 벗어서 한 가닥으로 비틀어라. 팽팽하게 죌수록 좋다.”
아소륵은 흠달한왕이 시키는 대로 했다. 명주솜으로 만든 장포는 재질이 얇고 가벼워 비틀어 돌리자 비단 줄 같았다.
“쇠창살 두 개에 두르고 천천히 꼬아서 비틀어라. 힘을 많이 쓸 필요 없다.”
아소륵은 조심스레 해보았다. 불현듯 단순한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장포를 꼬아 만든 밧줄은 가장 단순한 기괄이었다. 천천히 줄을 비틀어 조이면 쇠창살 두 개가 서로 가깝게 붙는다. 일단 이웃하는 쇠창살 두 개가 구부러지면 아소륵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는 틈이 만들어진다. 아소륵은 체구가 우람하지 않으니 살아남을 기회가 생긴 것이다.
“냉단어린강은 갑주를 만드는 데 쓰는 강철이다. 부드럽고 질기기 때문에 구부러뜨려서 그 힘을 무력화(無力化)할 수 있지. 네 칼날은 쇠창살을 못 자르지만 부드럽고 단단한 것은 창살을 당겨 구부릴 수 있다. 다만 물이 필요하다. 명주솜은 쉽게 찢어지지만 물에 적시면 매우 질겨진단다. 동륙인은 명주솜을 풀에 담가 햇빛에 말린 뒤 연갑옷의 갑옷 조각을 만들지. 바로 그 이치다.”
“물요?”
아소륵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벌써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지 오래였다. 입속이 말라 터져서 침도 나오지 않았다.
“내 피가 굳기 전에 써라. 충분할 게다.”
아소륵의 눈을 보며 침묵하던 흠달한왕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가슴의 칼을 뽑았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섬뜩한 소리와 함께 피가 흠달한왕의 발아래 돌 웅덩이로 흘러들었고 흠달한왕은 힘 없이 쓰러졌다.
아소륵은 달려가 흠달한왕을 꼭 끌어안았다. 점점 심박 소리가 잦아들었다. 이 소리가 멎으면 아소륵 품의 이 몸뚱이는 영원히 깊은 잠에 빠져들어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두 번 다시 아소륵과 이야기도 나누지 못할 것이다. 아소륵은 너무 힘들었다. 힘들어서 울음도 나지 않았다. 맑고 서늘한 달빛이 머리 위의 틈으로 새어들었다. 한기가 사방에서 그의 몸을 잠식해 들어왔다. 곧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아직 하지 못한 일이 너무 많았다. 흠달한왕에게 동륙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도 다 하지 못했고 할머니는 어떤 분이셨는지도 묻지 못했다. 한때 풍염 황제를 무찌른 전설적인 영웅이었고 전쟁의 불길이 초원 곳곳에 번지던 전설적인 시대를 겪은 사람이었다. 동륙의 이야기꾼들이 흠달한왕을 만난다면 미친 듯이 기뻐하며 그의 소매를 붙잡고 진짜 풍염 황제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의 철사거는 뭐가 달랐는지, 풍염 황제에게서 승리를 거둔 비밀 무기는 무엇이었는지 물었으리라…….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알 수 없게 되었다. 흠달한왕은 죽고 그의 영혼은 일찌감치 사라져버린 시대를 쫓아갔으니.
시간이 너무 짧았다. 손을 잡을 겨를도 없을 만큼, 따스한 말 몇 마디 건네지 못할 만큼, 할아버지라고 몇 번 부르지도 못할 만큼 짧았다.
아소륵은 과거 지하 궁전에서 벽에 기대 머리 위의 어둠을 올려다보던 그때, 흠달한왕이 왜 자신에게 반달 천신의 신화를 이야기해주었는지 불현듯 이해가 되었다. 흠달한왕은 수차례에 걸쳐 방대하고 피비린내 나는 신화를 나누어 아소륵의 머릿속에 주입했다. 백의가 자신의 처세 경험을 단조롭고 기계적으로 소주 공주의 머릿속에 주입시킨 것과 똑같았다. 만남의 시간이 너무 짧기 때문이었다. 이것들을 외우게 한 이유는 훗날 쓸모가 있어서였다. 어린 시절 그 가르침에 담긴 깊은 뜻을 깨닫게 되고서야 그것들을 가르쳐준 이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 된다. 그러나 이를 깨달았을 때 이미 그들은 아주 멀리 떠났거나 죽었다. 다른 이들의 할아버지는 손자들과 함께 밥도 먹고 농담도 하고 말도 타고 활도 쏘면서 침상에서 늙어 죽을 때까지 긴긴 세월 동안 수십 년간 쌓아온 지식을 전수해준다. 그러나 아소륵의 할아버지는 그리 하지 못했다. 흠달한왕은 시간이 없었다. 신화에 모든 내용을 담아서 호통쳐가며 아소륵이 가슴에 새기도록 했다. 흠달한왕은 신화를 이야기하면서 무시로 이별의 시간을 따져보았으리라.
이제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되었다, 영원히.
아소륵 품의 흠달한왕이 꿈틀하더니 눈을 떴다. 메마르고 표독스럽던 눈동자가 갑자기 촉촉하게 반짝였다. 더는 무서워 보이지 않았고 아이처럼 맑고 투명한 빛이 감돌았다.
흠달한왕은 아소륵을 보면서 아소륵의 얼굴을 어루만지려는 듯 멍하니 손을 내밀었다. 흠달한왕이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금빛 햇살이 얼굴에 흩뿌려진 듯했다.
“아흠막도…… 나를 용서해주겠소?”
흠달한왕이 아소륵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한껏 기대에 부풀고 무척 진지한 모습이었다.
아소륵은 지금 흠달한왕이 누구를 보고 있는지 알았다. 임종 직전 보이는 환상 속에서 아리따운 동륙 소녀가 흠달한왕을 향해 걸어갔다. 금빛 햇살이 쏟아지는 초원을 걸으며 흠달한왕을 끌어안으려는 듯 두 팔을 벌렸다. 아소륵은 생김새가 만족인 같지 않고 동륙 소년 같다는 이야기를, 아소륵의 존귀한 할머니 아흠막도 대연지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한두 번 들은 게 아니었다. 아버지 여숭이 아소륵을 애틋해하면서도 가까이 하려 하지 않았던 이유도 그래서였다. 아소륵의 얼굴을 보면 가슴 아픈 과거가 떠오르는 까닭이었다.
아소륵은 문득 흠달한왕이 지하에서 어떻게 짐승처럼 30년을 넘게 살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마음속에 떨쳐버리지 못한 일이 남아있어 이대로 죽을 수 없었던 것이다. 생에 가장 큰 업적은 풍염 황제를 물리친 것이고 그 대가로 얻은 가장 큰 전리품은 백명의라는 이름의 여인이었다. 흠달한왕은 이 여인에게 ‘아흠막도’라는 이름을 주었다. 금빛 햇살 같은 그 여인은 피비린내로 가득한 흠달한왕의 삶을 환하게 밝혀주었기 때문이었다. 반달 천신은 흠달한왕에게 진귀한 청동의 피를 내려주고 평생 살육의 어둠 속에서 살아가게 했다. 남들 눈에는 찬란하게 빛나는 영웅이지만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그는 금빛 태양이 어둠을 가를 때까지 빛을 찾아 부단히 날갯짓을 하는 한 마리 나방이었다. 흠달한왕은 불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처럼 용감하게 달려갔지만, 빛은 그의 어두운 세상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집어삼켜졌다.
“아흠막도, 나를 용서해 주겠소?”
흠달한왕이 또 물었다.
“용서할게요.”
아소륵은 고개를 숙여 노인의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노인은 아소륵의 할아버지, 청양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 중 하나인 여과 납과이굉가 파소이였다.
“참…… 좋구나!”
영웅의 마지막 말이었다.
“막아라! 저들을 막아! 내 말을 가져와! 어서!”
탈극륵 가문 가주가 소리를 질렀다.
금장궁 밖에 있던 알적근, 탈극륵 가문의 무사들은 안으로 들어가려 애를 썼고 노예와 여인들은 필사적으로 금장궁 밖으로 뚫고 나오려했다. 아무도 금장궁 안에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금장궁 안은 이미 여응양의 전쟁터로 변했다. 그가 가는 곳에는 시뻘건 피와 사지가 날아다녔다. 우전, 군도, 뼈, 심지어 바람까지 여응양에게 근접한 모든 것은 날카로운 사자아에 절단 나버렸다. 여응양은 쉭쉭 공기를 가르는 칼 소리와 함께 사람이 가장 많이 밀집된 곳으로 돌진했다.
청동의 피의 힘은 다시 한 번 입증되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알적근 가문 가주는 신이 하사한 혈통을 과소평가했다.
파소이 가문의 노예와 소녀들도 제 주인보다 못하지 않았다. 이들은 갑옷도 입지 않고 사마귀 앞발 같은 기이한 형태의 얇은 칼만 손에 쥐고 있었다. 무사들과 스쳐지나갈 때면 그들이 어느 각도에서 칼을 휘둘렀는지 똑똑히 보이지 않았지만 붉은 꽃이 활짝 피듯 핏방울이 뿌려졌다. 매 일격은 뼈에 닿을만큼 깊고 치명적이었다. 수비하지 않고 살육만 하는 이 도술(刀術)은 적에게도 본인에게도 극도로 흉악한 기술이었다.
탈극륵 가문 가주는 근위병의 호위 아래 군마로 달려갔다. 금장궁의 전세가 어떻든 이곳에서 벗어나 알적근 가문의 영채로 가야 했다. 그곳에 자신들의 대군(大軍)이 모여 있으니 북도성의 형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탈극륵 가문 가주가 말고삐에 손이 닿은 순간 새카만 화살이 호위 무사의 틈을 뚫고 들어와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탈극륵 가문 가주는 저를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 보려고 힘겹게 몸을 돌렸다.
합로정 가문의 가주 액일돈달뢰가 묵묵히 수중의 단노(短弩)를 던졌다. 거금을 들여 동륙에서 사들인 단노를 옷속에 오래 숨겨두었던 액일돈달뢰가 마침내 단노를 꺼내든 것이었다. 모두가 존귀한 합로정 가문의 가주에게 무방비한 사이, 일격에 명중시켰다. 눈에는 복수의 기쁨과 싸늘한 조소가 어려 있었다.
“어째서?”
탈극륵 가문 가주가 물었다.
“누가 첩자인지, 누가 내 아버지를 죽이려 했는지는 나도 가려낼 수 있다. 당신들은 우리 합로정 가문의 식솔들과 가축을 나눠가지려 했지? 이런 은밀한 꿍꿍이를 품었으면 너무 많은 사람이 알게 하지 말았어야지.”
액일돈달뢰의 말투는 의기양양하면서도 분노가 묻어났다.
“날 얕보지 마. 내가 나이는 많이 어려도 당신네들 속에 밀정을 심어둘 줄 알거든.”
“여응…….”
탈극륵 가문 가주는 그 사내에게 저주를 퍼붓지도 못한 채 눈밭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죽기 전까지 두려워하고 또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사내는 여응양이었다. 겨우 제 편이라고는 아우 하나뿐이었던 여응양은 북도성의 모든 귀족을 가지고 놀았다. 여응양은 누구와도 손을 잡을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는 모든 사람이 사용한 후 반드시 파괴해 버리는 무기였다. 오래 전 알적근, 탈극륵 가문 가주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환담을 나누면서 이미 마지막 수를 준비해두었던 것이다. 여응양은 흔쾌히 합로정 가문의 가축과 인구를 나누어주겠다고 하면서도 대외적으로는 함구했다. 득의양양한 두 가주가 이 소식을 제 수하에게 말했을 때 여응양의 밀사는 액일돈달뢰에게 경고를 전했다. 여기에 액일돈달뢰가 심어둔 밀정이 전한 소식이 더해지며 여응양은 성공적으로 두 가주를 ‘첩자’로 만들었다.
늑대왕이 사람은 제대로 골랐다. 여응양 욱달한 파소이는 이 세상을 뒤엎기 위해 태어난 사내였다.
금장궁 안에 있는 여응양의 격렬한 포효성을 들으며 액일돈달뢰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중얼거렸다.
“아버지, 아버지의 복수는 했는데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네요…….”
액일돈달뢰가 돌연 패도를 뽑아들고 가로 휘두르며 소리쳤다.
“저들을 죽여라! 알적근, 탈극륵 두 가문 사람들은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내내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있던 합로정 가문의 무사들이 맹호처럼 돌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