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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표범의 혼(豹之魂) (4)
알적근 가문 가주가 버럭 화를 내며 안색이 돌변했다. 그러나 파갑전을 손에 넣게 된 경위를 설명할 수 없었다. 당초 그는 비밀리에 여응양을 지지하던 3왕자파였고 그 덕분에 태과이 칸에게서 값비싼 무기를 얻을 수 있었다.
“존귀한 알적근 가문 가주, 장사꾼인 그대는 늘 동륙인과 거래를 하지. 그대의 모든 행위는 이익을 좇을 뿐이오.”
여응양이 고개를 들고 술잔의 술을 마셨다.
“하여 난 그대의 행동이 전혀 놀랍지 않소.”
“형님! 더 말 섞지 말고 비키십시오!”
여하가 고함쳤다.
“귀목, 비켜 있어라. 내 말대로 해.”
여응양이 알적근 가문 가주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알적근 가문 가주가 내게 화살을 쏘라고 명령할 수 있을까? 나를 죽이면 북도성에서 파소이 가문의 씨를 말려버릴 수 있겠지. 첩자가 가장 바라는 일이 아니겠느냐? 과연 그럴 배포가 있는지 봐야겠다.”
금장궁이 적막에 휩싸였다. 합로정 가문의 무사들은 칼자루를 잡고 액일돈달뢰를 보호하며 천천히 철수했다. 알적근, 탈극륵 가문의 활 100개가 활시위를 팽팽히 당겼다. 여응양은 여전히 그곳에서 혼자 술을 따라 마셨다. 여응양의 칼처럼 매서운 시선이 알적근 가문 가주의 얼굴에 떨어졌다. 여응양은 도발하듯 웃었다. 느슨한 옷차림에 새카맣고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응양은 타고난 미남형은 아니었다. 그러나 100대의 날카로운 화살이 그를 똑바로 겨눈 지금 사람을 압도하는 묘한 기운이 배어나왔다.
알적근 가문 가주는 속이 타들어갔다. 여응양이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을 쥐고 있기에 아직은 죽일 수 없었다. 여응양이 늑대왕과 자신의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어야 했다. 여응양의 차분함에 그는 더욱 불안해졌다. 그가 마주한 사람은 몇 세대에 한 번 나오는 광전사였다. 여응양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다. 여응양의 몸에서는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었다.
모두가 땀을 흘렸다. 탈극륵 가문 가주도 살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에 빽빽하게 맺힌 땀방울이 서서히 흘러내렸다. 땀을 닦을 엄두도 나지 않았다. 금장궁 안의 어느 누구도 움직일 수 없었다. 활시위는 끊어질 정도로 팽팽하게 당겨져 아주 조그만 움직임에도 피를 부를 것이었다.
“겁쟁이.”
여응양의 잇새에서 겁쟁이, 세 글자가 튀어나왔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금 술잔을 들어 올리더니 천천히 옆으로 기울여 알적근 가문 가주처럼 남은 술을 바닥에 뿌렸다.
알적근 가문 가주는 오싹해졌다. 이는 분명 행동을 명령하는 암호였다. 어떤 행동일까? 이곳은 자신들이 완전히 봉쇄했으니 여응양은 사지에 몰린 처지였다.
그는 여응양의 눈빛에 지고 말았다. 이면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지닌 눈빛이었다. 저리 차분하게 100대의 화살이 제 몸에 쏘아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절대 있을 수 없었다. 여응양의 음모는 간파할 수 없지만 먼저 공격할 수는 있었다.
“발사!”
알적근 가문 가주가 큰 소리로 외쳤다.
여응양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파갑전 100대가 분노한 벌떼처럼 동시에 활시위를 떠났다. 인영 하나가 벌떼 같은 화살과 함께 여응양에게로 달려들었다. 여응양의 자리 주위로 먼지가 일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 넷이 땅밑에서 뛰어올라 사면 방패로 여응양의 사방을 가렸다. 양을 자르던 노예가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며 알적근 가문 무사들의 머리 위로 뛰어올라 그들의 어깨를 밟고 알적근 가문 가주에게로 바짝 다가갔다. 양을 자르던 노예가 사마귀 앞발 같은 얇은 칼을 평평하게 휘둘러 알적근 가문 가주의 목을 잘라냈다. 그 순간 모든 무사가 빈 활을 쥐고 있어서 아무도 그를 막을 수가 없었다. 여응양에게로 달려들었던 인영은 10개가 넘는 파갑전에 가슴과 복부를 관통당했고 여응양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 쓰러졌다. 그는 새빨간 피를 토하며 일어나려 애썼다. 그의 처절한 외침이 공기를 가로질렀다.
“형님!”
여응양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자신을 보호하는 검은 복장의 인물들을 밀쳐내고 맞은편 무사들이 일제히 화살을 쏠 위험도 감수한 채 쓰러진 이를 안으려 달려갔다. 그 사람은 여응양의 유일한 동복아우 여하 귀목 파소이였다. 하지만 고슴도치 같은 모습의 아우는 어떻게 안을 수조차 없었다.
“귀목! 귀목!”
여응양이 아우에게 대고 부르짖었다.
“내 비키라 하지 않았느냐! 시키는 대로 하라니까…….”
여하는 여응양의 목소리를 듣고 천천히 눈을 떴다. 여응양을 알아본 여하는 피에 물든 얼굴로 안도하는 미소를 지었다.
“형님, 괜찮으셨군요……. 제가 바보같았어요. 형님께서 다 대비하셨을 텐데……. 형님의 책략은 언제나 옳아요…….”
여하는 돌연 초조해하며 한 손을 내밀어 여응양의 도포 깃을 꽉 그러쥐었다.
“어서요! 서두르세요! 형님…… 저자들을 죽이십시오! 죽이세요!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저들의 영채로 소식이 전해지면 안 됩니다……. 형님께 소식을 전하는 자들이 있으니…….”
여하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눈동자에서부터 이미 생기가 흩어지고 죽음의 창백한 기운이 떠올랐다. 목에 힘이 빠진 여하는 힘없이 목을 뒤로 떨구었으나 손은 여전히 여응양의 옷깃을 그러쥐고 있었다.
“귀목…… 귀목!”
여응양이 재차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형님의 책략은 언제나 옳아요…….’
여하의 말이 여응양의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다 옳았을까? 다 옳은데 어떻게 이런 실수가 생기지? 다 옳은데 귀목은 왜 죽었을까?
여응양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여응양은 여하에게 용리에 관해서도, 자신이 어떻게 금장궁에서 저 늙은이 둘을 해결할지도 말해주지 않았다. 너무 신중한 탓에 전체 계획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권력을 장악한 사람에게 벗은 있을 수 없으므로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여응양은 동륙의 뛰어난 괴뢰사(傀儡師)처럼 수많은 줄을 조종하며 꼭두각시들을 명령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었다. 목려든 용리든, 심지어 알적근과 탈극륵 가문의 늙인이들도 한때는 그의 꼭두각시였다. 여응양은 자신이 상황을 장악하고 있다고 자만했다. 벗은 필요 없었다. 명령을 집행할 꼭두각시만 필요할 뿐이었다. 한데 왜 실수가 생겼을까? 어째서 수십년간 반항 한 번 한 적 없던 여하는 화살을 피하지 않고 그에게로 달려왔을까? 연기가 너무 진짜 같았나? 여하마저도 속을 만큼?
권력을 장악한 사람은 모두를 속여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가장 훌륭한 광대가 되어야 하고 가장 뛰어난 괴뢰사가 되어야 한다. 여응양은 모두 해냈다.
그런데 가장 아끼는 꼭두각시가 이렇게 망가져버렸다.
“너는 나와 끝까지 갈 것이지, 그렇지?”
“그럼요!”
여응양의 물음에 여하는 큰 소리로 대답했었다.
여응양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그러쥐었다. 머리칼을 묶었던 붉은 끈이 툭 끊어졌다. 여응양은 허리를 숙이고 격렬하게 마른기침을 해댔다. 내장을 전부 토해낼 듯했다. 두 눈이 빨개지고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렸다. 여응양은 갈라진 목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고통에 찬 것 같기도 하고 이리가 울부짖는 것 같기도 했다. 여응양은 여하의 손에 들려 있던 사자아를 가져와 입고 있던 자색 도포를 갈가리 찢었다.
“어떻게…… 어떻게…… 여하를 죽일 수 있지?!”
여응양은 고개를 쳐들고 거친 숨바람을 토해내며 소리를 질러댔다.
신이 하사한 어둡고 피비린내 나는 힘이 여응양을 완벽히 뒤덮었다. 야수가 가슴속에서 깨어나며 포효했다. 여응양은 인간적인 연민과 자비를 잃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알적근과 탈극륵 가문의 무사들에게로 달려들었다. 두 번째 화살 비가 여응양에게로 쏟아졌지만 위해를 가할 수 없었다. 여수우의 피부는 강철처럼 팽팽하게 당겨졌고 근육도 딴딴하게 얽혀들었다. 측면에 맞은 화살은 미끄러졌고 정면으로 날아온 화살은 사자아에 모조리 쓸려나갔으며 허벅지에 딱 한 대 명중했다. 그러나 여응양의 속도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피를 뚝뚝 흘리며 화살을 뽑아내 제일 먼저 마주친 자의 이마에 꽂았다. 그리고 그자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칼을 가로로 휘둘러 두개골을 잘라냈다.
양고기를 얇게 자르던 노예는 혼란한 틈에 물러났다. 노예는 변신을 위해 사용했던 점토와 안료를 떼어내고 칼로 살을 도려낸 듯한 얼굴을 드러냈다. 용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런 얼굴은 아니었음을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그는 오랜 세월 약을 발라 얼굴의 살을 없앴다. 이래야만 점토와 안료로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위장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주상의 명령이 내려졌다. 502명 중 한 명도 살려두지 마라.”
용리가 담담히 말했다.
양을 굽던 노예와 춤을 추던 소녀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체의 표정을 지우고 각기 다른 곳에서 사마귀 앞발 같은 얇은 칼을 뽑았다.
아소륵은 묵묵히 수중의 단도를 보았다. 순철(純鐵) 재질의 단도는 해일 같은 세찬 충돌에도 무시무시한 소리가 나지 않았다. 힘이 극치로 단련되었을 때 두 칼이 맞부딪쳤다. 아소륵의 칼은 종이를 베듯 손쉽게 잘려나갔고 단면은 거울처럼 매끈했다.
그러나 흠달한왕의 칼은 흠 하나 없었다. 같은 화로의 쇳물을 쓰고 같은 기교로 담금질한 칼이지만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왔다.
“할아버지…….”
아소륵이 나직이 그를 불렀다.
“외웠느냐?”
“네.”
흠달한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몹시 힘든 모양이었다. 흠달한왕은 천천히 바닥에 앉아 왼쪽 가슴의 상처를 눌렀다. 왼쪽 가슴에서 새빨간 피가 콸콸 흘러나와 발아래의 돌웅덩이에 서서히 모여들었다. 흠달한왕은 완전무결한 칼을 자신의 심장에 찔러넣었다. 그의 칼은 아소륵의 칼을 일격에 베어낸 뒤 놀라우리만치 아름다운 호선을 그리며 되돌아왔고 둥지로 돌아오는 제비처럼 흠달한왕 자신의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정확하고 날카로우며 깔끔했다. 칼날은 등을 뚫고 나와 완전히 그의 심장을 망가뜨렸다.
“소리 내지 마라. 위에 있는 놈들이 들으면 안 된다. 오늘밤이 네가 이곳을 떠날 기회다.”
흠달한왕은 아소륵의 눈을 보며 또렷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소륵은 달려가 제 할아버지를 끌어안았다. 목 놓아 울고 싶었지만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흠달한왕은 마지막 힘을 다해 눈을 부릅뜨고 엄하게 경고했다. 야수처럼 포악하던 표정은 말끔히 사라지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 돌아왔다. 흠달한왕은 한 집안의 주인다운 위엄을 띤 얼굴로 아소륵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소륵…… 슬퍼해도 되지만 울어서는 안 된다. 너는 우리 청양의 새끼 표범이다. 네 몸에는 신이 하사한 피가 흐르고 있어. 너의 부족민은 네가 신이 계시한 땅으로 인도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흠달한왕이 나직하게 말을 이어갔다.
“나는 이미 늙었다. 이리 사내답게 자기 가축과 가족을 지키며 죽어가니 매우 기쁘구나.”
아소륵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는 하지 못했다. 온 힘을 다해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간신히 막고 있었다. 하지만 후두가 계속 경련을 일으켜 몹시도 아팠다. 애달픈 소리를 내보내지 못해 목이 터질 듯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