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349화 (349/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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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표범의 혼(豹之魂) (3)

철안은 움푹한 지대에 몸을 숨겼다. 곁에는 막속이 가문의 청년들이 있었다. 이 너머는 북도성에서 가장 큰 황무지였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고 겹겹이 우뚝 솟은 바위에 땅굴 몇 개가 전부였다. 동운산 아래로 통하는 땅굴로 몰래 드나들 수 있지만 동굴 지도를 가진 사람은 없다고 했다. 또 동굴 깊숙이 들어갔다가 못 나온 사람도 있다고 했다. 선대 대군은 재위 시절 표면의 땅굴 몇 개를 정리하고 쇠창살을 설치해 가장 중요한 죄인을 가두는 데 사용했다. 그곳은 북도성 내의 유일한 감옥이기도 했다.

감옥 입구에는 무사 두 명이 서 있었고 그 외에는 고요했다. 그들의 머리 위로 비추는 달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철안은 허리 뒤춤의 기병노를 떼어내고 아우에게 눈짓을 했다. 철엽도 기병노가 하나 있었다. 두 개 다 식연이 하당에서 개조해 귀복영 무기로 사용했던 것으로 사정 거리가 100보에 달했으며 한 손으로 화살을 쏠 수 있었다. 독을 묻힌 화살 두 대가 입구를 지키는 무사 둘을 조준했다.

“동시에 쏜다. 소리 내지 못하도록 목구멍을 쏴.”

철안이 나직이 말했다.

“알겠어.”

철엽이 씩 웃어보였다. 칼솜씨는 철안보다 못하지만 궁술과 기마술은 철안의 스승급이었다.

“발사!”

철안이 나직이 외쳤다.

화살 두 대가 동시에 활시위를 떠나 무사들의 목구멍에 명중했다. 저들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식연이 설계한 화살은 바람에 명징한 소리를 내지 않았고 화살대도 까맣게 칠해서 밤에 쏘면 목표물이 알아채지 못했다.

“식 장군 혹시 척후 출신인가? 만들어내신 게 전부 소리 없이 사람을 죽이네.”

철엽이 빙그레 웃었다.

“가자!”

재차 명령을 내린 철안은 패도를 뽑고 움푹한 지대에서 훌쩍 뛰어올랐다.

철엽과 나머지 무사들도 신속하게 철안의 뒤를 따랐다. 기병노에 새 짧은 화살을 채운 철엽은 한 손에는 노를, 한 손에는 칼을 들었다. 달빛 아래 새카만 갑옷을 입은 대오가 몸을 낮추고 황무지를 빠르게 지나 입구로 돌진해갔다.

입구에 이르러 철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가기도 전에 발각되어 안에 있던 이들이 달려 나와 막을까 봐 걱정했었다. 그럼 기습은커녕 신비한 ‘쇄룡정’을 만져보기도 전에 상대방은 이들 형제의 주인을 죽이고도 남았다. 화살에 맞아 죽은 무사 둘이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 둘은 허리춤의 칼자루를 아직도 쥐고 있었다.

“따라와!”

철안이 뒤돌아 그들을 불렀다.

“형!”

철엽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경고였다. 극도로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면 철엽이 절대 그리 소리칠 리 없었다. 이들 형제는 남회의 군대에 숨어 수없이 호흡을 맞추는 연습을 한 터라 한 몸처럼 교감했다. 철안은 망설임없이 웅크리고 앉아 머리를 숙였다. 그 순간 철엽의 화살이 활시위를 떠났고 기이한 형태의 칼이 철안의 머리 위를 스쳐지나갔다. 죽었어야 했던 무사 둘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이들이 완전히 무방비한 사이 기습했다. 철엽의 화살은 그중 한 명의 이마를 그대로 꿰뚫으며 반쯤 파고들었다. 화살에 맞은 무사는 휘청하더니 고꾸라졌다. 다른 무사 하나는 철안이 앉았다가 일어나면서 칼로 걷어 올리듯 가슴과 복부를 베었다. 그 무사는 상처를 움켜쥐고 비틀비틀 몇 걸음 물러나다가 눈밭에 쓰러졌다. 철엽이 철안의 곁으로 달려왔다.

“빌어먹을! 왜 안 죽었지?”

철안은 칼로 시체 한 구의 목을 누르고 그자의 옷깃을 젖혔다. 이들 형제는 처음 보는 보호대가 시체의 목에 채워져 있었다. 만져보니 상어 가죽 같은데 더 견고하고 질겼다. 철안은 시체의 전신을 신속하게 더듬어보았다.

“우리와 다른 갑옷이야. 연갑의 한 종류고 급소만 방호가 되어 있어. 동륙 물건 같아.”

“칼도 이상해.”

철엽은 칼을 살펴보았다. 칼몸이 좁고 얇았으며 칼날에 구부러진 갈고리가 달려 있었다. 낫처럼 생긴 사마귀의 앞발 같았다.

“어느 가문의 무사지?”

“모르겠어.”

철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상관하지 말고 공격하자!”

철엽은 그 칼을 내던지고 기병노에 다시 화살을 채우며 말했다.

“우리 들켰어.”

지하 동굴 안에서 빠른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철엽이 철안을 부른 소리가 내부의 호위들을 놀라게 한 모양이었다.

“주상께서 부디 살아 계시길 빌어보자.”

철안은 한 손에 칼을 들고 다른 손으로 등의 홰를 뽑아 구리관 속의 불씨로 불을 붙였다.

그 시각, 금장궁 안. 연회 분위기가 고조되고 술 향기가 사방에 퍼졌다. 노예 하나가 다부진 근육을 드러낸 채 금장궁 한가운데에서 양고기를 자르는 현란한 칼솜씨를 선보였다. 한손에 살아있는 새끼 양의 다리를 하나 붙들고 다른 손으로 허공에서 얇은 칼을 휘둘렀다. 이리저리 칼이 휘둘러지면서 칼빛이 번쩍였다. 소녀들이 노예의 앞, 뒤, 좌우에 은 쟁반을 놓았다. 저며진 양고기는 나비처럼 흩날리며 은 쟁반에 떨어졌다. 노예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더니 얇은 칼을 내던지고 양탄자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여응양을 향해 두 손으로 새끼 양을 높이 들어올렸다. 노예의 손에 들린 양은 살점이 다 도려내져 뼈만 남아 있고 머리만 흠 하나 없이 온전했다.

금장궁에 박수 소리가 터졌다. 노예는 조심스럽게 양의 입을 비틀어 열고 혀를 뽑아 얇게 자른 뒤 은 쟁반 4개에 한 점씩 놓고 독주를 뿜어 불을 붙였다.

소녀들이 지글지글 소리가 나는 새끼 양 고기를 탁자에 내려놓았을 때 얇게 저며진 고기는 벌써 다 익어서 신기한 냄새를 풍겼다.

“불에 지진 양고기?”

알적근 가문 가주가 혀를 차며 감탄하고는 은도(銀刀)로 양의 혀를 찍어 입에 넣고 우걱우걱 씹었다.

“맛좋은 음식에 이런 심오한 칼솜씨까지 볼 수 있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맛 좋은 음식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만 양을 써는 칼솜씨가 뭐 별겁니까?”

여하가 벌떡 일어나 칼자루를 잡았다.

“술도 마실 만큼 마셨고 여인의 춤도 볼만큼 봤으니 사내의 칼춤을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만족 연회에서 칼춤은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말에 알적근 가문 가주의 눈이 돌연 가늘어졌다. 그는 무의식중에 탈극륵 가문 가주를 흘긋 보았고 탈극륵 가문 가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여응양은 여전히 자신의 음흉한 야심을 드러냈다. 여하의 칼솜씨는 북도성에서 유명했다. 칼춤을 핑계로 다가와 그들을 벨 수도 있었다. 단순하지만 상대가 무방비할 경우 쉽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계획이었다.

“노예의 칼솜씨가 4왕자의 관심을 끌었나봅니다?”

알적근 가문 가주가 웃으며 물었다.

“4왕자의 칼춤이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지요. 마지막으로 4왕자의 칼춤을 본 것이 아마 선대 대군께서 계실 때였지요.”

“맞습니다, 맞아요! 모처럼이군요!”

탈극륵 가문 가주도 웃으며 맞장구쳤다.

여하는 말없이 알적근 가문 가주를 쳐다보며 칼자루를 쥐고 한 걸음씩 다가갔다.

알적근 가문 가주는 내내 웃으면서 힘껏 손뼉을 쳤다. 금장궁 안에서 박수치는 사람은 알적근 가문 가주뿐이었다. 탈극륵 가문 가주는 소리 없이 자기 가문의 무사들 가운데로 물러났고 무사 50명은 빈틈없이 그를 둘러싸고 호위했다. 액일돈달뢰도 알적근 가문 가주를 보면서 저 외로운 박수 소리에 어떤 불길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아챘다.

보이지는 않지만, 명료하고 단조로운 박수 소리가 금장궁 밖으로 전해지자 그곳을 지키고 있던 알적근, 탈극륵 가문의 무사 400명이 동시에 패도를 뽑아들고 횃불을 밝혔다.

“가주 두 분 외에는 누구도 이 장막에 발을 들여서는 안 되며 한 사람도 나올 수 없다.”

무사들의 우두머리가 명령을 내렸다. 그는 금장궁 안의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극히 작은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고 무사들도 귓속말로 명령을 전달했다.

멀리 알적근 가문의 영채 안. 완전 무장을 한 알적근과 탈극륵 가문의 무사 1만 7천 명이 이미 정렬을 마쳤다. 이 군대를 이끄는 사람은 알적근 가문의 차남과 탈극륵 가문의 장남이었다. 멀리 금장궁 방향의 불빛이 그들의 눈을 환하게 비추자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사기가 고조되었다. 이 커다란 공연의 종막(終幕)이 곧 시작되면 누군가는 오늘밤 북도성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었다.

“저쪽의 불빛이 꺼지면 금장궁을 완전히 소탕한 거라고 했던가?”

탈극륵 가문의 장남이 나직한 목소리로 그들이 받은 명령을 되뇌었다.

“불빛이 다 꺼지면 두 분이 돌아가신 겁니다. 그때 우리는 파소이 가문과 합로정 가문의 모든 사내를 죽이고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거예요.”

알적근 가문의 차남이 싸늘하게 말했다.

“위험할 걸 알면서도 성 밖으로 도망치지 않으려 하다니.”

탈극륵 가문의 장남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적근 가문의 차남이 오만하게 말했다.

“선조들의 가업은 이렇게 칼날 위에 조금씩 쌓여 만들어진 거잖습니까? 아버지께서 형님과 아우를 내보낼 때 나는 안 가겠다 했습니다. 우리 알적근 가문의 사내는 최후의 순간까지 들개처럼 살겠다고 도망치지는 않을 겁니다!”

“4왕자, 너무 가까이 오시는군요.”

알적근 가문 가주가 돌연 박수를 멈추더니 여하의 눈을 응시하며 담담히 말했다.

여하는 계속 다가가고 있었다. 사자아가 칼집에서 진동하며 불안을 조장하는 소리를 일으켰다. 여하는 그의 스승이었던 목려처럼 칼을 쥐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알적근 가문 가주는 목려의 누르께한 눈이 떠올랐다. 압박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덮쳐오는 위험한 기운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는 더 참을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금 술잔을 들고 남은 술을 앞에 뿌렸다.

두 가문의 무사 100명이 동시에 일어나 활을 뽑고 우전을 얹어 활을 가득 당겼다. 가늘고 긴 삼각형 화살촉은 위험한 녹빛을 띠었다. 화살 100대가 동시에 한 사람을 겨누었다. 여하가 아닌, 여응양이었다. 액일돈달뢰가 놀라 일어났다. 알적근 가문 가주는 물러서라며 손을 내둘렀다. 알적근, 탈극륵 가문의 무사들이 신속하게 위치를 옮겨 금장궁 입구를 막았다. 양을 굽던 노예와 춤추던 소녀들은 그들에게 밀려 밖으로 물러났다. 소녀들은 두려움에 비명을 질렀다.

“파갑전? 어디에서 났소? 이러는 이유는 또 뭐고?”

여응양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여전히 제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술잔을 들었다.

“내가 조용히 있었다면 4왕자의 칼이 바로 내 심장을 겨누었겠지요?”

“우리 사이에 그리 큰 원한이 있던가? 얘기 끝난 거 아니었소? 그대들이 성문을 열고 투항하자기에 나도 동의했는데 내가 왜 그대들을 해치려 한단 말이오?”

여응양이 고개를 숙이고 술에 거꾸로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액일돈달뢰, 파소이 가문의 사내라 하는 여응양이 어떤 자인지 말해주마. 저자는 삭북인이 보낸 첩자다. 놈은 자기 형이 죽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래야 대군의 옥좌에 앉을 수 있으니까! 저자가 배후에서 모든 일을 꾸미고 우리 모두를 죽이려 한다!”

알적근 가문 가주가 냉소를 던졌다.

“우리는 이리 무자비한 야심을 지닌 자를 믿을 수 없다.”

여응양이 소리 없이 웃었다.

“맞소. 나는 북도성을 원하오. 이 성을 부흥시키고 싶고 청양의 깃발을 온 천하에 꽂고 싶소. 그게 잘못 됐소? 존귀한 알적근 가문 가주, 성문을 열고 늑대왕에게 비굴하게 무릎을 꿇는 일은 그대가 줄곧 바라던 일이 아니오? 늑대왕에게 정보를 흘린 것도 그대겠지? 그 파갑전도 늑대왕이 귀궁의 시체에서 수집해 전해준 것은 아니오? 그대가 북도성 성문을 장악하고 있으니 뭐든 할 수 있겠지.”

“여응양, 후안무치한 발언을 잘도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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