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347화 (347/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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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표범의 혼(豹之魂) (1)

1월 보름, 해질녘.

철안은 마지막으로 모든 장비를 다시 한번 검사했다. 갑옷과 투구, 밧줄, 패도, 장화 속 비수, 밀폐한 구리관 속의 불씨, 동륙에서 가져온 기병노까지 확인했다. 철안은 등에 짊어진 홰를 더듬어보았다. 소기름에 흠뻑 적신 홰 4자루는 밧줄로 비끄러매 두어서 좌우 허리춤의 칼처럼 언제든 손쉽게 뽑을 수 있었다.

“준비 다 됐어?”

철안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같은 장비를 갖춘 청년 30명이 일제히 일어서며 대답했다.

“네!”

철안은 그들 앞을 지나가며 하나하나 장비를 살펴보았다. 모두 막속이 가문의 용감한 청년들이었다. 그중에는 철안의 아우 철엽도 있었다.

“오늘 할 일은 딱 하나야. 대나안을 구하는 거. 오늘밤 금장궁에서 큰 연회가 열려서 인력은 최대한 금장궁에 동원될 거야. 우리에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야. 지하 동굴에 들어가는 방법은 이미 알아놨어. 성 서쪽의 버려진 황무지 안이야. 동굴 안이 무척 어둡다고 하니까 안에서 횃불을 켤 수 있도록 홰가 젖지 않게 주의해. 길을 막는 자는 모두 죽여. 목숨을 건 상황에 자비를 베풀 여유 따윈 없어. 아무 소리도 내지 마. 저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대나안과 흠달한왕이 있는 감옥에 소기름을 쏟아붓고 불태워 죽일 거야. 그러니까 살금살금 다가가서 먼저 소기름 통을 관리하는 놈부터 죽여야 해!”

“네!”

청년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난 번지르르한 말 같은 건 못해. 너희는 죽을 수도 있어. 하지만 이 철안 파로 막속이가 맨 앞에서 돌격할 거야. 이건 청양부 사내로서 해야 할 일이야. 도살당하는 새끼 양처럼 삭북인의 손에 죽느니 한판 싸워보자!”

철안이 휙 손을 휘둘렀다.

“출발!”

청년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출발했다. 태양은 이미 지평선 아래로 내려앉았고 어둠이 곧 북도성에 드리울 터였다. 철안은 맨 뒤에 걸어가면서 앞사람의 눈 밟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철안은 고개를 돌려 동쪽 장막의 인영을 보더니 한동안 침묵했다.

“형, 왜 그래?”

철엽이 돌아와 물었다.

“아버지와 백부께 가서 인사를 드렸어야 했지만 그럼 두 분은 분명 못 가게 막으셨겠지. 우리를 걱정하실 거야.”

철안은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대오를 따라갔다.

해가 지고 금장궁의 연회가 시작되었다.

여응양은 버젓이 주인의 자리에 앉았고 좌우 양쪽의 상석에 알적근 가문과 탈극륵 가문의 가주들이 앉았다. 오른쪽 아랫자리에는 합로정 가문의 주인 액일돈달뢰가 앉았다. 합로정 가문의 선대 가주가 불행히도 전장에서 죽었지만 합로정 가문은 여전히 북도성에서 가장 강성한 가문이었다. 그러나 액일돈달뢰는 예의가 바른 청년이라서 나이 많은 두 가주에게 상석에 앉으라 공손히 청했고 이에 탈극륵 가문 가주는 무척 흡족해했다.

연회는 전보다 더 성대했다. 춤추고 노래하는 소녀나 술 시중을 드는 소녀의 수도 더 많아지고 음식도 더 푸짐했다. 씻겨서 가죽을 벗긴 새끼 양은 한 마리 한 마리 금장궁 뒤편 눈속에 묻어두었고 노예들은 양을 한 마리 주워다가 눈 녹인 물에 씻은 다음 꼬치에 끼우고 구웠다. 얼마나 많은지 평생 먹어도 다 못 먹을 것 같았다. 금장궁 안의 진귀한 그릇은 다 꺼내 이 귀한 손님들을 접대했다. 황금을 박은 비취 잔, 칼자루가 백은으로 된 고기 써는 칼, 무늬가 새겨진 거대한 은 쟁반도 있었다. 심지어 노예들이 고기를 굽는 데 쓰는 삼지창도 자루에 호박이 박힌 황동 제품이었다. 전부 모피와 준마를 주고 동륙에서 사들인 것이었다.

“대군의 보고(寶庫)에 앉아 음식을 먹는군요.”

희귀한 삼치회를 맛보던 알적근 가문 가주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대군의 보고임이 당연하오. 북도성에서 가장 존귀한 가주 세 분이 여기 있잖소. 여러분이야 말로 대군의 진정한 보물이라오.”

여응양이 웃으며 대답했다. 자색 비단 장포를 걸친 여응양은 가슴을 풀어헤치고 소매를 걷어올렸다.

알적근 가문 가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탈극륵 가문 가주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갑옷을 안 입었군.”

“광전사의 자신감인가?”

탈극륵 가문 가주가 차갑게 비웃으며 말을 던졌다.

“화살에 살가죽이 뚫리지 않고 배기나 보자고!”

탈극륵 가문 가주 뒤에는 무사 50명이 앉아 있었다. 완전 무장을 한 이들은 술을 마시지도 않고 음식에 손도 대지 않은 채 내내 허리춤의 장궁에 손을 얹고 있었다. 장막 밖에는 무사 200명이 더 있고 알적근 가문의 무사까지 더하면 부근에 500명이나 되었다. 인원수에서 절대적으로 우세했다. 액일돈달뢰도 겨우 100명밖에 데려오지 않았고 여응양 휘하에도 몇 명 없어 보였다.

알적근 가문 가주는 실눈을 뜨고 노예가 잘 구워진 새끼 양을 칼로 빠르게 도려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매미 날개처럼 얇고 윤기가 흐르는 살점이 은색 칼빛 속에서 잇달아 떨어져내리며 금세 한 접시가 완성되었다. 얇은 옷차림의 여인들은 고기가 담긴 접시를 손님들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는 여응양이 자신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려고 매우 조심한다고 생각했다. 고기를 써는 노예도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고, 근처에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옷을 입은 여인들뿐이었다. 여응양은 갑옷도 입지 않았고 어떤 무기도 지니지 않았다. 모든 면이 약간 의심스러울 정도로 지나치게 정상적이었다. 여응양 욱달한 파소이가 단지 그들에게 굴복한다는 뜻으로 주연을 열었다? 알적근 가문 가주는 믿지 않았다. 연회가 시작된 지 꽤 시간이 흘렀다. 여응양은 무척 참을성 있게 행동했으며 시종일관 삭북의 포위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이런 평온함에 알적근 가문 가주는 도리어 불안해졌다.

그러나 상황은 아직 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밖에 400명, 안에 100명이 있으니 어떤 이상한 낌새라도 보이면 즉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알적근 가문 가주는 자신이 이 평온함을 깨뜨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도 전장에 나가본 사람이었다. 적의 전술을 파악할 수 없다면 적이 확고히 발붙이지 못했을 때 맹렬히 돌격하는 것이 제일이었다.

알적근 가문 가주가 목청을 가다듬고 황금 술잔을 들어 올렸다.

“북도성의 무신(武神)께 한잔 올리게 해주십시오. 여응양 욱달한 파소이, 당신의 힘은 파소이 가문 역대 조상들처럼 천하무적입니다.”

여응양이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들었다.

“알적근 가문 가주, 환대해주어 고맙소. 알적근 가문은 영원히 파소이 가문의 귀한 벗이오.”

알적근 가문 가주가 잔을 내려놓고 말을 꺼냈다.

“우려되는 바가 있으니 삼가지 않고 모두가 있을 때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대군의 지위를 찬탈한 여수우가 죽고 북도성의 첩자도 제거되었는데 삭북부의 대군(大軍)이 아직 성 밖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서 고기를 먹고 고이심주를 마실 수 있지만 노예들은 굶어죽을 지경이지요. 대책을 강구해야지 않겠습니까?”

여응양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둘러 춤추던 소녀들을 물렸다.

“그건 나도 걱정하는 바요. 그래서 오늘 밤 여러분을 이곳에 불렀소.”

금장궁은 침묵에 빠졌다. 북도성 안의 4대 가문의 주인들이 모두 이곳에 앉아 있었다. 액일돈달뢰는 고개를 숙이고 탁자를 보았고 여응양은 묵묵히 입속의 고기를 씹었다. 탈극륵 가문 가주는 술잔을 빙빙 돌렸고 알적근 가문 가주는 그들을 한 사람씩 둘러보았다.

여응양이 목청을 가다듬자 알적근 가문 가주는 귀를 쫑긋 세우고 온 신경을 여응양에게 쏟았다.

“이 상황에 다시 전쟁을 치르는 건 소용 없죠. 제일 좋은 방법은 성문을 열고 삭북부와 교섭을 하는 겁니다.”

알적근 가문 가주는 깜짝 놀라며 아랫자리에 앉은 액일돈달뢰를 돌아보았다. 여응양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액일돈달뢰가 말을 끊고 들어왔다. 고개를 든 청년은 아주 큰 결심을 한 듯 눈을 반짝였다.

“그러나 삭북부가 붉은 깃발을 꽂았고 늑대왕이 도살령을 내렸다. 늑대왕은 자기가 뱉은 말은 항상 지켜왔어.”

알적근 가문 가주가 떠보듯 말했다.

“게다가 내 형님이기도 했던 돌아가신 네 아버지를 위해 복수를 해야지.”

“근래에 저도 그 생각을 했습니다. 아버지의 원수는 갚아야 하지만…….”

액일돈달뢰가 고개를 숙이고 말을 이었다.

“북도성의 청년들이 죽을 걸 알면서도 성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고볼 수가 없습니다. 두 차례의 전쟁으로 7만 명 넘게 죽었습니다. 이대로 또 싸우면 청양부는 멸족될지도 모릅니다.”

알적근 가문 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카님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늑대왕이 동의할까? 지금 승기는 그가 쥐고 있다. 성 공격은 그저 시간 문제일 뿐인데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협상을 하겠어?”

“그 점은 저도 생각해보았습니다. 늑대왕이 진짜로 공격할 생각은 없다고 봅니다. 진짜 성을 공격하면 우리도 성안의 모든 사람을 걸고 저들에게 피해를 적잖이 입힐 수 있지요. 곧 겨울이 끝나갑니다. 봄이 되면 길이 열릴 테고 다른 큰 부락들이 북도성을 공격해오면 늑대왕도 북도성을 지키지 못할 거예요. 늑대왕은 그저 잔혹한 말로 우리를 무릎꿇게 만들려는 겁니다. 우리 군대도 거두어 쓸 심산이니 성안의 모든 사람을 죽이는 악독한 수단은 쓰지 않을 겁니다.”

탈극륵 가문 가주가 수염을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 리가 있는 말이군. 삭북부가 왜 이리 오래 공격을 안 하나 싶었는데.”

“하지만 성문을 열고 회담을 청하면 투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청양부의 죄인이 될 거예요!”

알적근 가문 가주가 손을 맞비비며 대꾸했다.

“훗날 우리 자손들이 어른이 되어 피맺힌 원수를 갚아줄 겁니다!”

액일돈달뢰가 여응양에게로 몸을 틀며 말을 이었다.

“3왕자의 어머니는 늑대왕의 여식으로 3왕자도 절반은 삭북 혈통이지요. 3왕자께서 성을 나가 교섭을 청하면 늑대왕도 핏줄이 당기지 않겠습니까? 이 일은 저희 셋은 못 합니다. 3왕자께서 나서주셔야 해요.”

모두의 시선이 여응양에게 쏠렸다. 여응양은 잠자코 제 잔에 술을 가득 따르더니 깨끗이 비우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기왕 파소이 가문을 맡아 관리하고 있으니 삭북부와 결전을 한 판 치르고 싶소! 교섭을 하더라도 가축과 노예만 내주고 북쪽으로 돌려보내야 하오. 북도성과 이 장막 앞의 구미대독은 죽어도 저들에게 내줄 수 없소.”

여응양은 지친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요 며칠 각 가문에 남은 병력을 조사해보았소. 정말이지……. 나도 파소이 가문의 불효한 자손이 되고 싶지는 않으나 성을 나가 무릎을 꿇고 늑대왕에게 사정해야 한다면 나는 할 것이오! 알적근, 탈극륵 가문 가주들의 뜻에 따르겠소. 연배가 있으니 더 면밀하게 수를 헤아릴 거 아니오.”

두 가문 가주가 시선을 맞추었다. 둘 다 의심스러운 눈초리였다. 두 사람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막막했다. 연회는 그들의 예상과 너무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알적근 가문 가주가 결심한 듯 말했다.

“맞습니다! 어차피 겁쟁이라는 오명을 지게 된 이상 젊은이들만 보낼 순 없지요. 우리 늙은이들도 함께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 5로의정의 논의 결과인 셈이지요?”

“나도 동의합니다. 더는 싸울 수 없어요!”

탈극륵 가문 가주가 말을 보탰다.

순간 여응양은 무척 홀가분해 하며 술잔을 들었다.

“이것이 우리가 논의한 결과요! 함께 이 잔을 비우고 반달 천신께서 청양부를 보우하시어 늑대왕이 관대하게 봐주길 바라봅시다.”

네 사람이 동시에 술잔을 들었다. 장막 안의 분위기도 누그러졌다. 각 가문의 무사들도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활을 쥐고 있던 손도 아까보다는 긴장이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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