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345화 (345/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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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형제의 난 (20)

무사들이 들어와 소마를 끌고 갔다. 그들은 나가기 전 옥좌 앞에 우뚝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여응양을 흘끔 쳐다보았다. 조각상처럼 무척 외로워 보였다.

장막으로 들어온 여하가 여응양 곁으로 다가왔다.

“형님, 무슨 일입니까? 저 계집이 조건을 걸었습니까? 어떤 조건을 걸었기에 형님이 동요한 겁니까? 형님이 여인이 아쉬운 사람도 아니고, 여인을 좋아하지도 않으시잖아요.”

“아주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9왕이 진안부를 멸할 때 어린 사내아이들은 죽이지 말라 하여 여덟, 아홉 살 되는 사내아이들만 모두 죽였지. 4만여 명 되는 어린 사내아이들은 모두 노예로 전락했고 대부분 각 가문의 영채에서 막일을 한다. 9왕도 진안부의 여인이 앙심을 품으리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 이 여인은 암암리에 그 아이들에게 우리 청양인이 진안부를 멸했으니 어른이 되어 반드시 복수해야 한다고 가르쳤더구나. 이 아이들 중에 우두머리가 있는데 이름이 납목독이라 한다. 당시 진안부 장군 납목독의 막내아들이다. 이 아이가 4천 명이 넘는 진안부 혈통의 노예들을 규합해 비밀리에 소마에게 연락했다. 소마는 유일한 사자왕의 핏줄이니까. 저들은 진안부를 되살리려 했다. 진안부의 영토를 돌려달라고 비막간을 설득하려 했지. 소마는 우리가 북도성을 지킬 수 있도록 그 4천 명을 바칠 테니 아소륵을 풀어달라더구나.”

여하는 오싹했다.

“사냥꾼들에게 들었는데 산에서 곰을 사냥하다가 큰 곰을 죽이면 새끼 곰도 놔주면 안 된다고 했어요. 아직 젖먹이인 새끼 곰일지라도 어느 사냥꾼이 제 가족을 죽였는지 그 냄새를 기억하고 10년이 지나도 안 잊어버린대요. 어른 곰이 되었을 때 아직도 그 사냥꾼이 그 산에서 사냥을 하면 반드시 복수한다고 하더라고요. 진안부의 노예들은 정말 곰 새끼들이네요. 그래도 괜찮은 조건이긴 합니다. 지금 3 대 귀족 가문에서 병력을 다 틀어쥐고 있고 우리는 병력이 부족하니 4천 명이라도 있으면 많이 수월해질 텐데 왜 거절하셨어요? 겁쟁이 아소륵의 목숨이 무슨 가치가 있다고요. 아까 형님이 하신 말씀이 다 맞아요. 형님이 저 계집의 몸을 취하고 세월이 오래 흐르면 자연히 아소륵을 잊고 형님을 위해 아이를 낳을 겁니다. 아소륵이 어디 형님에 비교나 됩니까?”

“소마의 눈을 자세히 보았다면 그리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여응양이 조용히 말했다.

“나는 소마의 조건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내키지 않기 때문이다.”

“내키지 않는다고요?”

여하가 깜짝 놀랐다.

여응양이 여하를 흘긋 보더니 몸을 돌려 제 아우의 옷깃을 반듯하게 정돈해주고 갑옷의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우리는 북도성을 지키고 늑대왕과 거래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비굴하게 무릎을 꿇지는 않을 것이야. 그렇지?”

“맞습니다!”

여하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소륵과 비막간은 해내지 못했으나 우리는 해낼 수 있다. 그렇지?”

“네!”

“귀목, 너는 나를 따르며 거의 30년간 인내해왔다.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우리는 안다. 오로지 초원에 우리 형제의 이름을 빛낼 이 날을 위해서였다. 안 그러냐?”

“맞습니다!”

“하지만 저 여인은? 철진과 철익, 대합살, 목려, 심지어 비막간까지 우리를 믿었느냐? 저들은 아소륵이야말로 불쌍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아소륵의 것이었던 걸 빼앗았다고 생각했어. 아소륵의 모든 행위는 옳다 여겼다. 전쟁에 패했어도 아소륵은 그저 최선을 다한 아이였다.”

여응양이 옥좌의 손잡이를 발로 탁 걷어찼다.

“저 많은 사람이 아소륵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데 우리 둘은 누가 챙겨주었느냐? 내 몸에도 아소륵과 같은 피가 흐른단 말이다!”

여응양이 포효했다.

“이제 나만이 저들을 구할 수 있는데 저들의 눈에 나는 여전히 짐승만도 못하다!”

여하가 물끄러미 제 형을 보았다. 어렴풋이 형의 분노가 이해된 여하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여응양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널찍한 옥좌에 몸을 묻었다.

“저자들의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난 이대로 계속 외롭겠지만, 결국에는 뜻한 바를 이룰 것이다!”

어둠 속에서 아소륵이 소리 없이 일어섰다. 환하게 빛나는 달빛에 머리 위의 유일한 틈으로 희미한 빛이 스며들었다. 그 빛에 감옥 한쪽 구석에서 깊이 잠들어 있는 흠달한왕이 또렷이 보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흠달한왕은 아소륵과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지하 동굴 안은 오래도록 침묵에 잠겨 있었다.

감옥 정중앙에 용리가 던진 단도 두 자루가 꽂혀 있었다. 달빛이 서늘한 날 위로 일렁이며 은근한 한기를 뿜어냈다. 아소륵도, 흠달한왕도 단도를 건드리지 않았다. 용리가 단도 두 자루를 남긴 의도는 뻔했다. 자객 용리는 이들이 칼을 뽑아 싸우기를. 그래서 누가 쓰러질 것인지를 한껏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천라산당에서 받은 교육과 광혈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용리는 반드시 둘 중 한 사람이 죽는 때가 올 것임을 확신했다. 모든 사람은 본능적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게 마련이었다. 용리는 죽음에 강렬한 흥미를 느꼈다.

아소륵은 발소리를 내지 않고 천천히 단도 옆으로 걸어갔다. 시선은 내내 흠달한왕의 눈에 닿아 있었다. 흠달한왕은 정말 깊이 잠든 것처럼 보였다. 잠든 척하는 사람은 눈동자가 눈꺼풀 아래에서 천천히 움직일 테니까. 한참을 망설이던 아소륵은 몸을 숙여 단도 한 자루를 뽑았다.

아소륵은 쇠창살을 더듬어 접착 부분을 찾아냈고 칼로 그곳을 힘주어 잘라보았다. 아소륵은 철을 조금 다룰 줄 알았다. 이런 감옥을 만들려면 대장장이는 반드시 쇠창살의 한쪽 끝을 달군 다음 다른 쇠창살을 이어 붙였을 것이다. 그럼 열을 받은 금속은 강도가 약해지기 때문에 그 부분은 감옥의 약점이 된다.

“소용없다.”

아소륵은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흠달한왕의 흐릿한 눈동자가 싸늘하게 아소륵을 주시하고 있었다. 언제 잠에서 깬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아예 잠을 자지 않았던 건지도 몰랐다.

조손 관계이자 감옥에 갇힌 두 마리 짐승인 아소륵과 흠달한왕은 서로를 경계해야 마땅했다.

“‘쇄룡정’은 동륙에서 사온 냉단어린강으로 만들었다. 최상급 냉단어린강은 어떤 불에도 강도가 약해지지 않지. 그것을 가를 수 있는 것은 혼이 깃든 무기뿐이다.”

흠달한왕의 말에 아소륵은 영월도가 떠올랐다. 애석하게도 지금 영월은 곁에 없었다.

“할아버지, 저 때문에 시끄러워서 깨셨어요?”

아소륵이 나직이 물었다.

“아니다. 잠들지 않았다. 난 또 네가 칼을 뽑아 내 목뼈를 잘라보려나 싶어 좀 기대했는데 쇠창살을 자르러 가다니.”

흠달한왕이 무시하듯 말했다.

“이건 ‘쇄룡정’이다. 네 똑똑한 아버지가 만든 이 감옥에는 용도 가둘 수 있다.”

“이대로 기다릴 수만은 없어서요.”

아소륵은 대답하면서 까치발을 딛고 기괄에 의해 닫힌 감옥 상단을 비틀어 열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날이 얇은 칼임에도 상단과 측면의 쇠창살 틈에 끼워지지가 않았다. 기괄의 용수철 힘은 어마어마했다. 진국 거석기에 사용되는 용수철에 버금갈 만했다.

“30여 년 전에도 해봤지만 안 되더구나.”

흠달한왕이 냉소했다.

“그보다는 내 목뼈가 훨씬 해볼 만하지.”

“할아버지, 저는 할아버지한테 칼을 겨누지 않을 거예요. 1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아소륵이 조용히 말을 건넸다.

“난 마귀가 아니라 할아버지 손자 아소륵이에요.”

“그럼 나는 마귀 같으냐? 멍청한 겁쟁이같으니! 둘 중 한 사람만 살 수 있다. 하나는 열여덟 살 먹은 손자고 하나는 곧 죽을 할아버지다. 누가 죽어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느냐?”

아소륵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둘 중에 한 사람만 살 수 있을 리 없어요. 우리는 나갈 거예요.”

“멍청하기 짝이없는 말이다만 그래도 어릴 때보다 담은 좀 커졌구나.”

흠달한왕이 소리 없이 웃었다.

“하지만 가끔은 이럴 때가 있는 게다. 할아버지와 손자 중에 한 사람만 살아나가야 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아소륵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왜죠? 왜 그렇게 잔인한 생각을 해야 해요? 그래서는 안 돼요. 둘 다 살아야죠.”

잠시 침묵하던 흠달한왕은 고개를 들어 지하 동굴 꼭대기의 희미한 빛 한 점을 보았다.

“신도 마귀인 세상에서 어떻게 잔인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너는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초원은 네게 어울리지 않아. 겁쟁이의 세상인 동륙에서 평생 살았어야 했다.”

“풍염 황제는요? 풍염 황제도 겁쟁이인가요?”

“동륙에서 풍염 황제에 대해 들었느냐?”

흠달한왕이 아소륵을 곁눈으로 흘깃 보았다.

“그도 겁쟁이다. 자신에게 충성하는 장군에게 지나치게 연연하지 않았더라면 북도성을 점령했을 것이다.”

흠달한왕이 중얼중얼 말을 이었다.

“요 몇 해 풍염 황제가 왜 북륙을 정벌하러 왔는지 계속 생각했다. 자기를 증명하고 싶었을 뿐인지도 모르지. 멍청한 사내 같으니……. 이리 와 앉아라. 동륙인들이 풍염 황제를 뭐라 말하는지 들어보자. 이제 네가 우리 청양부에서 동륙인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구나.”

흠달한왕은 자신의 옆을 툭툭 치며 말했다.

아소륵은 흠달한왕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머리 위의 희미한 빛을 바라보며 한참을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동륙인은 풍염 황제를 무척 존경해요. 장미 황제에 버금가는 위대한 황제라고 말하죠. 20년만 더 살았어도 구주 전체를 대윤의 영토로 만들었을 거래요. 길거리에는 풍염 황제의 고사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 사람들을 이야기꾼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손왕전>을 노래하는 것과 비슷하게 풍염 황제의 이야기를 영웅담으로 꾸며서 이야기해요. 내용이 별로 무겁지도 않고 아주 재미있어요. 풍염 황제는 소근심, 이릉심, 희양, 엽정훈이라는 장군 넷과 형제처럼 지냈대요. 이들을 철사거라고 부르는데 천하를 누비는 이들을 아무도 막을 수 없었고, 어느 누구도 이들을 떼어놓지 못했대요. 그러다 끝내 희양이 신문을 당하다가 죽고 풍염 황제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고 해요.”

흠달한왕은 모처럼 흥미진진한 눈빛이었다.

“철사거가 두려워할 만하다만 가장 까다로운 상대는 공산허다. 혼자서 철사거 넷을 상대할 만한 인물이지!”

흠달한왕은 잠시 생각하다 말을 보탰다.

“어쩌면 철사거에 3만 군대가 더해져도 될 게다.”

“참, 동륙에서 친구를 하나 사귀었어요. 이름은 희야고 희양 장군의 증손자예요.”

“창을 쓰느냐?”

아소륵이 고개를 끄덕였다.

“창을 아주 잘 써요. 맹호소아창이라고 혼이 깃든 무기예요!”

흠달한왕도 고개를 끄덕였다.

“희양은 방심할 수 없는 상대였지. 그가 이끄는 군대는 우리 초원인의 기병대에 비할만했다. 게다가 아주 빨랐지. 바람처럼 빨랐어……. 왜 웃느냐?”

아소륵은 그제야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희야를 떠올렸기 때문일 수도 있고 마침내 할아버지와 얘기를 나눌 주제를 찾아서일 수도 있었다. 아소륵의 가슴에 맴돌던 우울한 기운이 많이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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