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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형제의 난 (17)
서천궁으로 들어간 달은 차츰 환화 궤도에 다가갔다. 어느새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북도성 가장 높은 지대에 긴 갈기를 가진 사나운 말 한 마리가 서 있었다. 여응양은 그 말 등에 타고서 자신의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담비 외투가 밤바람 속에서 깃발처럼 펄럭거렸다.
북도성은 장막으로 이루어진 도시였다. 크고 작은 장막들이 성안에 모여 마을을 이루고 돌을 깔아 낸 마도(馬道)1)가 도시를 몇 갈래로 나누었다. 옛날에 눈이 적게 내릴 때면 마도 밖으로 무성하게 자란 백모나 집집마다 장막 앞에 쌓아둔 마초와 말똥 더미, 나무틀에 걸어 바람에 말리는 중인 소고기와 양고기가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폭설이 일체를 뒤덮어 버렸다. 눈밭의 장막들은 하얀 양의 털이 군데군데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영채 앞에는 불이 켜져 있었는데 드문드문한 불빛에 여응양은 불 지르고 난 뒤의 들판이 떠올랐다.
고요했다. 시야에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여응양은 이곳에 올라와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했다. 전에는 늘 이 도시가 수많은 영웅이 차지하려고 다투는 초원의 진주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지금은 죽은 도시처럼 황량하고 적막했다. 여응양은 아직 동륙에 가서 수많은 도시의 아름다운 경치를 직접 보지 못했다. 동륙에서 돌아온 만족인들은 하나같이 누각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아름다운 것이 아주 많다고 했다. 그런 도시를 상상할 수 없었던 여응양은 줄곧 직접 가서 보고 싶었다.
이는 반달 천신이 여응양에게 기회를 주느냐 마느냐에 달렸다.
성 밖에는 여응양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있었다. 외조부 누염. 그는 언제든 공격해 들어와 성안의 사람들을 죽일 수 있었다. 이미 절망에 휩싸인 성안의 백성들은 겁에 질린 채 소식만 기다렸고 권력을 가진 이들은 투항해 자신의 세력을 지킬 생각만 했다. 여응양이 존경하는 또 한 사람, 조부 역시 파소이 가문 내 여응양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여응양은 이미 여수우라 불리던 사내를 제거했다. 여수우가 아직 살아있었다면 이들보다는 좀 더 여응양을 인정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여응양은 고독감이 느껴졌다. 홀로 높은 곳에 서서 이 도시를 구하고자 하지만 같은 길을 갈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외로운 영웅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는 두렵지 않았다. 그가 아는 영웅은 모두 일당백이었으니까. 머릿속이 복잡해지자 아버지가 떠올랐다. 여응양은 한 번도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뛰어나도 아버지의 눈은 언제나 ‘너그럽고 인자한’ 여수우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저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30년 전의 여숭도 이 곳에 서서 자신의 도시를 본 뒤 군을 지휘해 누염과 결전을 치르지 않았을까?
여하가 말을 몰아 올라왔다. 여응양의 등 뒤에 도착한 그가 근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늑대왕이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사흘 후, 그러니까 1월 열엿새 해가 뜨기 전까지 성문을 열지 않으면 진격할 것이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와 한 약속도 다 무효화한답니다!”
여응양은 얼굴을 움찔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형님,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사흘 안에 알적근, 탈극륵 가문을 처리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지금 성을 열면 늙은 개 두 마리는 분명 늑대왕 앞에 가서 형님 자리를 빼앗을 겁니다! 이렇게까지 심혈을 기울여놓고 저 늙은이들 뜻대로 되게 두실 겁니까?”
여하가 흉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들을 몰아붙일 게 아니라 다시 얘기해 봐야 합니다. 이러다 다 죽습니다!”
“저들은 조건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여응양이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 우리가 명목상 파소이 가문의 우두머리지만 쓸 만한 사람이 거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저들은 뜻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
“그럼 어쩝니까? 저들 말은 다 헛소리예요. 늑대왕은 사흘 후에 공격한다 했으니 반드시 공격할 겁니다!”
“나도 그리 믿는다.”
여응양이 잠시 침묵했다가 말을 이었다.
“모레 저녁, 1월 열닷새에 알적근, 탈극륵, 합로정 가문의 가주들을 금장궁에 불러 술을 마실 것이다!”
“형님, 혹시…….”
“계획을 앞당긴다! 늑대왕은 우리에게 사흘밖에 주지 않았다. 사흘 내에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여응양이 고개를 돌려 동복아우인 여하를 쳐다보았다.
“사흘 후, 성문을 열고 청양부 주인의 신분으로 늑대왕과 교섭할 것이다. 그가 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북도성 수십만 명의 목숨을 걸고 그를 성 밖에 막아둘 것이다. 늑대왕이 이 성을 손에 넣고 싶다면 처참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게다.”
“늑대왕이…… 받아들일까요?”
“나를 인정한다면 받아들일 것이다.”
“맞습니다! 형님은 문제 없을 거예요!”
여하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여응양은 살짝 울컥해 벌써 스물다섯이나 먹은 아우를 자세히 보았다. 장가를 들었는데도 얼굴은 열너덧 살 때 같았다. 고집 세고 거만하며 눈과 아래로 처진 입꼬리에는 서슬 퍼런 표범의 살기가 어려 있었다. 여응양은 여하가 아직도 열댓 살 먹은 아이 같다는 착각이 자주 들곤 했다. 여하는 충동적이고 무모하지만 또 제 형을 깊이 믿고 의지했다.
“넌 다 큰 어른이다.”
여응양이 툭 던진 말에 여하는 흠칫했다.
“귀목, 그동안 너는 내내 나를 따랐는데 형이 되어서 도움은 못 주고 고생만 시켰구나.”
여응양이 여하의 어깨를 툭툭 치며 물었다.
“넌 왜 그리 나를 믿느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느냐? 널 속일까 두렵지 않아?”
“저는 어릴 때부터 형님과 함께였지 않습니까! 세심하지 못한 저는 형님이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친형님이 날 속일 리 없다는 건 압니다!”
“우린 비막간과도 형제가 아니냐? 하지만 나는 그에게 아주 커다란 덫을 놓았지.”
“우리 사이와 형님과 비막간 사이는 다르지요! 게다가 제가 형님을 안 믿으면 누굴 믿겠습니까? 형님 말고 북도성 안에 제가 믿을 만한 사람이 또 누가 있다고요?”
여응양이 고개를 숙이고 말 앞에 쌓인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잠자코 있다가 고개를 들고 여하를 보며 웃었다.
“너는 나와 끝까지 갈 것이지? 그렇지?”
“그럼요!”
여하가 큰 소리로 외쳤다.
용리는 넋 나간 청년, 대나안 아소륵 파소이를 흥미롭게 관찰했다.
머리 위에서 물방울이 아소륵 뒤편의 수면으로 똑똑 떨어졌다. 그곳은 지하의 강줄기였다. 강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맹어(盲魚)가 헤엄쳤다. 동굴 천장에 자라난 오래된 종유석은 늑대 이빨처럼 날카로웠다. 그들은 거대한 늑대 입속에 서 있는 듯했다.
“오래 전 우리도 이곳에서 헤어졌었지요, 아소륵 대나안.”
용리가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말했다.
“아니, 5왕자. 여응양 형님이 선대 대군께서 계실 때의 호칭으로 되돌리라 하셨습니다. 5왕자의 다른 형님인 여수우의 즉위는 음모였기 때문에 더는 초원에서 인정되지 않을 것입니다. 대나안도 더는 세자가 아니라 5왕자입니다.”
“난 널 모른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군.”
“그렇겠지요. 저를 기억 못 하실 법도 합니다. 제가 대나안을 이곳에 내버렸을 때 기절해 있었으니까요.”
용리의 목구멍 깊숙이에서 오싹한 웃음소리가 났다.
“세월이 참 빠릅니다. 제가 당을 떠난 지 벌써 15년이 되었군요. 제 생에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모두 이 초원에서 보냈습니다.”
용리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이것이 자객의 생존 방식이지요. 5왕자 같은 천구 무사는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그때…… 날 납치했던 자라고?”
“그렇습니다. 당시 저는 태과이 칸 영채의 마부였습니다. 지금은 5왕자의 형님, 여응양 영채의 마부이지요.”
“욱달한 형님이 시킨 짓이냐? 10년 전에 벌써 나를 죽이려 했다고?”
아소륵이 고개를 저었다.
“몰랐네. 생각도 못 했어…….”
“5왕자 같은 분은 언제나 죽이려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지요. 성년까지 살 수 있었으니 반달 천신의 가호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돌아서십시오.”
아소륵은 차분히 돌아섰고 용리는 아소륵의 등을 확 밀었다. 앞은 캄캄한 동굴이었고 아소륵은 그대로 추락했다. 아소륵의 몸을 묶은 쇠사슬이 청동 양화기2)에서 미끄러지며 소름끼치는 소리가 났다. 아소륵은 이 아래가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 날카로운 쇠 가시가 수도 없이 있는 곳일지도 몰랐지만 반항하지 않았다. 아래가 지옥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형체를 구분할 수 없는 핏덩어리를 보았을 때, 이미 아소륵에게 북도성은 지옥이었다.
용리가 손을 뻗어 양화기 손잡이를 잡았다. 아소륵은 공중에 매달린 꼴이 되었다. 쇠사슬이 온몸의 뼈를 으스러뜨릴 듯 살을 파고들었다.
이곳은 석굴이었다. 사방은 온통 컴컴했다. 머리 위에서 비치는 한 줄기 희미한 빛만이 발아래 부분을 간신히 밝혔다.
“5왕자가 죽을 곳입니다. 사실 10년 전 이곳에서 죽었어야 했지요.”
위쪽에서 용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 잘 모시도록 하세요. 두 사람이 다시 만나다니, 정말 기적이군요.”
용리가 쇠사슬을 휙 흔들자 진동이 쇠사슬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지며 쇠사슬 한쪽 끝의 정교한 자물쇠가 스스로 풀렸다. 용리가 다시 손을 휙 거둬들이자 쇠사슬은 뱀처럼 지하 동굴에서 훌쩍 솟구쳐올라가 용리의 발아래 촤르륵 떨어졌다.
용리가 발아래 기괄을 밟자 철책이 다시 잠겼다. 아소륵은 눈이 어둠에 적응되지 않아 사방으로 손을 뻗어보았다. 손에 닿는 것은 쇠창살뿐이었다. 또 하나의 정교한 기괄이었다. 대략 사각형 감옥으로 투박하지만 무겁지는 않았다. 쇠창살은 보통 사람의 손목 정도 굵기이지만 빈틈 없이 걸쇠가 걸려 있었다. 동륙인이 진귀한 원숭이를 잡을 때 사용하는 기계 같았다.
“5왕자의 아버지가 대장장이에게 시켜 만든 감옥입니다. 신경을 많이 쓰셨지요. 명칭은 ‘쇄룡정’. 자물쇠로 가둘 수 없는 파소이 가문의 광전사를 가두는 데 쓰이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전장에서 사람이 막을 수 없는 미친 용이지요.”
용리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용이면 뭐 합니까? 이 작은 우리에 갇힌 용 두 마리는 아무 짝에 쓸모가 없는 것을요.”
용리가 미소를 지었다. 순간 용리는 불현듯 다가오는 위험을 감지했다. 다섯 살 때부터 엄격하게 훈련받은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젖히면서 두 손으로 허리 뒤의 단도를 잡았다. 작은 돌멩이 하나가 청동 양화기에 튕기며 바스라졌고 그 부분에 족히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 깊이의 홈이 생겼다. 한 덩어리 청동이 돌멩이 하나에 부서진 것이다. 용리가 재빨리 피하지 않았다면 그 돌멩이는 용리의 머리를 꿰뚫고도 남았다.
“쓸데없는 말을 한 점, 용서하십시오. 존경하는 흠달한왕 전하.”
용리는 겁먹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자객으로서 그는 어릴 적부터 강대한 적은 존중하라고, 두려움과 분노는 강한 적을 이기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며 겸손과 존중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어둠의 힘을 장악할 수 있다고 배웠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방금 전 그 충격음이 아직도 지하 동굴 안을 반복해 메아리쳤다.
“진심으로 전하의 힘을 존경합니다. 정말 한 시대를 바꿀 수 있는 힘입니다.”
* * *
1) 말이 달릴 수 있도록 내놓은 길.
2) 차나 배의 짐을 들어 옮기는 기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