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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형제의 난 (15)
여응양은 입을 크게 벌리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온 힘을 다해 뱉었다. 태곳적 거대한 짐승 같은 포효가 금장궁 전체를 휩쓸었다. 광풍 같고, 폭설 같고, 선회하는 도검 같은 포효성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귀를 틀어막았다. 모두가 언제 찢겨 나갈지 모를 폭풍의 눈 속에 있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여응양이 입고 있던 정교한 비단 도포도 팽팽해지더니 이내 불룩 튀어나온 근육에 비단이 가닥가닥 뜯겨 나갔다. 고동색 근육 위로 무쇠 같은 광채가 흘렀다.
여응양이 휙 손을 휘둘러 몸에 걸친 천을 뜯어내고 머리카락을 묶은 붉은 끈을 잡아 뜯었다. 여응양은 수사자가 긴 갈기를 털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성큼 앞으로 나아가 강철 감옥을 붙잡고 마구 흔들었다.
흠달한왕도 똑같이 포효로 대답했다. 두 사람은 감옥 안팎의 격노한 수컷 짐승 같았다. 한데 뒤엉킨 두 사람의 포효성이 거대한 망치처럼 모두의 가슴을 후려쳤다. 두 사람은 창살을 붙잡고 흔들었다. 무너질 것 같지 않은 견고한 감옥도 그들의 손아귀에서는 한없이 약했고 종잇장처럼 갈가리 뜯겨나갈 것 같았다.
“청동의…… 피!”
알적근 가문 가주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는 밀물처럼 밀려드는 포효성에 집어삼켜진 느낌이었다.
척후병에게서 아소륵 대나안이 전장에서 실성했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쩌면 그것이 한 세대 동안 전해지지 않았던 청동의 피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이런 신성한 혈통을 물려받은 사람은 청양인의 눈에 틀림없이 하늘이 내려준 영웅으로 비칠 것이나, 알적근 가문 가주는 더 이상 영웅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랐다. 광전사의 전설은 과거가 되었으면 했다. 사실 자신의 칼 한 자루만으로 초원을 구원하는 사람은 누구도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그가 틀렸다. 지난 500년간 보기 드물었던 일이 그의 눈앞에 벌어졌다. 청동의 피를 지닌 사내 셋이 같은 시대를 살고 있었다.
반달 천신께서 파소이 가문의 멸망을 막는 것이리라! 가슴속에서 불현듯 정해진 운명에 대한 절대적인 경외감이 피어올랐다.
포효성이 차츰 잦아들었다. 흠달한왕과 여응양은 쇠 감옥을 사이에 두고 무겁게 숨을 몰아쉬었다. 기이한 현상들이 그들 몸에서 사라졌다. 불거졌던 근육은 서서히 부드럽게 회복되었고 일그러졌던 이목구비도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왔다. 마귀 같은 기운도 잠시 그들의 몸에서 사라졌다. 그들은 여전히 포악한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최소한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사방이 난장판이었다. 독주는 양탄자 위로 천천히 흐르고 소녀들의 귀와 코에서는 새빨간 피가 흘렀으며 무사들은 얼이 빠져 있었다.
“한창 때셨다면 저는 상대가 되지 않았겠네요.”
여응양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이들에게 뭘 증명하려는 게냐?”
흠달한왕이 물었다.
“나를 증명하려는 겁니다.”
여응양이 자신의 맨가슴을 치며 나직이 소리쳤다.
“여응양 욱달한 파소이만이 북도성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할아버지, 믿으십니까? 저야말로 파소이 가문의 권력을 장악하기에 가장 적절한 인물입니다! 저만이 이 가문을 지킬 수 있고, 저만이 이 가문에 더 큰 영토를 가져다 줄 능력이 있습니다!”
흠달한왕이 차갑게 비웃었다.
“너는 네 형을 죽였다. 형을 죽여서 파소이 가문을 구한 것이냐?”
여응양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자기 딸을 죽였잖습니까? 할아버지와 제 혈관에는 같은 피가 흐릅니다. 서로를 비웃을 필요는 없지요.”
“아니, 너와 나는 다르다.”
흠달한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달마이를 죽인 것은 내가 미치광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는 아니다. 너는 네 야심 때문에 네 형을 죽였다.”
여응양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소위 영웅은 모두 미치광이입니다. 할아버지도 그렇고 외조부 누염도 그렇고 저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리고 초원에 야심이 없는 영웅이 있었습니까? 야심이 없는 자는 양이나 말을 방목하면서 여인과 함께 평안히 늙어가야지요…….”
여응양이 깊게 숨을 들이쉬고 말을 이었다.
“비막간을 죽일 이유는 충분했습니다. 비막간은 겁쟁이로 북도성을 지킬 능력이 없어요. 그는 제 앞길에 방해가 될 뿐입니다. 말 떼 안에서 병약한 망아지는 죽여야 하지요. 어차피 늑대 떼를 만나면 도망치지 못할 테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네 길을 가로막는 사람은 다 죽이겠구나?”
흠달한왕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저는 북도성을 지킬 수 있으니까요.”
여응양이 자기 맨가슴을 탁 쳤다.
“여응양 욱달한 파소이, 나야말로 파소이 가문의 혈통과 의지를 진정으로 이어받은 사내입니다! 나는 파소이 가문을 다시 화려한 정상에 올려놓을 것입니다. 내 아버지도, 할아버지께서도 못했던 일입니다. 납과이굉과 파소이, 나의 조부시여. 파소이 가문의 영광스러운 미래를 위해 저와 손을 잡지 않으시겠습니까?”
“나더러 네 손을 잡으라 한다면 네 뼈를 으스러뜨릴 것이다.”
여응양이 흠달한왕의 눈을 한참 쳐다보다가 물었다.
“제가 그리도 싫으십니까, 할아버지? 여러분도 다 내가 싫소?”
여응양이 갑자기 마구 소리를 질렀다. 이마의 핏줄이 불긋 솟아올랐다. 그는 흉악한 짐승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난 여러분 모두를 죽일 수 있소! 개미를 눌러 죽이듯 쉽게 죽일 수 있지!”
여응양이 다시 고개를 돌려 흠달한왕을 쳐다보았다.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북도성은 곧 함락됩니다. 누염은 할아버지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아요. 하루빨리 성에 들어와 감옥에 갇힌 할아버지를 보고 싶어 합니다. 혈통 좋은 종마 한 마리를 보려는 듯 제게 할아버지를 잘 보살피라 신신당부했지요. 흠달한왕 전하, 초원의 황제가 되었어야 했던 분이 견디실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할아버지도 이제는 어쩔 수 없습니다. 할아버지의 다른 자손들도 어쩌지 못하고요. 할아버지는 나이가 들었고, 그 자손들은 너무 나약해서 이 성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저 하나뿐입니다!”
여응양이 나직이 고함쳤다.
“저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저를 북도성의 새 대군으로 인정해주십시오! 북도성의 모든 사람에게 여응양 욱달한 파소이야말로 그들이 초원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주십시오!”
흠달한왕은 여응양의 험상궂은 얼굴을 보며 오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가 바닥에 엎드린 채 이전 제왕의 대답을 기다렸다. 여응양 말이 맞았다. 흠달한왕이 인정해주면 여응양은 북도성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여숭이 여수우에게 양위해 주었던 때처럼 북도성 사람들 앞에서 여응양의 손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리면 여응양이 곧 정정당당한 대군이 되는 것이었다. 북도성 사람들은 흠달한왕에 대한 존경심을 여응양에 대한 기대로 바꿀 것이며 알적근과 탈극륵 가문의 무사들도 그의 깃발 아래 무릎을 꿇을 것이다.
“미련한 놈.”
흠달한왕이 싸늘하게 말했다.
“내가 너를 대군의 옥좌에 앉혀주기를 그리 바라느냐? 내 한 마디로 네게 굴복하지 않았던 자들이 머리를 조아리기를 바라? 멍청하구나! 초원을 호령하려는 사내는 손왕이 그랬던 것처럼 굴복하지 않는 모든 자를 죽여야 한다. 그들을 죽이고, 역도호 알적근과 알근적 탈극륵 늙은 개 두 마리도 죽여라.”
흠달한왕이 두 가주를 흘긋 쳐다보며 조소가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저들의 머리를 각자의 영채에 던져라. 저들 가문의 무사들 중 누군가가 복수하려 한다면 그들도 죽여 버려라. 네 형도 죽였으니 이 정도는 어렵지 않겠지.”
흠달한왕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나도 죽여야 한다. 나 역시 네게 복종하지 않으니.”
흠달한왕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금장궁 안의 모든 사람은 그의 농담이 웃기지가 않았다.
“여기 선 사람이 아소륵이었다면 할아버지께서는 그 아이를 북도성의 주인으로 인정하셨겠지요?”
여응양의 목소리는 명료하고 차분했다.
여응양은 말없이 뒤돌아 성큼성큼 대군의 황금 옥좌로 갔다. 사람이 앉지 않은 지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대군이 가장 총애하고 믿는 사람도 다가가 옥좌를 짚고 대군의 귓가에 말할 수 있는 정도였다. 옥좌는 오를 수 없을 만큼 높아 보였으나 주인이 없는 지금은 돌연 많이 낮아져 보였다. 한 번은 술에 취한 탈극륵 가문 가주가 가서 앉아봐야겠다고 농담을 하자 알적근 가문 가주가 그를 제지하면서 이렇게 농을 던졌다. 그 자리에 앉는 사람은 목을 베일 준비를 해야 한다고. 여응양은 그들 뒤에 서서 그저 미소만 지었다.
여응양은 살며시 황금 옥좌를 어루만지며 조심스럽게 앉았다. 옥좌에 바늘이 있어 찔리기라도 할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여응양은 천천히 몸을 펴며 딱히 편하지 않은 옥좌에 몸을 적응시켰다. 마침내 편안한 자세를 찾은 그는 지친 호랑이처럼 비스듬히 기대 시선을 아래로 드리웠다.
“할아버지 말씀이 맞습니다. 저는 누구의 인정도 필요하지 않지요. 이미 대군의 자리에 앉았고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막는 사람은 죽일 것입니다. 나는 아소륵이 아니에요. 어느 누구의 환심도 살 필요가 없어요. 그리 하지도 못하고요. 이 세상에는 타인이 내게 미소짓게 할 방법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고, 하나는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겁니다. 난 이미 칼을 들고 사람을 죽였고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누가 날 좋아하든 말든, 그건 중요치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보고 웃을 것입니다.”
여응양이 손을 내둘렀다.
“나의 존귀한 할아버지를 모셔가라.”
무사들이 감옥을 밀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여응양이 말을 얹었다.
“그리 좋아하는 아소륵을 곧 만나게 될 겁니다. 이야기나 실컷 나누시지요.”
여응양은 자려는 듯 눈을 감았다.
“존경하는 알적근, 탈극륵 가문 가주들께서도 내 제안을 잘 생각해보시오. 며칠 더 지나면 성을 나가는 길도 봉쇄될지 모른다오. 날 죽일 생각도 마시오. 당신들은 날 못 죽이니. 그리고 내 이름은 여응양 욱달한 파소이요. 말해주었으니 반드시 기억하시오.”
여응양이 눈을 번쩍 뜨고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다시 눈을 감고 말했다.
“오늘밤 연회는 여기까지 하겠소. 좀 피곤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