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337화 (337/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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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형제의 난 (12)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뼈에 사무치는 증오가 아소륵의 가슴 가득 차올랐다. 이빨을 날카롭게 간 야수 한 마리가 그 안에서 미친 듯이 울부짖는 것 같았다. 영월을 가져오지 않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랬다면 칼을 휘둘러 면전의 무사 8명을 모두 죽였을 텐데.

그래! 모두 죽였을 것이다! 저들은 죽어 마땅하다! 죽어 마땅해!

그러나 아소륵은 소마마저도 말발굽 아래에서 끌어내지 못했다. 그동안 소마를 보고 싶다고 갈망하면서도 만나지 못했었다. 그런데 다시 보게 된 지금, 그녀는 죽기 직전이었다.

마지막 순간, 가죽 자루가 튕겨 오르더니 소마를 끌어안고 몸을 뒤집어 그녀를 눈밭에 내리눌렀다. 말발굽은 가죽 자루 위로 떨어졌다. 소마는 자루 안쪽에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또렷하고 잔인했다.

어둠 속의 여수우는 하반신에 감각을 잃었다. 극심한 통증에 온몸이 찢어발겨지는 듯했다. 척주(脊柱)가 부러졌다. 그는 품 안의 여인을 꼭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익숙한 그녀의 체취를 맡고 싶었지만 짙은 가죽 냄새밖에 나지 않았다. 품에 느껴지는 따스함과 부드러움에 아직 살아있음을 알았다. 그녀는 이 지옥 속의 유일한 구원이자 그의 고통과 절망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약이었다.

말 한 마리가 또 앞발을 들어 올렸다.

아소륵은 죽기 직전의 야수처럼 울부짖으며 훌쩍 뛰어올라 온힘을 다해 그 말의 측면으로 몸을 던졌다. 거대한 힘에 군마는 비스듬히 넘어졌고 그 순간 아소륵은 말안장에서 장도를 뽑았다. 한 손으로 소마를 들어 멀찍이 내던지고는 가죽 자루를 꼭 안아 들고 돌진하려 했다. 그러나 숨이 차 눈밭에 무릎을 꿇고 쓰러져버렸다. 나머지 무사 7명은 칼을 뽑았지만 서둘러 공격하지 않고 군마의 앞발을 들어올려 겁만 주었다. 말발굽 14개의 편자가 눈에 닳아 사나운 빛을 발하며 아소륵의 눈앞에서 번쩍거렸다. 아소륵은 눈밭에 털썩 주저앉은 채 마구 칼을 휘둘렀다.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아소륵은 자신이 누군가를 구하러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도망칠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어디로 도망칠 수 있을까. 이 세상에 그를 구하러 올 사람도 없었다. 아소륵은 목 놓아 울며 희야와 우연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하나는 동륙에, 하나는 청주에 있었다. 아소륵은 곧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이 세상이 모두를 잡아다가 처결하는, 끝없는 형장이었다.

하지만 왜? 대체 무엇 때문에?

“정말 불쌍하군.”

여응양은 군마 한가운데 머리를 풀어헤친 아소륵을 보았다. 사냥개에 쫓겨 궁지에 몰린 새끼 짐승처럼 무력하게 발톱을 휘두르며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3왕자, 약자를 동정하십니까?”

알적근 가문 가주가 담담히 물었다.

여응양은 냉담하게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막 도착한 철안과 철엽은 눈앞의 광경을 보고 놀라 넋이 나갔다.

“형!”

철엽이 막으려는데 철안은 이미 칼을 뽑고 그대로 돌진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잽싸게 나아가 군마 한 마리의 목으로 칼을 내리쳤다. 말 등에 탄 무사가 칼로 맞받았다. 기회를 포착하한 철안은 말발굽 아래로 손을 뻗어 아소륵을 잡아 꺼냈다.

“젠장! 에라 모르겠다!”

철엽도 칼을 뽑았다. 형 혼자서 7명을 상대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들 형제는 어릴 적부터 한 몸이었으니까.

철안과 철엽이 아소륵과 여수우의 양쪽에서 무사 7명을 가로막았다. 구경꾼들 사이에서 분노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전장에서 가족을 잃은 이들은 처형이 잔인하고 완벽하게 끝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누가 먼저 눈덩이를 던졌는지 모르지만, 이어 수백, 수천 개의 눈덩이가 철안과 철엽을 향해 던져졌다. 형을 집행하는 무사들도 눈덩이에 맞았다.

“저들을 끌어내라! 아니면 같이 처결한다! 이것은 형 집행이지 촌극이 아니다!”

액일돈달뢰가 분노해 소리쳤다.

아소륵은 부들부들 떨며 칼로 가죽 자루를 갈랐다. 피투성이가 된 여수우의 얼굴이 나타났다. 여수우는 이미 숨이 간들간들했다. 그는 살짝 눈을 뜨고 햇살 아래의 아소륵을 보았다. 죽음을 앞둔 여수우의 눈빛은 차분했다. 증오도, 고통도 없고 슬픔만이 엷게 서려 있었다.

“형님……. 형님…….”

아소륵이 오열하며 가죽 자루를 꽉 끌어안았다. 곧 형을 잃게 될 것임을 알았다. 이미 아버지를 잃었는데 이제 형까지 잃게 되었다. 여수우는 위험을 감수하고 남회성의 형장에서 그를 구해 집으로 데려왔다. 그러나 아소륵의 집은 전과 달랐다. 그를 아껴주던 사람들은 전부 죽었다.

“소마가 지금 내 모습을 못 보게 해다오. 보면 마음이 많이 아플 것이다.”

여수우는 아지랑이처럼 가물가물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아소륵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아소륵, 잘 들어라…… 나는 배신자가 아니다. 나는 파소이 가문의 자손이다. 내가 청양을 배신했다면 아버지의 혼이 하늘에서 용서치 않을 것이다.”

“네, 알아요…….”

“아소륵, 소마를 지켜다오…….”

여수우가 가죽 자루 안에서 손을 내밀었다. 여수우는 눈을 설핏 반짝이며 기대를 품고 제 아우를 쳐다보았다.

“네! 그럴게요!”

아소륵이 손을 뻗어 여수우의 손을 꼭 붙잡고 목 놓아 울었다.

손을 맞잡은 순간, 아소륵은 여수우의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가 그의 몸에서 떠난 것 같았다. 영원히. 던져진 눈덩이 하나가 여수우의 얼굴에 맞아 그의 얼굴을 덮었다. 아소륵은 손을 뻗어 여수우의 얼굴에서 눈가루를 훔쳐내고 풀어진 두 눈을 보았다. 한때 북륙의 대군이었던 사내는 죽는 순간까지도 눈을 감지 않았다. 어쩌면 아소륵의 대답을 미처 듣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제 형의 시체를 끌어안고 온힘을 다해 일어선 아소륵은 고개를 쳐들고 늑대처럼 울부짖었다. 더 많은 눈덩이가 아소륵과 여수우에게 던져졌다. 동륙 연극 무대의 하얀 분가루를 바른 어릿광대처럼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었다.

무사들은 올가미를 던졌다. 철안과 철엽은 피하지 못하고 올가미에 걸려 눈밭에 넘어졌다. 군마는 그들을 끌고 형장을 빠져나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갔다.

“계속 형을 집행해라!”

액일돈달뢰가 명령했다.

무사들은 억지로 여수우의 시체를 아소륵에게서 떼어냈다. 아소륵은 반항할 수 없었다. 칼도 바닥에 던져버렸다. 시체가 형장 중앙에 던져지고 기병 무사 8명이 다시 모여들었다. 그들은 둥글게 에워싸고 여수우의 시체를 마구 짓밟았다. 늑대 떼가 양 한 마리를 갈기갈기 찢어 먹어치우는 것 같았다. 여수우의 시체는 말발굽 아래에서 점점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핏덩어리로 변해갔다. 쌓인 눈과 흙이 핏덩어리로 튀면서 거뭇한 흙과 붉은 혈장, 하얀 눈이 한데 뒤섞였다.

인파 속에서 쩌렁쩌렁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원수의 피비린내에서 위안을 얻었다.

아소륵은 눈밭에 앉아 물끄러미 소마를 쳐다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마를 마주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아소륵은 마침내 지척에서 소마를 만났지만, 차라리 자신의 눈이 멀어 멍한 그녀의 얼굴이 안 보였으면 싶었다. 아소륵은 달려가 소마를 안아줄 엄두도 나지 않았다. 소마는 안으면 가루가 되어 부서질 것 같았다.

소마는 목 깊숙이에서 모호하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했다. 그녀는 천천히 눈밭에 쓰러지며 정신을 잃었다. 치마 아래로 새빨간 피가 흥건하게 고였다. 유산이었다. 그녀와 여수우의 유일한 아이를 잃었다.

많은 골칫거리를 덜어낸 알적근 가문 가주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영씨 부인이 소마에게로 달려가 그녀를 덥석 안아들었다. 나이를 많이 먹었지만 여전히 몸이 튼튼한 이 여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형을 집행하던 무사들도 흩어졌다. 눈밭에는 아소륵만 남아서 구역질나는 핏덩어리를 묵묵히 마주하고 있었다. 여수우의 흔적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형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아소륵은 제 머리를 움켜잡고 천천히 눈밭에 묻었다.

“내 잘못이다! 내 잘못이라고!”

아소륵은 눈밭에 엎드려 헛구역질을 하며 땅을 내리쳤다.

“내가 전쟁에서 졌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을 해쳤어, 내 잘못이다!”

구경꾼들은 흙이 묻은, 더 많은 눈덩이를 아소륵의 머리와 몸에 던졌다. 그러나 아소륵은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온몸이 마비되어 자기 몸이 아닌 것 같았다. 숨 막힐 듯한 비통함만이 날카롭고 강렬하게 느껴졌다. 고통스러워 죽을 것 같았다. 회한이 섞인 슬픔이 칼처럼 아소륵의 몸을 난도질했다. 아소륵은 목 놓아 울 뿐이었다. 그것이 그나마 편안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결국에는 또 이 비겁한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내 잘못이다! 내 잘못! 형님은 역적이 아니야!”

아소륵은 고개를 들어 말을 타고 나란히 서 있는 여응양과 귀족들을 보았다. 그들은 멸시하는 표정을 짓고 있거나 냉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소륵은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다. 눈앞의 이자들이 바로 5로의정회였다. 아소륵의 형을 사형에 처한 것도, 한때 그 형의 발아래 엎드렸던 것도 이들이었다. 가슴에 위험한 분노가 치솟았다. 아소륵은 가장 가까이에 놓인 칼을 주워들고 성큼성큼 여응양에게 다가갔다.

여하가 사자아를 뽑아 들고 여응양의 앞을 막은 뒤 아소륵에게 고함쳤다.

“꺼져라!”

더 많은 무사가 모여들어 여응양의 앞으로 인간 벽을 만들었다. 여하도 무사들도 전부 불안했다. 약해 빠져 보이는 아소륵은 전장에서 귀신처럼 마구 사람을 죽였다. 마지막 청동의 피 계승자이니 누구든 칼을 든 아소륵을 마주하면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놔둬라!”

여응양이 나직이 외쳤다.

여하는 하는 수 없이 길을 터주었다. 아소륵은 여응양의 말 앞으로 걸어갔다. 손에 든 칼이 살며시 떨렸다. 아소륵은 여응양의 냉담한 얼굴을 보자 가슴에 쌓인 살기가 돌연 연기처럼 사라졌다. 아소륵은 여응양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를 죽인다 해도 여수우를 되살릴 수는 없었다. 아소륵은 완전히 지쳐 버렸다. 자신은 너무나도 나약한 사람이라 무엇을 한들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사랑하는 막내아우야, 이 형의 피로 다른 형을 추도하려 칼을 든 것이냐?”

여응양이 위아래로 아소륵을 훑으며 물었다.

아소륵은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형님, 이제 그만하십시오! 이미 큰형님을 죽였잖습니까……. 청양에 또 누가 대군이 될 수 있겠습니까? 형님뿐입니다! 이미 형님이 대군이고 형님과 대군 자리를 다툴 사람은 없어요……. 한데 이런 것들이 무슨 의미입니까? 성이 함락되면 모두가 죽습니다. 왜 우리가 우리 손으로 가족을 죽여야 합니까? 왜죠? 형님! 그만하세요!”

아소륵은 아이처럼 발을 구르고 두 손을 내젓고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그만해요! 제발요!”

여응양이 말없이 아소륵을 쳐다보다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누구도 헤아릴 수 없는 눈빛이었다. 멸시 같기도 하고, 조소 같기도 하고, 연민 같기도 했다. 우느라 힘이 다 빠진 아소륵은 천천히 땅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눈물이 눈밭에 뚝뚝 떨어졌다.

“아소륵, 내 사랑하는 아우야. 네게 뭐라 해야 할까? 10년 동안 너는 키도 크고 몸도 좋아졌지. 동륙인의 무술도 배우고 동륙인의 병법도 배웠다. 한데 마음은 여전히 나약한 아이로구나.”

여응양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굴 지키겠다면서 큰 소리로 울부짖지만 소리치는 것 말고 무엇을 했지? 네가 지키겠다던 사람들은 다 죽었고 청양은 곧 멸족될 것인데 너는 여기서 소리나 지르고 울기만 하는구나……. 정말 실망이다.”

여응양이 돌연 분노가 가득 어린 얼굴로 고함쳤다.

“너는 청동의 피를 가진 사내다! 이 성의 구세주가 되었어야지!”

아소륵은 물끄러미 여응양을 바라보았다. 거짓 분노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래도록 억눌려 있다가 이 순간 맹렬한 눈보라처럼 터져 나온 분노였다.

여응양 욱달한 파소이. 우물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이 사내는 차분하게 미소를 지은 채 제 형이 말에 짓밟혀 죽는 것도 보았으면서 어째서 이렇게 분노하는 것일까?

여응양이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극도로 지친 듯해보였다.

“너와 비막간처럼 나약한 사람이 무슨 힘으로 청양을 지키겠느냐? 난세의 권력은 가장 강한 사람만이 장악할 수 있다! 나약한 사람은 평생…… 무용지물이다!”

여응양은 그 말을 던지고 말을 몰아 떠나갔다. 기병 대대가 여응양의 뒤를 따라가며 일으킨 눈먼지가 아소륵의 몸에 흩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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