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335화 (335/360)

335

3장. 형제의 난 (10)

수천 명이 금장궁을 앞을 에워싸고 귀족들의 회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청양부에는 수십 년 만에 ‘5로의정’ 제도가 부활했다. 이전의 5로의정 제도는 흠달한왕이 재위하던 시절에 존재했다.

극히 특수한 상황, 가령 대군이 정사를 처리할 수 없을 때만 대귀족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대책을 논의했다. 흠달한왕 때는 초원의 주인이 아직 어렸기 때문에 ‘5로의정’ 제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대군을 심판하기 위해 열렸다.

흠달한왕의 손자, 여수우 비막간 파소이는 대군에 오른 지 1년 여 만에 삭북부와 결탁한 서신이 발견되면서 숙부들을 죽이고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가 대군의 자리를 찬탈한 죄상이 드러났다. 여수우는 삭북부의 악마에게 청양부의 군 정보를 팔아넘겨 자신에게 충성하던 목려 장군을 포함해 청양의 수많은 사내들을 죽게 만들었다.

북도성 전체가 이 일로 진노했다. 그동안 귀족부터 노예까지 거의 모든 사람이 북도성 밖 전쟁터에서 죽어나갔다. 대군은 거듭 성을 나가 삭북부와 싸워야 한다고 고집했고, 그때마다 처참한 피해를 입었다. 이제야 사람들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청양의 모든 귀족은 도망치던 대군이 붙잡힌 모습과 양피지 서신에 쓰인 내용들을 보고는 침묵으로 수긍의 의사를 표시했다. 그리고 대군의 가장 큰 지지자인 9왕 여표은 액로 파소이는 지난번 전쟁 후 자기 장막을 걸어나오지 못했다. 청양의 신궁, 9왕은 활시위가 끊어진 활이 되어 다시는 치명적인 화살을 쏠 수 없었다.

청양은 곧 제 주인의 손에 멸망하게 되었다. 이 일은 한주 초원에 유례없는 웃음거리가 되어 청양의 사내들을 죽어서도 수치스럽게 할 것이었다.

금장궁의 휘장이 휙 젖혀졌다. 청양부에서 파소이 가문에 버금가는 대귀족인 합로정 가문의 가주, 액일돈달뢰가 걸어 나왔다. 앳된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의 뒤로 파소이 가문의 대표 여응양 욱달한 파소이와 알적근, 탈극륵 가문 가주가 걸어 나왔다. 이제 이들 4개 가문이 공동으로 북도성의 미래를 결정했다.

액일돈달뢰는 금장궁 앞에 서 있는 귀족들과 그들의 하인 앞에서 목청을 가다듬고 말했다.

“청양의 역적 여수우 비막간 파소이는 반역의 증거가 명확하다. 그는 청양의 훌륭한 사내들과 내 사랑하는 아버지를 죽였다.”

액일돈달뢰의 눈꼬리가 움찔하며 표정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우리는 그를 낭형(囊刑)에 처하기로 결정했다!”

낭형. 오래된 이름에 모두가 잠시 침묵에 빠졌다. 이어 격분한 누군가가 가슴 앞의 작은 패도를 뽑아들고 소리쳤다.

“인과응보다!”

분노의 감정은 인파 속을 빠르게 번져나갔다. 더 많은 이들이 작은 패도를 뽑아 반짝반짝하게 장화에 닦은 다음 높이 들어 올리고 부족을 배신한 죄인을 내리치듯 내리찍는 시늉을 했다.

칼은 햇살을 받아 반짝였고 여응양은 말없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영씨 부인이 국수 한 그릇을 들고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침상 가에 앉아 아소륵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이마에 자잘한 땀이 맺혀 있었다. 아소륵은 여전히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영씨 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매번 전장에서 돌아올 때면 아소륵은 긴 시간 정신을 잃고 깨어나지 못했는데 절대 부상 때문이 아니었다. 영씨 부인은 그 이유를 알았다. 청동의 피가 점점 아소륵의 몸을 잠식해가고 있었다. 아소륵은 강해졌지만, 한 번도 죽음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했다.

영씨 부인은 뒤돌아 화로에 새 숯을 더 넣었다. 다시 돌아선 그녀는 흠칫 놀랐다.

깨어난 아소륵이 눈을 뜨고 천장의 오색 밧줄에 매달린 작은 방울을 보고 있었다. 생기 없이 멍한 얼굴에 눈동자는 석탄처럼 새카맸다.

“대나안, 깼군요.”

영씨 부인이 살며시 아소륵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이번에는 이레나 정신을 잃었어요.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어제 깼는데 그땐 유모가 없었어요. 전 또 잠들었고요. 너무 힘들어서 깨고 싶지 않았어요.”

아소륵이 나직이 말했다.

“그만 생각해요. 전쟁터의 승패는 대나안 혼자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대나안이 최선을 다했다는 거 우리는 다 알아요.”

영씨 부인이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일어나서 국수 한 그릇 들어요. 계속 굶어서 꼴이 말이 아니에요. 그동안 양젖으로 겨우 연명했다고요.”

영씨 부인이 아소륵을 일으켜 앉히고 국수 그릇을 건넸다. 찐 양고기로 넓은 수타면 위를 덮고 고추를 섞은 참기름을 뿌려 선명한 붉은빛을 냈다.

아소륵은 영씨 부인의 호매하면서도 자상한 얼굴 앞에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마지못해 웃으며 손을 내밀어 그녀가 건넨 국수 그릇을 받았다. 양고기 향과 메밀국수 면의 싱그러운 향이 한데 어우러졌다. 영씨 부인의 요리 솜씨는 언제나 아소륵의 식욕을 돋우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짙은 고기 냄새에 아소륵은 두려움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위가 한바탕 뒤집어지며 아소륵은 ‘우웩’ 하고 시큼한 물을 그릇에 게워냈다.

“유모……. 미안해요…….”

아소륵은 국수 그릇을 보고 또 영씨 부인을 쳐다보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유, 국수 한 그릇 가지고 미안할 게 뭐 있어요. 아직 회복이 덜 되었으니 일단 기름기 많은 거 먹지 말아요. 가서 죽 좀 쑤어 올게요.”

“아직 입맛이 없어요, 유모. 나 좀 더 잘게요.”

“그래요.”

영씨 부인이 담담하게 웃었다.

“난 나가볼 테니 푹 자요.”

아소륵은 천천히 침상에 누워 작은 방울을 쳐다보았다. 영씨 부인에게 왜 토했는지 말할 수 없었다. 방금 꾸었던 꿈 때문이었다. 세상은 한없이 어두웠고 짙은 피비린내가 사방에 자욱이 퍼져 있었다. 아소륵은 포효하며 칼을 휘둘러 마구 베었다. 지칠 줄도 몰랐고 두려움도 몰랐다. 매번 덮쳐오는 피비린내에 아소륵은 고무되었다. 그는 탐욕스럽게 입가에 튄 피를 핥아 먹었다. 그 피맛을 느끼면서 더 짙은 피맛을 기대했다. 피를 원했다, 더 많은 피를…….

아소륵은 영씨 부인의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

“유모, 요 며칠 바깥 상황은 어때요?”

영씨 부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별일 없어요. 불화랄도 돌아왔어요……. 근데 좀 많이 다쳤어요. 대군과 대귀족들이 매일 어떻게 할지 상의했는데 아직 별다른 결론은 안 나왔어요. 이 일은 대나안의 잘못이 아니에요. 대나안의 1만 1천 명도 삭북인 수만 명을 죽였잖아요. 대나안이 대단한 사내대장부라는 거 도성 사람들이 다 알게 됐어요.”

‘다 내가 죽인 거예요.’

아소륵이 속으로 되뇌었다.

청양인 수만 명과 삭북인 수만 명이 아소륵 때문에 전쟁터에서 죽었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아소륵이 벌인 전쟁으로 수만 명이 더 피를 흘렸을 뿐이었다. 아소륵은 너무 약했다. 호언장담했지만 그 일을 해낼 능력이 없었다. 쇄전진의 정수를 익히지 못했고 출병 시간의 기밀도 엄수하지 못했으며 진월 교장도 제때 무너뜨리지 못했다. 하지만 후회하기에는 이미 너무, 너무 늦어버렸다.

“대군께서는 계속 안 오셨나요……. 저를 원망하시죠?”

아소륵이 물었다.

“그럴 리가요. 대군께선 괜찮으세요. 귀족들과 회의하느라 너무 바쁘셔서 그래요.”

영씨 부인이 황급히 말했다.

아소륵은 영씨 부인의 표정을 보고 심장이 철렁했다. 그녀는 저번에 아소륵에게 목려 이야기를 할 때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형님께서…… 저를 많이 원망하시나요?”

무심코 말이 튀어나왔다.

영씨 부인은 한참을 넋 놓고 있다가 살며시 아소륵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그럴 리가요? 생각해보세요, 그럴 리 있겠어요? 형님께서는 대나안을 무척 아끼세요.”

아소륵은 입을 다물고 비호부 기병 1만 명을 내주던 당시 여수우의 눈빛을 가만히 떠올렸다. 형님을 무슨 낯으로 본단 말인가. 형의 두 눈을 다시 마주했을 때 그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딜 함부로 쳐들어오는 것이냐?”

철엽의 노한 호통 소리가 장막 밖에서 들려왔다.

“역적 여수우에 대한 ‘5로의정’의 판결을 알리러 왔다. 북도성 내 모든 귀족에게 알려야 한다!”

냉담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더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장도를 칼집에서 뽑는 소리가 들렸다. 철엽이 칼을 뽑아 그자와 맞서려는 게 분명했다.

영씨 부인이 제지하기도 전에 아소륵은 침상에서 뛰어내려 장막 밖으로 달려나갔다. 눈밭에 알적근 가문 무사 하나가 서 있었는데 등에 소가죽 영기를 꽂고 있었다. 원래는 대군을 대신해 말을 전하는 사람만이 지니는 표식이었다. 그자와 철엽 모두 칼집에서 칼을 반 척쯤 뽑았고 마주보는 눈에는 살기가 등등했다.

“주상?”

철엽은 아소륵을 보고 순간 멍해졌다.

넋이 나간 찰나, 알적근 가문의 무사가 기선을 잡았다. 그는 칼을 뽑아 철엽의 목에 들이댄 채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철엽은 어쩔 수 없이 빠르게 후퇴했고, 마초 더미까지 떠밀렸다.

알적근 가문의 무사가 달려나온 아소륵과 영씨 부인을 보고 한 손으로 등 뒤의 소가죽 영기를 뜯어낸 뒤 또박또박 읊었다.

“‘5로의정회’에서 명한다. 여수우 비막간 파소이는 조상의 영령을 배신하고 삭북부와 결탁해 숙부들을 암살하였으며 자기 아버지를 위협해 대군의 자리를 훔쳤으므로 금일 낭형에 처한다!”

낭형! 그 두 글자에 아소륵과 철엽, 영씨 부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칼을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

장도 한 자루가 알적근 가문 무사의 뒷목을 겨누었다. 소리를 듣고 서둘러 달려온 철안이었다.

“주상! 주상!”

철엽이 소리쳤다.

그 소리에 철안은 놀라 넋이 나갔다. 철엽은 알적근 가문 무사의 칼등을 덥석 붙잡아 칼을 빼앗은 뒤 팔꿈치로 무사의 뺨을 가격해 눈밭에 때려눕혔다.

“이따위 인간은 뭐 하러 신경 써?”

철엽이 제 형의 머리를 툭 밀쳤다.

“주상…… 주상께서 달려 나갔잖아!”

철안은 오싹해져 뒤를 돌아보았다. 비단 침의(寢衣)만 걸친 아소륵이 비틀거리며 눈밭을 달려가고 있었다. 영씨 부인도 놀라 쫓아갔다.

다급해진 철안은 알적근 가문 무사의 몸을 발로 세게 밟고 소리쳤다.

“단칼에 네놈을 죽였어야 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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