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334화 (334/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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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형제의 난 (9)

그 시각, 달빛이 북도성 남문 성벽 위를 비추었다. 두 사람이 검은색 담비 외투를 걸치고 차가운 바람 속에 서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의 입가에서 희미하게 붉은 빛이 점멸했다.

“시간이 거의 다 됐군.”

알적근 가문 가주가 입에서 담뱃대를 빼고 성 아래로 손을 흔들었다.

알적근 가문의 무사들이 어둠 속을 더듬으며 성문으로 달려갔다. 철제 빗장을 열고 십수 명이 함께 성문을 밀었다. 최대한 조용히 움직였지만 무쇠 지도리에서 나는 오싹한 소리는 적막한 밤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멍청한 놈들!”

알적근 가문 가주가 나직이 호통 쳤다.

다행히 아무도 듣지 못했다. 알적근 가문의 무사들이 이미 이 성문을 접수했고 반경 2리 안에는 알적근, 탈극륵 가문의 측근 무사들이 아니면 들어오지 못했다.

탈극륵 가문 가주가 손을 내두르자 궁술에 정통한 무사 500명이 양측으로 학익진을 펼쳤다. 이들은 화살을 얹고 활시위를 당겼다.

성 밖은 조용했다. 하얀 눈밭에는 그 어떤 생명의 흔적도 없었다.

새카만 마차 두 대가 학익진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성을 나갔다. 마차마다 정예 기병 20명이 호송했다. 이들은 칼과 활, 갑옷까지 완비했고 마차를 모는 사람도 1장 7척 길이의 긴 창을 차고 있었다.

마차가 성을 나서자마자 성문이 닫혔다. 무사들은 활시위를 풀고 약속이나 한 듯 관자놀이의 땀을 닦았다. 주인이 성을 열라 하니 어쩔 수 없어 따랐으나 다들 두려웠다. 삭북의 흰 늑대가 성 밖에 매복하고 있다면 문을 여는 순간 돌격해 올지도 몰랐다. 양가죽을 걸친 늑대 기병이 혹한의 추위를 견디며 태납륵강 가에서 오랜 시간 매복하고 있던 모습을 직접 본 사람도 있었다.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일이었지만 늑대 기병이라면 별로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청양인은 다들 늑대 기병이 사람이 아니라 마귀이기 때문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알적근 가문 가주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작은 마차 행렬이 멀어져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더 앞으로 나아가면 삭북인이 붉은 깃발을 꽂아둔 지점이었다. 피처럼 새빨간 깃발은 밤에 보니 새카맸다. 바람을 타고 펄럭이는 모습이 깃대에 박혀 죽은 망령 같았다.

“200보 남았군.”

탈극륵 가문 가주가 그 깃발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마차 행렬은 깃발에 매우 가까워졌다.

그의 말과 함께 스산한 새 소리가 하늘을 가로질렀다.

“대머리 독수리!”

탈극륵 가문 가주의 음성이 떨렸다.

달빛이 비추는 은백색 눈밭 한 부분이 갑자기 뒤집어졌다. 거대한 늑대의 등에 탄 무사가 양가죽을 휙 털어 쌓인 눈을 하늘에 흩뿌리면서 안장의 도끼를 움켜잡았다. 매복하고 있던 늑대 기병 십 수 명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양쪽에서 신속하게 마차로 접근했다. 거대한 늑대 비린내에 사람들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다행히 말들은 냉정을 유지했다. 그들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냄새도 맡지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다가오는 위험을 알아챘다. 군마들이 마차 주위로 모여들고 기병들은 창을 밖으로 겨누며 방어진을 쳤다. 마차를 몰던 사람이 긴 창을 뽑아 들었고 그의 옆에 있던 무사는 장궁을 당겼다.

급속도로 질주하는 늑대의 속도는 사나운 말 못지않았다. 새파란 늑대 눈에 육고기에 대한 갈망이 번득거렸다. 그들이 다가오자 오랜 세월 전장을 경험한 무사들도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알적근 가문 가주는 입술이 말랐다. 담뱃대를 빼고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다셨다. 담비 외투 안, 칼을 쥐는 탈극륵 가문 가주의 손가락 마디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마차를 몰던 무사 둘이 시선을 맞추고 일찌감치 불을 붙여둔 부싯깃으로 수레 앞에 걸어둔 등에 불을 밝혔다. 평범한 등이었다. 다만 겉면이 암홍색 천으로 감싸져 있어 빛이 어둑했다.

늑대 기병들은 그 붉은 등을 보는 순간 동시에 고삐를 바짝 당겼다. 굶주린 늑대들은 눈앞의 신선한 먹잇감을 잃게 되자 분노해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늑대 기병들은 늑대들이 주인의 결정에 복종하도록 쇠 채찍으로 가차 없이 그들의 목을 후려쳤다.

늑대 기병들은 거대한 늑대를 데리고 천천히 마차 행렬 근처로 다가왔다. 앞장 선 삭북 무사가 등불 두 개를 오랫동안 주시하더니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거대한 늑대 십수 마리가 뒷다리를 굽히며 몸을 웅크리더니 마차 행렬 양쪽으로 줄지어 앉았다. 마차를 모는 무사가 벌벌 떨며 말채찍을 휘둘렀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 끔찍한 짐승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모양이었다. 호송 무사들은 더 두려웠다. 기다란 혀를 내뺀 늑대들의 이빨에서 쇠 같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몇 십 걸음을 간 뒤 늑대 기병의 우두머리가 갑자기 나직하게 소리쳤다.

“멈춰!”

호송 무사들이 일제히 말머리를 돌리고 긴장한 채 창을 가로들었다. 성벽 위, 알적근 가문 가주도 바짝 긴장해 담뱃대를 꽉 틀어쥐었다.

“말 한 마리는 남겨라.”

늑대 기병 우두머리가 차갑게 말했다.

무사 하나가 말에서 내려 마차에 올라타고는 자신이 수년간 길러온 준마를 눈밭에 버려두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말은 긴장해 귀를 쫑긋 세운 채 흉곽을 들썩이며 하얀 김을 내뿜었고 마차 행렬은 구사일생의 기쁨에 젖어 남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얼마 가지 않아 뒤편에서 말의 고통스러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보지도 못하고 곧장 내달렸다. 성벽 위의 가주들은 거대한 늑대들이 사방에서 말 한 마리를 에워싸며 다가가 동시에 신체 일부분을 산 채로 잡아 뜯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말의 피에 넓은 눈밭이 붉게 젖어들었고 거대한 늑대들은 손에 넣은 고기 조각을 우걱우걱 씹어 삼켰다.

탈극륵 가문 가주는 아주 천천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위에서 피비린내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마차 행렬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한참 뒤, 밝은 빛 한 줄기가 정남쪽 하늘로 솟아올라 펑 터지고는 꺼졌다. 암호였다. 마차 행렬이 안전한 곳에 도착했을 때 인 가루를 뿌린 화살을 하늘에 쏘기로 했었다. 화살대 안에는 등유를 부어 10리 밖에서도 그 빛을 볼 수 있도록 했다. 탈극륵 가문 가주가 마침내 꾹 참고 있던 숨을 뱉었다. 벌렁벌렁했던 심장도 진정이 되었다.

“여응양 그 자식, 늑대왕 앞에서 그래도 말을 잘 했나보군.”

알적근 가문 가주가 여응양을 칭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에는 누굴 태웠나? 정말 자네 여인들인가?”

탈극륵 가문 가주가 물었다.

“당연히 아니지. 내 큰아들과 막내아들일세. 자네 마차에는 누굴 태웠는가?”

알적근 가문 가주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푸른 담배 연기를 뱉으며 담담한 표정으로 물었다.

탈극륵 가문 가주의 낯빛이 변하며 눈꼬리가 움찔했다.

“큰아들과 막내아들? 아들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했나?”

“도박을 하려거든 크게 걸어야지. 여응양 그 늑대 새끼를 믿을 수는 없지만 첫 행렬은 안전히 떠날 수 있다고 생각했네. 지금 여응양은 우리에게 의지해야 하니 뭔가 성의를 보일 만한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알적근 가문 가주가 오만하게 웃었다.

“이제 마음이 놓이는군. 내가 북도성에서 죽어도 아들들이 어른이 되어 복수를 해줄 테니까. 이제 편안하게 여응양과 한판 놀 수 있겠어.”

탈극륵 가문 가주는 얼이 빠진 채 주먹으로 자기 손바닥을 내리쳤다.

“에이! 나도 참 멍청하군. 나는 마차에 묶어두었던 양 몇 마리 넣었다네!”

알적근 가문 가주가 오랜 벗의 어깨를 토닥였다.

“낙담하지 말게. 여응양이 그리 빨리 반목하지는 않을 걸세. 나도 아직 북도성에 있지 않나? 나도 살아서 이 거지 같은 곳을 벗어나고 싶다네.”

“이제 어떡해야 하나?”

탈극륵 가문 가주가 진지하게 물었다.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온 벗이었다. 줄곧 양쪽 가문은 세력도 막상막하여서 누가 더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알적근 가문 가주에게 진심으로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수우를 죽이는 수밖에.”

알적근 가문 가주가 담뱃대를 성가퀴에 툭툭 털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폐 속의 마지막 담배 연기 한 모금을 내뱉었다.

“여응양이 호의를 보였으니 우리가 보답할 차례야.”

탈극륵 가문 가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여수우가 그리 모시기 힘든 주인은 아니었지.”

“누가 아니라나?”

알적근 가문 가주가 양손을 펼쳐 보이며 대꾸했다.

“하지만 우리 같은 늙은이는 집안부터 생각해야 해. 성이 무너지게 생겼는데 남의 목숨까지 챙길 겨를이 어디 있나?”

북도성 밖, 삭북부 영채. 누염 몽륵화아 알이한이 그의 거대한 늑대를 끌고 영채를 천천히 걸었다. 산벽공은 두 손을 담비 외투 안에 그러모은 채 말을 타고 누염의 뒤를 따랐다.

“북황에 있을 때, 매일 밤을 이리 보냈소. 늑대를 끌고 드넓은 눈길을 걸었지. 가끔은 길을 들었다가 다시 나오지 못할까봐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많은 일을 생각했소.”

“30년을 사색했으면 많은 답을 얻으셨겠지요?”

산벽공이 물었다.

“어떤 일들은 이해가 되었고 또 어떤 일들은 내가 영원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됐소.”

누염이 웃으며 밤하늘에 대고 길게 입김을 내뿜었다. 하얀 김 너머로 근래 들어 드물게 밝은 달이 떠 있었다. 검푸른 밤하늘에 비친 달빛은 가느다랗게 흩어진 눈먼지 같았다.

산벽공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오늘밤 기분이 아주 좋으시군요. 파소이 가문에서 외손자를 되찾아왔기 때문인지요?”

“아니, 내가 핏줄을 아주 중시하긴 하지만 후손이 하나 더 생겼다고 기뻐할 정도는 아니오.”

누염이 차분하게 말했다.

“말해주지 않았소? 내게 아들이라곤 호도로한 하나뿐이지만 후손은 아주 많소. 수천 명에 이르는 붉은 뼈의 용사들이지.”

산벽공은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뗐다.

“자신의 2세들로 이루어낸 군대 말입니까? 사람들이 백랑단은 영원히 누염 몽륵화아 알이한을 배신할 리 없다고, 백랑단에서 늑대왕은 신이라고 이야기할 만하군요…….”

산벽공이 화제를 돌렸다.

“늑대왕을 원망하는 여인들이 아주 많겠지요?”

“원망이라고 할 수 있나?”

누염이 고개를 저었다.

“증오겠지. 그녀들의 눈에 나는 짐승이오. 짐승에게 능욕을 당한 여인들은 원망하지 않소. 증오할 뿐이지.”

“늑대왕 같은 영웅은 본디 초원의 모든 여인이 흠모해야 마땅한 사내인데, 왜 스스로를 마귀화 하셨습니까?”

산벽공은 누염의 붉은 눈동자를 보았다. 눈동자 깊숙이에서 비린내 짙은 피가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다.

“나도 한 여인을 사랑했었소.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지. 내 딸 늑마가 그녀를 빼닮았소.”

누염이 발아래 땅을 힘주어 밟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오래 전 그 여인은 죽었소. 시신도 땅속에서 다 썩었지. 사내는 마지막 귀착지로 여인을 선택할 수 없소. 사내와 여인은 서로 배신할 수도 있고 누가 먼저 죽어서 한 사람만 덩그러니 남을 수도 있으니까. 나약한 자라면 외롭게 눈물을 흘리겠지.”

“그럼 사내가 종국에 돌아갈 곳은 어디입니까?”

“전쟁터요.”

누염이 간단명료하게 답했다.

“전쟁터는 영원히 사내를 버리지 않소. 사람을 더 죽일 수 없을 때는 죽게 될 테니 슬퍼할 시간도 없지.”

산벽공이 고개를 숙여 발아래 새하얀 눈밭을 보았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웃으며 말을 꺼냈다.

“사내는 가끔 정말로 고집스럽지요. 제게 뇌벽성이란 벗이 있는데 그도 늑대왕처럼 냉담한 말로 듣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곤 합니다.”

산벽공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오늘밤 왜 그리 기분이 좋은지 아직 말해주지 않으셨습니다.”

“또 한 번 전쟁이 시작될 거거든.”

“새로운 전쟁요?”

산벽공은 어리둥절했다.

누염이 멀리 남쪽 어둠 속의 보이지 않는 곳을 가리켰다. 북도성이 위치한 방향이었다.

“저 성에서 또 한 번 전쟁이 일어날 거요. 청양부의 사내들이 살아남기 위해 칼을 뽑고 서로를 겨눌 것이오. 우린 가만히 보기만 하면 되오. 짐승 싸움을 구경하듯 재밌을 거요.”

“늑대왕께서 여응양에게 부여한 권력은…… 미끼였습니까?”

“그렇소, 미끼였지……. 하지만 난 진심으로 내 훌륭한 외손자 욱달한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그 미끼를 먹이로 삼키길 바라오.”

누염이 웃었다.

“그가 충분히 강하다면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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