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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형제의 난 (7)
알적근 가문 가주가 냉소를 던졌다.
“우린 그냥 겁쟁이의 진면목을 보려는 것뿐이다. 어떻게 제 숙부들을 죽이고 제 아비까지 죽음으로 내몰았는지, 그리고 또 비굴하게 삭북부에 우리 군 정보를 흘려 수만 명의 청양인을 전장에서 죽게 했는지!”
반찰렬은 섬뜩했다.
“너희가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지는 아느냐? 어쩔 셈이지?”
“증거가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증거도 북도성 수십만 명의 눈보다는 못하겠지. 그들은 곧 그들의 대군이 어떻게 자기 아내와 재물을 가지고 도망쳤는지 직접 보게 될 것이다. 삭북 늑대왕과 언제부터 손을 잡았나? 대군에 오르기 전부터인가? 너는 누염이 북도성에 세운 꼭두각시지?”
탈극륵 가문 가주가 손뼉을 쳤다. 탈극륵 가문 무사 하나가 화살집에서 향전을 뽑아 하늘에 쏘았다.
“멈춰라!”
반찰렬이 고함쳤지만, 이미 늦었다. 향전은 귀를 찌르는 소리를 내며 밤하늘로 쏘아져 들어갔다. 표면에 바른 인(燐) 가루가 공기 중에 마찰을 일으키며 눈부신 빛을 발했다. 금세 북도성의 무사들이 남문에 적의 동향이 포착된 줄 알고 전부 몰려올 것이고 도망치던 대군이 귀족들에게 붙잡힌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반찰렬이 가장 우려하던 일이었다. 아까 향전을 쏘라는 여수우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여수우, 이미 대군의 자리에 올랐다고 너무 자만했다.”
알적근 가문 가주가 차갑게 조소했다.
“누가 너를 그 자리에 올려주었는지 잊었어!”
탈극륵 가문 가주가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여수우는 입모양으로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너를 그 자리에 올렸으니 내릴 수도 있다.”
여수우는 멍해졌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갑자기 일체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성 밖에 대고 소리쳤다.
“대연지를 데리고 가라! 빨리!”
반찰렬이 그와 거의 동시에 칼을 높이 들고 포효했다.
“대군을 보호해라! 전부 쓸어버린다!”
알적근 가문 가주가 휙 손을 흔들었다. 비호부 기병들이 칼을 휘두르며 달려 나가는 순간, 장전(長箭) 수백 대가 활시위를 떠나 그들의 몸을 꿰뚫었다. 다음 순간, 더 많은 화살이 쏟아졌다. 반찰렬은 허벅지를 관통당해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여수우에게로 퍼붓는 화살에 그를 에워싸고 있던 무사들은 고슴도치가 되었다. 여수우에게 충성하던 무사들은 죽기 전 마지막 순간까지 말안장의 방패를 들어 몸으로 제 주인을 엄호했다. 하지만 이미 방패는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여수우를 가운데 에워싸고 자신의 몸과 군마의 시체로 벽을 쌓았다.
여수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쌩 하는 화살 소리와 직접 훈련시킨 무사들의 비명이 들리고 그들의 피가 여수우의 몸에 튀었다.
그를 더욱 슬프게 한 것은 화살 소리가 울리기 전, 성문 밖에서 들려온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누군가가 있는 힘껏 성문을 두드리며 엉엉 울었고 그 여인의 귓가에서 은색 방울이 딸랑딸랑 울렸다.
근처의 성벽 모퉁이 뒤, 여응양과 여하가 말없이 성벽에 기대고 있었다. 그들은 저쪽의 소란한 소리를 들으며 불빛에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았다. 마귀 떼가 마구 날뛰는 것 같았다.
점점 더 많은 횃불이 이쪽으로 몰려들었고 쇠발굽 소리에 귀가 쩌렁쩌렁 울렸다. 곧 북도성 내 전장에 나갈 수 있는 사내들이 모두 모여 대단원의 막이 내리는 광경을 지켜볼 것이었다.
여응양은 제 가슴을 누르며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되었다……. 다 되었어. 시대가 변할 것이다, 달라질 것이야.”
여하는 멍하니 제 형을 쳐다보았다. 똑똑하고 과감한 형이 이렇게 지친 모습도, 또 이렇게까지 기뻐하는 모습도 거의 보지 못했다. 여하는 여응양의 표정이 유난히 낯설게 느껴져 뭐라 말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저쪽에서 누군가가 분노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요란한 소리가 더욱 귀를 찔렀다.
“정말 좋구나……, 이 소리……. 참으로 좋은 시대다…….”
여응양이 천천히 허리를 숙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눈물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형님…….”
여하가 중얼거렸다.
“귀목! 비막간은 끝났다. 들리느냐?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여응양은 여하의 옷섶을 붙잡고 부릅뜬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철심왕의 시대다! 만족인이 구주 대지에 궐기할 것이다!”
여응양이 제 가슴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바로 철심왕이다!”
“말도 안 돼! 대군이 어떻게 첩자란 말이냐?”
대합살은 소식을 듣자마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군은 북도성의 주인이다! 이곳은 그의 집이야! 무슨 이유로 자기 집을 누염에게 팔아먹는단 말이냐?”
“북도성 사람이 다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말도 소용이 없어요. 알적근 가문과 탈극륵 가문 가주들 말로는 금장궁에서 대군과 누염이 주고받은 서신을 찾았다 합니다. 대군이 왕자일 때부터 서신을 주고받았대요. 대군이 누염의 지원을 받아 숙부 셋을 죽이고 선대 대군을 협박해 대군 자리를 물려받았다 합니다. 선대 대군께서는 분노해 돌아가셨고요. 그래서 누염이 선대 대군이 죽자마자 북황에서 돌아온 거랍니다. 이 모든 일을 두 사람이 논의한 것이라고 하고 있어요.”
지친 안정룡은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카락을 그러쥐었다.
“전부 거짓이라는 걸 압니다. 그러나 대군께서 대연지와 반찰렬을 데리고 도망치다 남문에서 붙잡히셨고 북도성의 수만 백성이 그걸 직접 보았습니다!”
“끝났구나…… 끝났어.”
대합살이 비틀비틀 몇 걸음 물러나 침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대군이라 해도 부족을 배신하면…….”
대합살이 갑자기 버럭 소리쳤다.
“비막간 이 멍청한 놈! 제 여인 때문에 죽게 생겼구나!”
대합살은 서서히 평정을 되찾았다. 장막 밖이 웅성거렸다. 북도성 전체가 물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대합살은 지쳐서 맥이 다 풀린 것 같았다. 그가 중얼거렸다.
“정말 소마를 그리도 사랑하는 것이냐?”
12월 그믐, 정오.
금장궁에는 한 사람뿐이었다. 여응양 욱달한 파소이가 금장궁 한가운데 뒷짐을 지고 서서 장막 천장에 금으로 수놓아진 거대한 문양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운무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표범 문양이었다.
소리 없이 장막 휘장이 젖혀졌다.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 들어와 여응양의 뒤에 선 뒤 나직이 마른기침을 뱉었다.
“존경하는 알적근 가문 가주, 통보도 하지 않고 장막에 발을 들여서는 안 되오.”
여응양이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곳은 우리 파소이 가문의 영역이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요.”
여수우가 알적근 가문 가주를 흘긋 보았다. 가늘고 긴 눈꼬리에 서늘한 빛이 번득 스쳤다.
알적근 가문 가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얼굴에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불쾌한 감정을 억누르고 말을 꺼냈다.
“여응양 나안, 바라던 대로 여수우를 끌어내렸지만 아직 나안은 대군이 아닙니다. 벌써 명령을 내리는 건 삼가시지요. 우리에게 한 말, 유효합니까?”
“합로정 가문과 탈극륵 가문의 가주도 밖에 있지 않소? 같이 들어와 이야기를 들으시오.”
여응양이 웃으며 말했다.
알적근 가문 가주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탈극륵 가문의 용맹하고 화도 잘 내는 노인이 장막 휘장을 홱 젖히고 여응양의 앞에 나타났다.
“합로정 가문 가주는? 여러분께 한 약속을 이행할 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소.”
“액일돈달뢰 말입니까?”
알적근 가문 가주의 얼굴에 알아채기 어려운 미소가 스쳤다.
“아직 애입니다. 이런 기밀을 논하는 데는 참여하지 않는 편이 더 좋지요. 제 아버지의 죽음에 연연하며 삭북의 늑대왕에게 복수할 생각뿐입니다. 삭북 늑대왕의 손자인 여응양 나안이 그런 자와 이야기할 것이 무에 있겠습니까?”
여응양이 흠칫했다.
“내 형님을 증오하는 청년의 마음을 이용해서 가주들은 비막간이 정말 청양부를 배신하고 몰래 삭북부에 투항했다고 믿게 만들었군?”
“충동적인 그 아이는 가족을 보호하는 책임을 질 줄 모릅니다. 그런 아이에게 이런 기밀을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탈극륵 가문 가주가 대답하기도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
“어떻게 식솔들을 데리고 무사히 북도성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는 우리에게만 말해주면 됩니다. 늑대왕이 나안에게 주었다는 특권이 거짓이라면…….”
노인의 말투가 흉악한 기색을 띠었다.
“현재 북도성을 실제 통제하는 사람이 우리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여응양이 빙그레 웃었다.
“어떻게 거짓일 수 있겠소? 누염 몽륵화아 알이한, 그분은 내 외조부요. 가족들을 데리고 무사히 북도성을 나갈 수 있소. 내가 말해준 시간에만 성을 나가면 삭북인은 여러분의 행렬을 막지도, 쫓아가지도 않을 거요. 북도성 150리 밖에 이를 때까지 보호도 받을 것이고. 하지만 여러분은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소. 지금 북도성 반경 100리 이내의 모든 사람이 늑대왕의 제거 명단에 올라가 있으니까.”
“나안을 어찌 믿습니까?”
알적근 가문 가주가 여응양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성을 나간 뒤 삭북인의 화살 세례를 맞지 않는다는 걸 우리가 어떻게 알지요?”
여응양은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로 말했다.
“나가보면 알지 않겠소? 오늘밤 첫 행렬을 꾸려 내보내시오. 먼저 부인 몇 명을 내보내 이 죽음의 땅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보면 될 거 아니오. 부인이야 많으니 몇 명 정도는 위험을 무릅쓸 만할 테지. 첫 행렬이 가던 도중에 죽임을 당한다면 나를 죽여 복수하시오. 어차피 나는 어디에도 가지 않고 북도성에 남아 있을 테니까.”
여응양은 은근슬쩍 옷깃을 풀어 헤치며 쇠사슬을 드러냈다. 쇠사슬에는 녹슨 자국이 있는 철패가 걸려 있었다. 백랑단의 명패였다. 죽어간 홍골 용사의 해골에서 떼어낸 것이었다. 여응양은 철패를 만지작거리고 쇠사슬을 긁으며 소름끼치는 소리를 냈다.
“늑대 새끼!”
탈극륵 가문 가주가 나직하지만 표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혀를 악물고 침을 퉤 뱉었다.
“본래 너 같은 놈이 득세할 기회 따위는 없었던 것을.”
알적근 가문 가주가 손을 내밀어 그를 제지하고 여응양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앞으로 북도성에 돌아올 수 없습니다. 원래부터 삭북부와 교섭을 바랐던 우리가 고향을 떠나 평생 초원을 떠돌게 생겼는데, 보상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보상?”
여응양이 살짝 미간을 구겼다.
“현재 북도성에서 인력이고 재력이고 가장 많이 가진 자들이 당신네들 귀족이오. 파소이 가문에 뭐가 남아 보상해 준단 말이오?”
“여응양 나안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우리가 어찌 파소이 가문에서 뭘 앗아갈 수 있겠습니까?”
알적근 가문 가주가 음흉하게 웃었다.
“다만 합로정 가문은 액일돈달뢰의 관리 하에서는 별 가망성이 없어 보이니 대군께서는 그 녀석이 제 아비의 복수를 하도록 전장에 보내시지요. 합로정 가문의 가축과 여인은 저희 둘이 돌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