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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형제의 난 (6)
여수우와 소마가 손을 잡고 금장궁을 나섰다. 어둠 속에서 말 수백 필이 마차 한 대를 에워싼 채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깃발을 들지도 않았고 횃불을 켜지도 않았다. 모처럼 맑은 겨울밤이었다. 달빛이 철갑에 비치며 스산하고 서늘한 빛이 반사되었다. 이들은 얼마 남지 않은 비호부 기병들로 북도성에서 절대적으로 여수우에게 충성하는 무사들이었다.
여수우가 소마를 마차에 태우고 말에 올라탔다.
“출발!”
마차 안에는 이미 여인 하나가 타고 있었다. 선대 대군의 측연지, 늑마였다. 실성한 이 여인은 무슨 일인지 몰라 헝겊 인형을 안고 바르르 떨고 있다가 소마를 보자 긴장했던 표정이 풀어졌다. 소마는 늑마 옆에 앉아 두 팔로 그녀를 끌어안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여수우와 반찰렬이 나란히 마차 옆에서 말을 몰았다. 반찰렬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남쪽 성문으로 나가겠습니다. 그곳을 지키는 천부장은 대군께 충성하는 자입니다. 잘 얘기해두었으니 소식이 새어나갈 일은 없습니다.”
여수우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가는 길 조심해라.”
“늑대왕이 도살령을 내렸다고 해도 우리가 900명으로 대연지를 호송해 성을 나가리라고는 생각지 못할 겁니다. 큰 규모의 삭북 대대를 만나지만 않으면 저와 900명이 뚫고 나가 란마부까지 대연지를 호송할 수 있습니다. 가는 길이 순조롭다면 한 달 남짓이면 충분합니다. 안정룡이 가져온 소식에 따르면 지원병을 보내줄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청양부보다는 삭북부를 더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삭북의 늑대 같은 사내들은 도의랄 게 없으니까요. 그러니 대연지를 보호해줄 거라 믿습니다. 대군께서도 마음 놓으십시오.”
“그래, 반찰렬. 다 네 덕분이다!”
반찰렬이 돌연 손을 뻗어 여수우의 손목을 붙잡았다. 반찰렬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잠깐 침묵하더니 결심하고 입을 뗐다.
“대군, 함께 가십시오!”
“나 말이냐?”
여수우는 유달리 침착했다. 그는 웃으면서 반찰렬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북도성은 이미 못 지킵니다! 대군께서 병권을 철진, 철익 장군에게 나누어주셨어도 며칠, 길어야 보름 늦춰질 뿐입니다.”
반찰렬은 잡은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대군, 직언을 용서하십시오. 대군께서 대연지를 내보내는 걸 귀족들이 알게 되면 분명 격노할 겁니다. 누군가는 성문을 열고 투항하자 소란을 피울지도 모르고 금장궁을 포위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철진, 철익 장군도 통제하지 못합니다. 여기 남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성안 사람들은 이미 성을 지킬 수 있다고 믿지 않는 것을요!”
“그렇지……. 하지만 나는 청양의 대군이고 삭북부와의 전쟁도 내가 결정했다. 몰래 아내를 내보내면 대군으로서 성안의 사람들을 마주할 염치가 없을 것이다. 내 얼굴을 밟고 지나가겠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그들의 가족이 모두 전쟁터에서 전사했으니.”
여수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배짱도 없는 겁쟁이다, 그렇지 않으냐?”
“대군,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마십시오. 대군께서도 삭북인들과 목숨 걸고 싸우셨는데 어찌 겁쟁이라 할 수 있습니까?”
반찰렬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대연지를 맞으신 후로 정말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그래, 낙 형제도 그리 말하더구나.”
“대군, 가시죠! 대연지를 위해서라도 함께 가십시오. 만일 대군께서 북도성에서 돌아가신다면, 대연지 혼자서 아이를 데리고 남은 생을 어찌 살겠습니까? 제가 죽는 날까지 대연지를 지키겠지만, 어느 날 제가 죽으면 저리 아름다운 여인을 누가 채가서 아내로 삼지 않는다 어찌 장담하겠습니까?”
“그래도 최악의 결말은 아니지 않으냐…….”
여수우가 나직이 말했다.
“평생을 돌봐줄 누군가가 있으니……. 착한 여인이니 누구든 잘해줄 것이다. 반찰렬, 나는 갈 수 없다. 몹시도 가고 싶지만 나는 청양의 대군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용감하지 않아서 북도성을 지키지는 못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성을 지킬 용기도 없다면 무슨 낯으로 파소이 가문의 선조들을 보겠느냐.”
“누가 성을 지킬 수 있답니까? 북도는 아무도 못 지킵니다!”
반찰렬은 더 좋은 구실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군, 남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
“아니다. 누염은 파소이 가문에 복수하려 한다. 파소이 가문의 자손이 아무도 없으면 그의 분노는 성안의 모든 이에게 미칠 것이다. 나는 누염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그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고 용서를 구할 것이다. 내가 저지른 잘못을, 나의 부족민과 아내를 용서해달라 할 것이다. 늑대왕의 분노는 나를 향해야 한다. 청양부의 주인인 내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이다.”
“누염 그자는 초원 전체를 품을 만큼 야심이 크지만, 일말의 자비도 용납하지 못할 만큼 소심하기도 합니다. 대군!”
“무서울 게 뭐 있느냐? 기껏해야 내 머리를 베어 술잔으로 쓰겠지.”
여수우는 마침내 반찰렬의 손을 뿌리치고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가 나를 따른 지 근 30년인데, 이게 마지막이겠구나……. 줄곧 묻고 싶었다. 나는 좋은 주인이었느냐?”
반찰렬은 여수우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가 이렇게 제 주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지금 반찰렬의 두 눈에는 더없는 진심이 어려 있었다. 반찰렬은 다섯 살 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금장궁에 가 여수우를 만났고 그때부터 심복으로서 이 사내 곁에서 평생 생사를 함께해왔다. 당시 여수우도 사내아이에 불과했다. 연한 갈색의 소매 넓은 옷을 입고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허리춤에는 반찰렬이 난생처음 보는 홍옥이 박힌 작은 칼을 차고 있었다. 여수우는 눈망울을 팽글팽글 굴리며 반찰렬을 한참 보다가 반찰렬의 시선이 내내 제 칼에 꽂혀 있음을 알아채고 호쾌하게 칼을 끌러 땅에 던지며 말했다.
“상이다! 앞으로 나를 잘 따르며 공을 세워라. 소녀들이 다 너를 좋아하도록 좋은 것들을 아주 많이 상으로 주마!”
세월은 유수처럼 빠르게 흘렀다. 30년에 가까운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렀고 제 주인의 눈꼬리에는 가느다란 주름이 생겼다.
눈시울이 촉촉해진 반찰렬은 고개를 떨구었다.
“썩 좋은 주인은 아니셨죠. 본인이 한 말도 기억 못하고 맨날 남 탓만 하셨습니다. 군을 이끌고 전쟁에 나가지도 않아서 저희 심복들이 공을 세울 기회도 안 주시고요……. 주상, 남편으로는 최고이시지만, 다른 면에서는…… 친구가 적당할 것 같습니다.”
반찰렬은 말을 뱉고는 이내 후회했다. 성이 함락되기 직전이라지만 눈앞의 이자는 어쨌든 아직 청양 대군이고 화나면 그의 머리를 벨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여수우는 유달리 차분하게 웃었다.
“사실 나도 그리 생각한다. 나를 새 대군으로 지목한 아버지의 안목이 별로였던 것 같구나.”
여수우는 군마를 세웠다.
“저 앞이 남문이다. 나는 문까지 배웅하지 않고 여기서 나가는 것을 보마. 작별인사를 또 하고 싶지 않구나. 그럴 필요도 없고. 내가 배웅하는 모습을 들키기라도 하면 귀족들이 비난할 게다.”
말 등에서 허리 숙여 인사한 반찰렬은 고개를 들어 마지막으로 제 주인의 얼굴을 한 번 더 보았다. 여수우는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달빛이 반사되어 투명하게 반짝이는 눈밭을 보고 있었다.
반찰렬은 대오를 이끌고 컴컴한 남문으로 걸어갔다. 한참을 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여수우 혼자 덩그러니 달빛 속에 말을 세우고 서 있었다.
한 사람이 성문 그늘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곁으로 간 반찰렬은 말 등에 탄 채로 말했다.
“박이홀, 문을 열어라. 큰 소리 내지 말고.”
“네.”
천부장 박이홀이 나직이 말했다.
박이홀이 성 꼭대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닫혀있던 구리 재질의 성문이 끼이익 마찰음을 내며 서서히 열렸다. 바깥의 달빛이 서늘했다. 바람에 휘말려온 눈이 그대로 반찰렬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어서 성을 나가라!”
반찰렬이 마차를 모는 무사에게 손을 흔들었다.
대오가 쥐 죽은 듯 고요하게 성문 밖으로 향했다. 반찰렬이 천부장에게 나직이 말했다.
“박이홀, 명심해라. 누가 묻거든 반찰렬이 속여서 성문을 열었고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해.”
“네. 근데 어디 가십니까?”
“서쪽, 란마부에 간다.”
반찰렬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든 반찰렬은 엄한 목소리로 호통치듯 물었다.
“누구냐? 박이홀이 아니군!”
달빛이 그자의 얼굴을 비추었다. 낯선 얼굴이었다.
그 순간 북도성 성문이 쿵 떨어졌다. 성을 나가던 중인 비호부 무사 둘이 문에 깔려 죽고 전체 대오는 성 안팎으로 갈라졌다.
“반찰렬! 무슨 일이냐!”
심상찮은 낌새를 눈치 챈 여수우가 큰 소리로 물으며 말을 몰아 성문으로 달려왔다.
반찰렬은 대답할 틈이 없었다. 외팔이지만 칼을 뽑아드는 속도는 보통 사람에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 그는 군도를 낯선 자의 목에 괴고 벽으로 그를 밀어 붙였다. 그리고 몸을 돌려 큰 소리로 외쳤다.
“주상! 오지 마십시오!”
그리고 성벽 위에 대고 소리쳤다.
“문을 열어라! 안 그러면 전부 죽여 버리겠다!”
검은 인영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왔다. 누군가가 구리 관에 봉해둔 불씨로 홰에 불을 붙였다. 다시 홰에서 홰로 화염을 옮겨가며 불을 지폈고 횃불 수백 개가 성문 앞을 환하게 밝혔다. 여수우는 순간 강렬한 빛에 눈이 적응되지 않아 한손으로 눈을 가리고 다른 손으로 낭봉도를 뽑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포위해오고 있음을 소리로 가늠할 수 있었다.
여수우는 칼을 가로놓고 방어하며 소리쳤다.
“삭북인이 성에 들어왔느냐? 반찰렬, 향전을 쏴라!”
반찰렬의 화살집에는 호각이 달린 향전이 하나 있었지만, 그는 쏘지 않았다. 빛 속에서 다가오는 두 사람의 얼굴이 또렷이 보였다. 불현듯 이 예기치 못한 변고의 배후에 어떤 저의가 숨겨져 있는지 깨달았다. 반찰렬은 발로 박이홀을 사칭한 자를 걷어찼다. 그자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반찰렬은 성 안쪽의 무사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대군을 보호해라! 대군을 보호해!”
비호부 무사들은 칼을 뽑아들고 여수우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모두 말을 타고 있었다. 준마 수백 필이 견실한 방어막을 구축하며 칼끝을 밖으로 겨눈 채 여수우를 중앙에 에워쌌다.
상대는 모여드는 그들을 제지하지 않고 밖에서 더 큰 포위망을 만들었다. 북도성 남문 앞에 갑자기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졌다. 수천 명이 텅 빈 공터를 철통처럼 겹겹이 에워쌌다.
마침내 빛에 눈이 적응된 여수우가 천천히 팔을 내렸다. 우두머리의 얼굴이 또렷이 보였다. 알적근 가문 가주와 탈극륵 가문 가주가 양쪽 가문의 무사들에게 에워싸인 채 기묘한 표정으로 여수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손을 들자 양쪽 가문 무사들이 화살을 얹고 활시위를 당겼다.
“반역이냐?”
반찰렬이 말고삐를 잡으며 여수우의 정면을 가로막았다.
“북도성 안이다. 반역자는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다!”
“아니, 우린 반란을 일으키려는 게 아니다. 그저 용감한 청양 대군을 보러 왔을 뿐이야. 고귀한 파소이 가문의 자손이 어떻게 성이 무너져가는 시점에 제 백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내만 데리고 도망가는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