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330화 (330/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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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형제의 난 (5)

“대군!”

다급해진 철익이 일어서려 했다.

철진은 그런 아우를 붙잡으며 손을 내저었다. 철진은 더 말을 얹지 않았다. 묵묵히 허리를 숙인 철진은 두 손을 바닥에 겹쳐 대고 이마를 손에 괴었다. 만족의 가장 엄숙한 예법으로 최고의 약속이자 맹세를 뜻했다. 철익은 잠시 침묵하더니 제 형과 똑같이 절을 올렸다.

여수우의 말이 맞았다. 사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대군의 체면을 세우는 소리밖에 되지 않았다. 북도성의 수천수만 장막에서는 사내고 여인이고 할 것 없이 작은 목소리로 대군의 무능함과 독단을 비판했다. 애당초 삭북부와 회담을 했으면 소와 양 정도만 잃었을 것이라고, 미친 노예 목려가 전쟁을 이끌지 않았다면 사상자가 그리 심각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겨우 열여덟밖에 안 된 아소륵 대나안을, 자신이 동륙에서 배운 병법을 믿은 그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더라면 두 번의 전멸은 없었을 거라고 말이다. 철부도도 멸했고 9왕이 첫 교전에서 구해온 호표기도 멸했다. 매와 같은 귀궁 무사도 겨우 수십 명과 팔 하나를 잃은 우두머리 불화랄밖에 남지 않았다……. 본디 초원의 패주였던 청양부는 신임 대군의 잘못된 판단 몇 번으로 멸족의 위기에 처했다. 그들은 이미 삭북부가 교섭을 원치 않을 정도로 약해졌다.

귀족들은 제 무사들에게 성벽에 올라 수비하지 말라고 부추겼다. 현재 살아 있는 인원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면서 배고파 미친 가난뱅이들이 음식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얌전히 자기 영채나 잘 지키라 했다. 귀족들은 식량을 아껴서 남는 것은 군마를 먹여야 했다. 어느 날 성이 뚫리면 도망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가난한 자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먹을 것만 있다면 목이 떨어져나가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틀 전 빈곤한 목민 수백 명이 한 귀족의 영채를 습격했다. 그들은 서둘러 달려온 무사들에게 영채 밖에서 포위되었다. 한데 모두의 예상과 달리 목민들은 투항하지 않았다. 안에 있던 사람들을 인질로 잡고 찾을 수 있는 것들은 다 찾아 먹어치우고 얼마 안 남은 독주도 다 마셨다. 그런 뒤 전에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귀족 여인들을 겁탈하고 죽였다. 곤드레만드레 취해 갑옷도 걸치지 않고 칼을 들고 달려나온 이들은 차례로 죽임을 당했다.

귀족들은 어떻게 살아나갈지를 걱정했고 가난한 자들은 어떻게 죽을지를 생각했다. 철진은 습격당한 영채에 가보았다. 도처에 남녀노소의 시체가 쌓여 있고 공기 중에는 구역질나는 피비린내가 자욱했다. 빈곤한 목민들은 이렇게 미치광이처럼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고 여인을 강간했다. 철진은 그 영채에 짙게 드리운 죽음의 기운을 느꼈다. 가난한 목민들은 살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쓴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애당초 희망이 없었다.

여수우는 허리춤의 검을 끌러 힘껏 내던졌다. 검은 철익의 앞까지 쭉 미끄러져왔다. 철익은 검을 주워들고 철진과 함께 금장궁을 나갔다. 철진은 금장궁 앞의 구미대독을 뽑았다. 형제는 몸을 돌려 말을 타고 짙은 눈보라 속을 달려 금장궁을 떠나갔다.

여수우는 말없이 멀어져가는 말발굽 소리를 듣다가 고개를 들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옥좌 앞의 텅 빈 공간을 굽어보았다. 전에는 허리를 굽히고 머리 숙인 사람들이 가득 서 있어서 자신이 더없이 존귀하고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다고 느껴졌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도 없이 차가운 공기만 소리 없이 흘렀다. 가난한 목민들의 작은 장막보다도 더 쓸쓸해 보이는 풍경에 형용할 수 없는 혐오감이 들었다.

여수우는 소리 없이 웃으며 옥좌 손잡이를 툭툭 쳤다.

“아버지, 이 자리에 앉아보니 아버지 성격이 왜 그렇게 변했는지 알겠습니다……. 이 자리는 정말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군요!”

황금으로 만들어진 이 옥좌는 정말 세상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데도 어떤 이들은 이 자리를 위해 죽음도 불사했다.

옥좌 뒤의 한쪽 구석에서 반찰렬이 소리 없이 나타나 여수우 곁으로 걸어왔다.

“대군, 준비 다 됐습니다. 언제 출발할까요?”

“나도 준비가 끝났다. 언제든 출발하자.”

여수우는 충직한 심복을 돌아보며 물었다.

“대연지는 어디에 있지?”

딸랑딸랑. 돌연 익숙한 방울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돌아보자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기척도 내지 않고 서 있었다. 여인은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은 넓은 소매 안에 그러모았다. 가장자리에 담비 가죽을 덧댄 쓰개를 덮어써서 얼굴은 반만 드러나 있고 귓가로 은색 방울이 늘어뜨려져 있었다.

여수우가 일어나며 그녀를 불렀다.

“소마.”

대연지 소마가 살포시 고개를 끄덕였다. 여수우는 성큼성큼 다가가 소마의 손을 붙잡았다. 소마의 손은 차디찼다. 그 순간 여수우는 제 아내를 안심시킬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두 손을 거듭 비비며 소마의 손과 마음이 따스해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저는 장막 밖에 있겠습니다. 언제든 출발하실 수 있습니다만, 생각이 바뀌시면…….”

여수우가 고개를 숙이고 나직이 한숨을 뱉었다.

“반찰렬, 네 본의에 어긋나는 일을 시켰다는 거 안다……. 너는 용감한 사람인데 나약한 주인을 두었구나.”

“그런 말씀 마십시오.”

반찰렬은 장막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장막을 당긴 채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저희 심복들은 주상을 따른 그날부터 주상께 목숨을 바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주상께서 용기가 없는 분이 아니라는 거, 압니다.”

반찰렬이 장막을 나가자 거대한 금장궁 안에는 여수우와 소마만 남았다. 여수우는 소마의 손을 붙잡고 시선을 맞추었다. 여수우는 살며시 손을 뻗어 아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는 힘겨우면서도 편안하게 웃어보였다.

“소마, 결국 나는 쓸모없는 사내였구려.”

눈이 휘둥그레진 소마가 그리 말하지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

여수우는 발아래를 보며 잠시 잠자코 있었다. 입이 잘 떨어지지 않지만 반드시 말해야 했다. 어쩌면 그 말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여수우는 용기를 냈다.

“당신 마음속에서 나는 줄곧 아소륵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소…….”

소마가 몸을 흠칫 떨더니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시선을 떨구었다.

“처음 보았을 때 당신은 아직 아이였지. 몹시도 슬프고 절망한 아이였소. 아소륵도 아이였지만 당신 앞에 서서 9왕의 검에 맞서 두 팔을 펼치고 당신을 보호했소. 새끼를 지키는 어미닭처럼 말이오.”

이야기를 시작하자 도리어 마음이 편안해진 여수우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꼬맹이지만……, 아소륵은 자기가 지키고 싶은 사람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지! 당신이 그리 생각하는 것을…… 탓한 적은 없소. 다만 무척 질투가 났다오.”

여수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오늘 당신을 위해 이 일을 할 수 있어 무척 기쁘오. 드디어 아소륵에 비할 만한 점이 생긴 것도 같고, 이제 나도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 같고 그렇구려…….”

소마가 살며시 손을 내밀어 여수우의 얼굴을 감쌌다. 감동한 까닭인지, 아니면 아까 여수우가 손을 비벼서인지 소마의 손에는 온기가 살짝 감돌았다. 여수우는 순간 찡해져 두 팔을 뻗어 아내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소마, 정말 사랑하오……. 처음 당신의 눈을 보았을 때, 이유는 모르겠지만 거의 나를 불태워버릴 천뢰지화(天雷之火)인 줄 알았소. 난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했소. 없는 것도 내가 바라면 손에 넣을 수 있었지. 나는 어떤 것에도, 누구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았소. 보도(寶刀)며, 명마(名馬)며, 여인이며 없어지면 새로 생겼지. 초원은 우리 파소이 가문의 것인데 뭔들 없겠소? 한데 당신의 눈을 보자 나는 내가 정말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더군. 반달 천신이 내게 장난을 친 거요. 내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전부 주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멀리 떼어놓았지. 그것은 길들일 수 있는 사나운 말도 아니고 빼앗을 수 있는 보물도 아니오.”

여수우의 목소리가 살며시 떨렸다.

“그것은 내 온 마음을 다해도 얻을 수 없는…… 한 여인의 마음이었소.”

여수우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반달 천신은 나를 불쌍히 여기고 기회를 주었지만 마지못해 준 것이었소……. 나는 늘 내가 아소륵에게서 당신을 훔쳐온 좀도둑 같다고 생각했소. 당신이 항상 날 보고 웃어주기를 바랐고 웃지 않으면 아소륵을 생각하나 싶어 걱정하며 몹시 괴로웠지. 하지만 당신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소. 당신은 아소륵을 구해달라는 것 말고는 내게 뭘 바라지도 않았소. 초원 전체를 가졌음에도 당신을 기쁘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

여수우는 아내의 등을 어루만졌다.

“이제 기회가 생겼소. 나는 당신을 위해 모험을 하려 하오. 사내의 자존심을 모두 걸었소! 이제 나를 믿겠소? 소마,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믿소?”

한참 뒤, 소마가 여수우의 품에서 살포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구려, 그렇다니 나도 후회는 없소.”

여수우는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여인을 놓아주기 싫었지만, 그래도 말을 꺼냈다.

“시간이 다 됐소. 반찰렬이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소. 출발합시다!”

여수우는 소마를 품에서 떼어내고 몇 걸음 물러나 황금 옥좌에 걸쳐둔 새빨간 피풍의(披風衣)를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소마의 손을 붙잡았다.

여수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소마를 보았다.

“유치한 짓을 하나 했소……. 아소륵에게 당신이 나와 아주 잘 지내며 사내아이도 낳아주기로 했다고 말했소. 아소륵이 슬플 걸 알면서도 나는 과시하듯 그리 말했소……. 그러고서도 속으로는 자신이 없었소. 내게 아이를 낳아주겠다고는 했지만, 마지막으로 묻고 싶군. 내게 시집왔기 때문에 아이를 낳겠다 한 것이오, 아니면 당신도 실은…… 나를 좋아하기 때문이오?”

소마는 잠자코 여수우를 쳐다보았다. 소마의 눈을 읽을 수가 없었다. 깊고 고요한 눈동자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물처럼 모든 감정을 집어삼켰다. 여수우는 그 눈이 조금 두려웠다. 그의 눈으로는 영원히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여수우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사내가 돼서 참 주절주절 말이 많군.”

여수우가 돌아서려는 찰나, 소마가 여수우의 손을 붙잡았다. 여수우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 소마가 묵묵히 그의 손을 아랫배에 가져다댔다. 여수우는 배에서 전해지는 작은 심장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덩달아 자기 심박도 빨라지는 것 같았다.

소마는 여수우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

우리 아이가 자기 아버지를 닮았으면 좋겠어요.

여수우는 한숨을 쉬며 자조하듯 웃었다.

“녀석의 아비는 비겁한 사내요. 당신 아들이 비겁하기를 바라오?”

소마는 그의 손바닥에 계속 써내려갔다.

자기 아버지처럼 아내를 사랑했으면 좋겠어요.

순간 여수우의 가슴에 온기가 흘렀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머리를 긁적이며 얼굴에 교차하는 만감을 웃음으로 감추었다. 여수우는 동륙 책에서 ‘만감이 교차하다’라는 표현을 배웠는데, 처음으로 그 의미를 깊이 체감했다. 순간 지난날의 괴로움과 울분이 한꺼번에 솟구쳤지만, 가슴에 흐르는 온기가 모든 감정을 씻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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