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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형제의 난 (4)
“호도로한이…… 거절했다고? 교섭을 거절하기만 했느냐? 다른 말은 없었고?”
여수우가 여응양의 눈을 보며 물었다. 여수우의 안색은 종잇장처럼 창백했다.
“그가 정확히 뭐라 했지?”
“내 앞에 서 있는 건 누구지? 핏줄에는 우리 알이한 가문의 피가 흐르지만 실상은 청양의 유세객? 늑대왕께서 만나지 않겠다고 하셨다. 무릎을 꿇고 그분의 발에 입 맞추며 네 외조부를 위해 목숨을 바치든가 당당한 파소이 가문의 사내처럼 그분의 칼이 네 목을 내리치기를 기다리든가 하라신다.”
여응양이 천천히 말을 전했다.
여수우는 한참을 침묵했다. 어마어마한 피로가 그를 뒤덮었다. 그는 무력하게 황금 옥좌에 기대 멍하니 여응양의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여응양은 무표정한 얼굴로 묵묵히 옥좌 앞에 서 있었다. 얼굴선은 칼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여수우가 나직이 말을 꺼냈다.
“날 원망하느냐? 욱달한, 교섭 사절로 가서 네 외조부에게 모욕만 당했구나.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출발 전에 이미 예상했습니다.”
여수우는 의아해하며 눈썹을 치켜뜨고 여응양을 쳐다보았다.
“예상했다고?”
“가장 아끼는 두 딸을 평화 협정의 패로 삼는 자입니다. 그런 아비가 딸들이 낳은 자식을 신경 쓰겠습니까? 누염 몽륵화아 알이한…….”
늑대왕의 이름을 말하는 여응양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자를 초원의 영웅으로서 존경합니다. 인간의 나약하고 이기적인 사랑을 배제하고 대단한 일을 해냈지요. 하지만 그자는 제 외조부가 아닙니다. 호도로한도 제 외숙이 아니고요……. 저들이 정말 핏줄에 애정이 있다면 30년이나 기다리지 않았을 겁니다. 고통 받은 딸이 죽고서야 돌아오지는 않았을 거라고요! 나는 저들에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응양의 얼굴에 살짝 경련이 일었다.
“대군, 그러니 저는 청양인입니다!”
여수우가 고개를 숙이고 또 다시 침묵에 빠졌다. 한참 뒤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욱달한, 지난날 우리의 싸움으로 인한 상처가 아직 네 마음에 응어리져 있겠지?”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여응양이 조용히 말했다.
“갑자기 어머니가 생각났을 뿐입니다.”
여수우와 여응양의 시선이 맞부딪치고, 금장궁 안에는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여수우가 손을 내둘렀다.
“욱달한, 나가봐라. 삭북인과 교섭하러 성 밖을 나갔던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라. 아소륵에게도 말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여응양이 뒤돌아 떠나갔다.
장막 입구에 이르렀을 즈음 뒤편에서 나직한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욱달한, 당시 네가 왜 나와 대군의 자리를 놓고 다투었는지 대충 이해가 된다. 내가 너였더라도 너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겠지?”
여응양은 놀라 휙 돌아섰다. 여수우는 어느새 황금 옥좌에서 일어나 뒷짐을 지고 천천히 장막 뒤편으로 나갔다.
여응양이 금장궁 밖으로 걸어 나가자 여하가 곧장 달려왔다.
“형님, 어땠습니까?”
여하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그는 경계하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두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성이 곧 함락되게 생기자 금장궁 앞의 호위들도 매일 불안에 떠느라 더는 사냥개처럼 기민하지 않았다.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의심하지도 않았다. 청양부에는 이제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삭북부가 신경 쓰는 것은 북도성 성벽뿐이다. 비막간도 삭북인이 지금 교섭에 응할 리 없다고 예상했을 거다. 어느 누가 이미 함정에 빠진 사냥감과 거래하는 멍청한 짓을 하겠느냐?”
“그런데도 형님을 보냈단 겁니까? 목숨 걸고 삭북인을 떠보라고요?”
여하가 냉소를 던졌다.
“삭북부가 대군의 사절과는 교섭하지 않고 형님과 거래하려 했다는 건 상상도 못하겠지요?”
“일단 조용히 해라. 가면서 얘기하자.”
여응양이 싸늘한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여하는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두 형제는 각자 말에 올라타고 쌓인 눈을 밟으며 나란히 떠나갔다.
북도성은 어디를 보아도 새하얬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장막에도 두텁게 눈이 쌓였다. 차가운 바람에 양가죽 휘장이 장막에 부딪치며 펄럭이는 소리가 났다. 여응양과 여하는 유령 도시를 걷는 기분이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초원에서 가장 번화한 성이었다. 그러나 양은 전부 다 죽였고 수레를 끄는 느린 말도 거의 다 죽였다. 북도성에는 군마 외에 사람의 숨소리뿐이었다. 월동 준비로 마련해둔 건초는 불 피우는 용도로 쓰였다. 불안한 사람들은 온도에 유난히 민감했다. 그들은 매일 자신의 자그마한 장막에 웅크리고 앉아 화로를 지켰다. 서로를 멀뚱히 쳐다보기만 할 뿐 별다른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장막 천이 엄동설한과 눈보라, 삭북인의 칼과 도끼로부터 방패가 되어주기라도 할 것처럼.
여응양은 말없이 길가의 삭막한 경치를 훑어보고는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가슴을 꽉 막고 있는 공기를 토해내려는 듯 길게 숨을 내뱉었다.
“형님, 걱정이 있으면 제게 말해보십시오.”
여하가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삭북부 영채에 다녀온 후로 근심이 생긴 것 같단 말입니다.”
“귀목, 너는 호도로한을 믿느냐? 외숙부라 불러야 하는 그자가 우리를 북도성의 주인 자리에 앉혀줄 것 같아?”
여응양이 눈꼬리를 치켰다. 눈동자에 밝은 빛이 번득였다.
“그…… 그건 형님이 그랬잖습니까!”
여하는 아연해졌다.
“황금왕과 늑대왕이 내게 한 말이다. 하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
“안 믿는다고요?”
여하는 어리둥절했다. 여응양이 누염을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그의 눈에서 기쁨의 불꽃이 일렁였다. 여하도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더랬다.
“그 무리를 보았을 때 나는 그들이 진짜 늑대 떼임을 깨달았다. 늑대! 아느냐?”
여응양의 목소리에 떨림이 묻어났다.
“늑대는 약한 동류를 죽이면 죽였지 도와주지 않는다. 늑대 떼는 힘의 규칙만을 따른다. 우리의 외조부 누염은 용기와 살육으로 삭북부의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있지. 우리가 삭북부가 갖다 바친 북도성을 받고 그들의 꼭두각시가 된다면 누염과 호도로한이 거들떠나 볼 것 같으냐? 우리를 다른 사냥감과 같이 갈가리 찢어 먹어치우지 않겠어?”
여하는 몸서리를 치며 말을 하지 못했다.
“귀목, 사람은 꼭두각시가 될 수 없다. 늑대 떼에서 살아남으려면 자기 목숨줄을 쥐고 있어야 해!”
여응양이 단호하게 말했다.
“누염 무리에게서 나와 비슷한 냄새를 맡고 무척 기뻤다. 새끼 늑대가 늙은 늑대를 만나 기뻤던 게지. 하지만 새끼 늑대는 늙은 늑대의 기술을 빨리 배워야 한다. 안 그러면 어느 날 잡아먹히고 말아!”
“형님, 생각이 너무 많으신 거 아닙니까? 우린…… 삭북 늑대왕의 외손자잖아요!”
여하가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나는 파소이 성을 쓰지 않느냐.”
여응양이 묵직하게 여하의 어깨를 두드렸다.
“항상 명심해라. 너는 파소이 성을 쓴다. 아주 고귀한 성이지. 네가 파소이 자손의 영예를 버리고 늑대왕에게 가 자비를 바란다면 그건 실수다. 늑대왕은 영웅의 후손을 원한다. 우리 힘으로 그에게 말해줘야 해. 우리는 그에게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동료가 되는 거라고! 저들은 우리를 잡아먹지 못한다. 우리가 그들과 함께 더 큰 영토를 개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하는 여응양의 눈빛을 보았다. 동공 깊숙이에서 화염이 날름거리는 듯 그의 눈은 차가우면서도 뜨겁게 타올랐다. 여하는 입술을 다셨다. 등줄기가 축축해진 것 같았다. 자신이 형을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응양은 여하가 생각도 못해본 것들을 궁리했다. 여하는 잔인한 늑대를 찢어발길 수 있는 무사이지만 마음은 여전히 아이처럼 우매했다.
여하가 고개를 숙였다.
“형님, 아둔한 아우에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 여응양 욱달한 파소이는 평생 타인의 연민에 기대 살지 않았다.”
여응양이 가장 또렷하고, 가장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막간 그 멍청이가 내 마음을 헤아리려 해? 내가 억울함 때문에 그에게 맞서는 줄 아나? 웃기는군!”
여응양의 표정이 흉악하게 일그러지고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내가 바라는 것은 일개 왕자로서의 존엄이 아니다.”
여하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초원 전체를 원하시는 겁니까? 삭북부가 세우는 대군이 아닌…… 진짜 대군이 되시려는 거군요!”
“그렇다!”
먼 곳을 향해 손을 내뻗은 여응양이 천천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손가락 뼈마디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나는 이 초원을 손에 넣을 것이다!”
한참을 침묵하고 있던 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께서 길을 가리키시면 귀목은 그저 따르겠습니다!”
철진과 철익이 금장궁에 들어왔다. 커다란 장막은 텅 비어 있었다. 철진, 철익 형제와 멀리 황금 옥좌에 앉은 여수우 외에는 호위도 하나 없었다.
철진과 철익은 여수우가 중요한 일로 불렀음을 깨닫고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대군!”
“철진 장군, 철익 장군. 두 분께 지시할 일이 있어 불렀소.”
여수우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냉담하고 스산하며 반박하기 어려운 목소리였다.
“네!”
“귀족들의 무사와 노예를 제외하고 쓸만한 사내가 몇이나 있소?”
여수우의 물음에 철진이 대답했다.
“9개 장막의 병력 중에 동원 가능한 무사는 3천여 명 남짓입니다. 대군의 비호부 군사 900여 명에 저희 가문에도 1천여 명이 있습니다. 노예 5천 명도 동원할 수 있고요. 다른 병력은 전부 귀족들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대략 1만 명이군. 20만 무사로 유명한 청양부였는데 이제 동원 가능한 무사가 1만 명뿐이라니…….”
여수우가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1만 명 중에서 훈련 받은 무사 5천여 명은 철진 장군이 지휘하고 노예 5천 명은 철익 장군이 지휘하시오. 내 대독을 철진 장군에게, 내 검을 철익 장군에게 주겠소. 파소이 가문에 충성하는 사내들은 모두 장군들의 명령을 들어야 할 것이오. 항명하는 자는 모두 죽이시오!”
철익은 깜짝 놀라며 황급히 엎드렸다.
“대군,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여수우는 대군의 병권을 둘로 나누어 이들 형제에게 주었다. 청양부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철진은 여수우를 바라보며 매우 느리고 차분하게 말했다.
“북도성은 아직 대군께서 장악하고 계십니다. 자신감을 잃지 마십시오! 저희 형제가 필사적으로 파소이 가문의 존엄을 지킬 것입니다!”
“나는 뛰어난 장군이 아니오. 전쟁도 내 특기가 아니지. 내 권력을 장군들께 준 것도 나 대신 이 성을 지켜달라는 뜻이오!”
여수우가 손을 내두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의 충성을 알지만 더 충성해주기를 바라오. 북도성에는 이제 충성스러운 사람이 얼마 없소.”
“대군 그런 말씀 마십시오…….”
철익은 애가 탔다.
“철익 장군, 요즘 내가 금장궁을 안 나간다고 바깥 상황을 모를 것 같소? 회의를 소집하지 않는 이유도 열어봤자 올 사람이 없기 때문이오. 귀족들은 나라는 대군에게 믿음을 잃고 늑대에게 포위당한 양 떼처럼 허둥대고 있지. 싸울 마음은 이미 없소. 늑대가 언제 공격해올 것이며, 양을 몇 마리나 먹어야 배가 부를지, 자기들까지 먹어치울지 그 생각뿐이라오. 아직까지 나를 찾아와 삭북부와 교섭을 하자 말하는 이가 없는 것도 늑대왕이 성을 도륙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오. 삭북의 늑대왕이 자기가 한 약속을 목숨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목민들도 이미 많은 가족을 잃었소. 식량마저 점점 부족해지니 저들도 내가 아버지보다 못하다며 원망하고 있지. 아버지께서는 최악의 시기에 북도성을 지켜냈는데 나는 거듭 청양부의 병력과 사기만 갉아먹고 있구려.”
여수우가 참담하게 웃었다.
“두 사람이 내 대신 군을 지휘해 성을 지키면 성안의 사람들이 더 믿지 않겠소? 생사가 달린 시기이니 내 체면은 신경 쓰지 마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