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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형제의 난 (3)
“10년요?”
“10년이면 우리가 동륙의 4개 주를 쟁취하는 데 충분하다. 동륙 상인들에게 들었는데 그곳에 있는 수십, 수백 개의 도시들은 북도성보다 휘황찬란하다더구나. 사람들은 층층의 높은 누각에서 살고 기와에는 황금을 잔뜩 칠했다지. 동륙 귀족들은 비단 옷에 보석을 달고 다닌단다. 동륙 여인들은 물처럼 부드럽고 꿀처럼 달콤해서 사내들은 그 여인들을 마셔버리고 싶어 안달이라더군……. 그때쯤이면 이 외숙부는 동륙 황제의 머리를 베고 그의 옥좌에 앉아 수천수만에 달하는 그의 여인들을 안을 것이다.”
호도로한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때가 되면 너도 낡아빠진 북도성이 싫증나 내게 의탁하러 동륙에 오지 않을까?”
“동륙을 공격한다고요?”
여응양의 입에서 무심코 말이 툭 튀어나왔다.
“불가능합니다. 천척해협을 넘을 방법이 없어요.”
풍염 황제의 북벌 이후로 수십 년간 수많은 만족 청년이 복수를 꿈꾸며 만족 기병이 바다를 건너 동륙인의 땅을 짓밟기를 바랐다. 여응양도 한때 청년들과 그 꿈을 이야기하는 데 푹 빠져 있었다. 그러나 곧 그 어려움은 절대 한두 세대 안에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장 큰 장애물은 바다였다. 풍염 황제 이전의 동륙인은 바다 수비에 취약했고 조선술도 만족보다 얼마 앞서지 않았다. 하지만 풍염 황제 때부터 완주 상인들은 바다를 건너 서륙에 가서 황무지를 개간했고 조선술도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완주 조선소에서는 ‘사문 군함’처럼 흘수1)가 깊고 사람을 많이 태울 수 있는 중형 선박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동륙인은 우인에게서 청주의 장선 기술을 배웠다. 장선은 더 가볍고 빠르며 몰기에도 편했다. 만족인 중에는 배를 만들 장인이 부족했고 한주에는 큰 배를 만들 목재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만족 기병이 아무리 강해도 소용이 없었다. 군마가 질주하려면 우선 해안에 올라야 했으니까.
“그 해협이 만족에게는 장애물이나 우인에게는 아닙니다. 장담하건대, 호도로한 전하의 기병이 해안까지 밀고 나가면 우인이 모는 장선 수백 척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산벽공이 담담하게 말했다.
여응양은 전쟁터의 흰색 우전이 떠올라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여응양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산벽공 선생, 당신들은 이 전쟁으로 무엇을 얻습니까?”
“우리는 어떤 전리품도 필요 없습니다. 당신들의 땅도 필요 없어요. 신께서는 충성만을 바랄뿐입니다. 3왕자는 신의 뜻에 따라 호도로한 전하가 동륙의 대윤 제국과 전쟁할 수 있도록 청양의 병력을 빌려주십시오!”
“당신은…… 대윤의 사절이 아닙니까?”
여응양은 믿을 수가 없었다.
“대윤은 곧 망합니다. 신은 이미 그 나라를 버리셨어요.”
산벽공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여응양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여기 오기 전에 상황을 분석해 본 그는 여수우와 순국이 몰래 맹약을 맺어 동륙 황제가 격노했고 그래서 삭북부가 청양과 전쟁을 벌이는 것을 지지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대윤은 삭북부가 초원에서 홀로 강대해지는 것 또한 원치 않을 테니 이번 만남이 교섭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애당초 산벽공이 대윤 황제와 무관하다면……. 여응양은 자신이 곧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변화에 휘말리게 될 것 같았다. 그것은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이지만 미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리의 너그러움을 저버리지 마라. 이런 후한 조건을 얻을 수 있는 자는 다시없다.”
“너그러워서가 아니라 아직은 내가 필요하기 때문이겠지요! 당신들은 북도성을 계속 장악할 파소이 가문의 자손이 필요합니다. 안 그러면 북도를 짓밟더라도 다른 부락의 협공을 받을 테니까요. 우리와 결전을 치르고 나서도 양하, 란마, 소지, 구남부를 상대할 충분한 힘이 있겠습니까?”
여응양은 고개를 쳐들고 호도로한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럴 힘이 없지요. 그래서 북도성을 도륙내지 못하는 겁니다. 당신들을 위해 전쟁에 나갈 청양의 사내들을 모아줄 사람이 필요하니까!”
“욱달한, 넌 너무 똑똑하지. 이 외숙부는 그 점이 기쁘면서도 걱정이 되는구나. 너는 우리 알이한 가문의 총명함을 물려받았다. 너처럼 이리 똑똑한 맹우에게 배신을 당한다면 아주 끔찍하겠어.”
호도로한이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네 말이 맞다. 늑대왕께선 청양부를 멸족시키자 했지만 내가 말렸다. 나는 늑대왕과 달리 영웅이 아니다. 일개 부락의 우두머리지. 내가 불원천리 북도성에 달려온 것은 복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초원 전체의 권력을 얻기 위해서다. 나는 북도성의 주인이라는 헛된 명성은 원치 않는다. 이 허명(虛名)은 계속 청양부에 돌아갈 것이다. 우리는 이 전쟁 이후 파소이 가문과 알이한 가문이 동맹을 맺고 공동으로 북도를 장악하기를 바란다. 양측의 병력이 합쳐지면 초원에는 더 이상 우리를 거역할 힘이 없을 것이다.”
“나를 꼭두각시로 삼으려는 겁니까?”
호도로한은 또 웃었다. 이번에는 청량한 햇살 같은 미소가 아닌 늑대 같은 흉악함이 서린 웃음이었다.
“꼭두각시면 어때서? 이 꼭두각시의 자리를 얻으려는 자가 너 하나인 줄 아느냐.”
“당신들이 원하는 건…… 배신자군요.”
여응양은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숨을 고르고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호도로한은 뒷짐을 지고 장막 밖으로 걸어 나가며 근처의 황금으로 장식된 커다란 장막을 가리켰다.
“사랑하는 조카야, 생각할 시간을 주마. 저기가 내 장막이다. 청양의 영웅이 되겠다면 칼을 뽑아들고 나를 죽이러 와라. 어디 내 목숨을 앗아갈 배포가 있나 보자. 네가 내 조건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아주 따뜻한 내 장막에는 아름다운 여인과 내 약속이 있을 것이다.”
여응양은 황금 장막 앞에 섰다. 문 밖을 지키는 호위는 하나도 없었다. 매서운 바람이 휙휙 불고 장막 꼭대기의 창랑기가 펄럭거렸다.
벌써 밤이 절반이나 지났다. 여응양은 삭북부 영채를 거닐며 눈보라를 맞았다. 그러나 혹독한 추위에도 그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여응양은 실패했다. 그가 무능해서가 아니라 청양의 대세가 이미 기울었기 때문이었다. 전쟁에서 진 부락의 사자는 제 힘으로 뻣뻣하게 고개를 쳐들 수 없었다. 이따금 삭북 무사가 여응양의 곁을 지나갔지만 그들은 여응양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여응양은 외로운 넋이 되어 목적 없이 이곳을 떠도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여응양은 황금 장막 앞으로 걸어갔다. 안에서 시끄러운 피리 소리와 음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내의 거칠고 천박한 웃음소리도 들리고 여인의 요염한 웃음소리도 들렸다. 사내와 여인은 숨넘어갈 정도로 웃어젖히다가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신음을 흘렸다. 피리 소리는 더욱 요란해지고 은은한 술 향기가 어딘가에서 퍼져왔다.
여응양은 너무 추웠다. 따뜻한 곳을 찾아 추위를 피하고 싶었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었다. 뒤돌아 북도성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뎌 장막 휘장을 젖힐 수도 있었다.
여응양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앞으로 가든 뒤로 가든 발을 헛디딜 것만 같았다. 그의 나이 스물아홉. 이번 선택으로 권력의 정점에 오를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었다.
여응양 욱달한 파소이의 생에 가장 긴 시간이었다. 끝없는 눈보라 속에 서서 어디에서 들려오는 것인지 모를 늑대 울음소리를 들었다. 29년의 과거가 밀물처럼 밀려와 오르락내리락 파도쳤다…….
어머니가 생각났다. 붉은 옷을 좋아하던 아름다운 여인은 매번 오만하게 말했었다. 저들의 헛소리를 귀에 담지 말라고, 우리 삭북의 피는 청양의 피만큼이나 고귀하다고! 대연지인 그녀에게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난산 끝에 죽었고 북도성 귀족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희희낙락했다.
바지를 뚫고 들어온 모래가 무릎을 찌르던 고통도 떠올랐다. 여응양은 여하와 함께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고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멸시가 어려 있었다.
“삭북의 늑대 새끼는 아무리 키워도 길들이지 못해.”
누군가가 그리 말했다. 여하는 분노해 부들부들 떨고 눈물을 흘렸다. 여응양은 묵묵히 참았다. 무릎을 꿇고 있으면서도 허리는 꼿꼿하게 세웠다. 절대로 그자들 앞에서 약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저들이 더욱 서슴없이 비웃을 테니까.
여응양은 절망스러우리만치 추웠던 그 밤이 생각났다. 사소한 일로 귀족들이 아버지에게 여응양을 고발했고, 그는 장막에 갇혀 추위에 벌벌 떨었다. 여응양은 깊디깊은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포효했다.
‘언젠가! 반드시! 너희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사람 잘못 봤어. 너희가 잘못 본 그 사람의 이름은 여응양 욱달한 파소이다!’
눈을 꼭 감은 여응양은 고개를 들고 차디찬 눈송이를 맞으며 입을 벌리고 싸늘한 바람을 들이마셨다. 눈보라 너머 늑대들은 포효하고 여인들은 미쳐 있었으며 사내는 큰 소리로 웃었다…….
울컥했다. 눈물방울은 눈시울을 떠나자마자 얼어붙었다.
손을 뻗어 얼굴에 묻은 눈송이를 훔쳐내고 황금 장막의 양가죽 휘장을 젖혔다.
여응양은 화들짝 놀랐다. 장막 안은 딱히 사치스럽지 않았다. 바닥에는 양탄자가 수십 장 깔려 있고 그 위에는 갓 구운 고기와 향기로운 마유주(馬乳酒)가 놓여 있었다. 헐떡거리는 신음은 한쪽 구석에서 서로를 껴안고 있는 여인들이 낸 것이었다. 여응양이 들어가자 그녀들은 바로 떨어져 소리없이 물러갔다. 장막에는 사내들만 남았다. 100명에 가까운 정예 늑대 기병들이 흩어져 술을 마시다가 고개를 들고 말없이 여응양을 쳐다보았다.
가운데의 양탄자 한쪽에는 미소를 띤 호도로한이, 다른 한쪽에는 노인 하나가 앉아 있었다. 노인의 근육은 마른 나무처럼 거무스레하고 딴딴했으며 두 눈은 피가 배인 듯 붉었다. 노인은 위아래로 여응양을 훑어보았다. 포악한 눈에 뜻밖에 한 줄기 따스함이 비쳤다.
“나의 외손자 욱달한이 집으로 돌아왔구나. 북황에 있을 때 너희가 어찌 생겼는지, 날 닮았는지 생각했었다.”
노인이 나직이 말했다.
호도로한과 늑대 기병 전원이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목인사를 했다.
여응양은 노인의 새빨간 두 눈에 잠긴 것 같았다. 피바다에 침몰한 것처럼 저항할 수도, 발버둥 칠 수도 없었다. 여응양의 마음은 유난히 차분했고 심지어 살짝 기쁜 마음도 들었다. 집으로 돌아왔다. 이곳에는 그의 혈통을 조롱하는 이도, 음흉하다며 질책하는 이도 없었다. 그의 입술에 양의 피를 바르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몸속에서 또 다른 여응양이 깨어났다. 여응양 욱달한 알이한. 무리에서 떨어져 태어난 늑대는 난생처음으로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늑대 떼를 만났다.
여응양은 무릎을 꿇고 온몸을 땅에 바짝 엎드렸다.
* * *
1) 배가 수중에 들어갈 수 있는 깊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