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327화 (327/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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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형제의 난 (2)

여응양은 혼자 조용히 장막 안에 앉아 있었다. 밖에는 귀신 숨소리 같은 칼바람이 쌩쌩 불었다. 장막은 언제든 무너질 것 같았고 타오르는 숯도 추위를 몰아내지 못했다. 손가락 마디가 점점 얼얼하게 굳어갔고 무릎도 얼어서 감각이 무뎌졌다. 하지만 여응양은 무쇠처럼 꿈쩍도 않고 반듯하게 앉아 있었다.

여응양은 자신이 이 허름하고 차디찬 장막에서 기다리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가 주인이었어도 이런 방식으로 찾아온 사람의 기세를 꺾었을 터다. 먼저 두렵고 불안하게 만든 다음 협상에서 득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응양 욱달한 파소이는 이런 일로 당황하지 않았다. 상대가 그의 기세를 꺾으려 한다는 것은 대화의 의지가 있다는 것이니 좋은 징조였다. 여응양의 손에 삭북인의 마음을 흔들 패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여응양은 속으로 냉소했다. 삭북인의 이런 행동은 이미 그들의 속내를 드러내는 꼴이었다.

장막 휘장이 젖혀지고 지팡이를 든 자가 걸어 들어와 여응양을 보며 웃었다.

여응양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북도 전체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동륙 노인이었다.

“산벽공 선생이 삭북부를 대표해 저와 교섭하러 나오셨습니까?”

“아닙니다. 회담은 3왕자의 외숙부와 하시게 될 겁니다. 삭북부의 호도로한 세자가 곧 올 거예요. 그보다 저는 3왕자의 진짜 생각이 듣고 싶군요.”

“저는 대군께서 보낸 사자입니다. 하지만 대군께서는 협상 조건을 말씀해주지 않으셨지요. 제가 늑대왕이 원하는 바를 알아내어 전달할 것입니다. 제 생각은 없습니다. 필요치도 않고요.”

산벽공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여응양의 곁에 앉았다.

“3왕자, 저는 3왕자를 잘 안다고 자신합니다. 매우 똑똑하지만 자신을 잘 감추지 못하지요. 정말 다른 생각이 없고 청양 대군을 대신해 삭북부와 회담을 나누러 온 것이라면 혼자 여기 앉아 계시면 안 되고 4왕자와 수행원들을 곁에 두셨어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의 대화를 다 듣고 돌아가서 대군께 당신의 충성을 증명해야 하죠. 하지만 3왕자는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혼자 이 장막에 들어가 쉬고 계시라 했을 때 안 된다고 고집하지 않으셨지요.”

여응양은 마음에서 터져 나온 한 줄기 오싹한 기운이 전신으로 퍼지는 느낌이 들었다. 산벽공의 평화롭고 태연한 눈은 여응양의 위장을 가볍게 간파했다. 이 노인 앞에서 여응양은 아이나 다름없었다. 산벽공이 여응양을 쳐다보며 물었다.

“3왕자, 솔직히 말 못 할 게 뭐 있습니까? 사실 3왕자는 선택지가 많지 않습니다. 청양은 삭북부와 교섭할 패가 없으니 대군의 사자로서는 어떤 결과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북도성이 멸망하게 된 판국에 왜 자신부터 지키지 않는지요?”

여응양은 입술을 꼭 말아 물고 침묵했다.

“나는 파소이 성을 씁니다. 산벽공 선생, 대군께서 나를 외부인으로 본다 해도 나는 여전히 파소이 가문의 자손입니다.”

여응양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내 가문을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 내가 여기 온 목적을 의심한다면 귀목과 수행원들을 모두 들여보내십시오. 나는 대군의 말을 늑대왕에게 전하러 왔을 뿐이며, 그 말은 다른 이들 앞에서는 할 수 없습니다.”

“늑대왕께서는 3왕자를 만나지 않을 겁니다. 청양부에게는 늑대왕의 마음을 움직일 패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대군은 막다른 골목에 처했다는 소리지요.”

가볍게 던지는 산벽공의 말에 여응양은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여응양의 눈빛이 매서워지고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았다.

“산벽공 선생, 잊지 마십시오. 청양부에는 믿음직한 맹우인 동륙의 순국이 있습니다. 순국은 청양부에 판돈을 크게 걸었고 순국 양추송은 청양부에서 얻을 이익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벌써 소식을 전했으니 순국의 대군이 서둘러 오는 중일 겁니다. 순국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 북도성이 버텨주면 삭북부는 30년간 쌓아온 것이 모두 무너지고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산벽공이 담담히 웃었다.

“3왕자, 제가 거래를 원한다고 생각합니까?”

여응양은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누구나…… 거래할 것이 있는 법이지요.”

“맞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다 약점이 있으니 거래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3왕자.”

산벽공이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날카로운 칼처럼 섬뜩한 눈빛이었다.

“신과 거래할 수 있습니까?”

여응양은 실제로 압력을 지닌 듯한 산벽공의 눈빛에 감히 그와 똑바로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노인이 진짜 힘을 드러내자 여응양은 자신이 한낱 개미처럼 나약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온몸에 땀이 흐르고 등 한복판이 축축하게 젖었으며 눈꼬리는 제멋대로 움찔거렸다.

“욱달한, 너와 거래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

장막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이 외숙부다.”

삭북부 세자 호도로한이 장막 휘장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왔다. 온몸을 장식한 금붙이에 여응양은 눈이 부셨다. 호도로한은 유쾌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에 산벽공의 매서운 눈빛이 여응양의 가슴에 드리웠던 그늘도 조금 가셨다. 호도로한은 여응양이 상상도 못한 행동을 보였다. 그는 곧장 앞으로 걸어와 두 손으로 힘껏 여응양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정말 훌륭한 청년이 내 누이의 아들이로군!”

호도로한은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여응양은 순간 느껴지는 호도로한 손의 힘과 따스함에 그가 보인 환대를 밀어내야 할지 말지 망설여졌다. 호도로한이 여응양의 어깨를 잡았던 손을 놓고 곁에 앉았다.

“욱달한, 초원인으로서 우리 솔직하게 이야기해보자. 얘기가 잘 되면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이고 안 되면 내가 외숙부라도 적은 적이니 네 목을 벨 것이다.”

호도로한은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네게 기회를 주고 싶구나.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여수우가 네게 딱히 잘해주지 않았다는 거 안다. 너도 한때 놈을 죽이고 대군이 되려 했었지. 한데 지금은 무슨 연유로 놈에게 목숨을 거는 것이냐? 고작 파소이 가문의 자손이라는 자존심 때문에?”

잠시 침묵하던 여응양은 고개를 떨구고 웃었다.

“좋습니다. 다들 솔직히 말하니 저도 그리 하지요. 저는 청양부의 나안으로 삭북부에 의탁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면 저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뿐더러 영원히 반역자란 죄명을 짊어질 테니까요. 저는 북도성의 정세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비막간은 나와 귀목을 꺼려해 어떤 실권도 주지 않았고 귀족들은 우리를 더 무시합니다. 나는 이곳에 그저 말을 전할 사람으로 왔을 뿐이며 말을 마치면 떠날 겁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호도로한은 여응양의 어깨를 툭툭 쳤다.

“긴장하지 마라. 이리 무쇠 인간처럼 앉아 있으면 등이 쑤시지 않느냐?”

자리에서 일어난 호도로한이 여응양의 등 뒤로 걸어와 두 손으로 힘주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몸의 긴장을 풀면 마음도 편안해질 것이다. 잘 생각해봐라. 어쩌면 네 처지가 그리 형편없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여응양은 완전히 어리둥절했다.

“그래, 청양인에게 너는 삭북의 피가 흐르는 잡종이다. 비천하고 위험하며 속에는 늑대 한 마리가 들어있는 사람이지. 당연히 저들은 네게 권력을 주지 않을 것이다. 설마 저들이 네가 그들의 목을 물어뜯게 해줄 것 같으냐?

호도로한의 커다란 손이 여응양의 어깨 위에서 움직였다. 긴장이 풀리도록 느릿하고 힘 있는 손가락이 어깨를 꾹꾹 눌렀다. 황금왕은 제 여인들에게서 이런 기교를 배웠는지 비천한 노예가 작은 주인을 모시듯 여응양을 시중들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다른 문제다. 네 혈관에는 존귀한 늑대의 피가 흐른다. 우리는 네게 권력을 줄 것이다. 북도성에서 이런 권력을 얻을 자는 없다. 여수우 비막간 파소이도 가질 수 없는 권력이다.”

호도로한의 손이 갑자기 멈추었다.

“권력?”

여응양이 고개를 휙 돌려 호도로한의 눈을 직시하며 천천히 그 말을 반복했다.

“그래, 권력. 우리는 네게 거대한 권력을 쥐어주고 북도로 돌려보낼 것이다. 귀족들은 너를 믿을 것이고 네 발아래 엎드려 은혜를 갈구할 것이다.”

호도로한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호도로한의 얼굴에 이리 다정하고 달콤한 미소가 어릴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 권력이 무엇인데요?”

여응양은 혀가 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살아갈 권력!”

호도로한은 미소를 머금은 채 또박또박 말했다.

“늑대왕께서 이 권력을 네게 하사할 것이다. 청양부에서 네가 좋아하는 이들에게 이 권력을 나누어줘도 된다. 너도 늑대왕께서 북도성에 도살령을 내리는 것을 직접 들었지. 그분은 약속을 지키는 용사다. 지난 수십 년간 그 분이 멸족시키겠다 선언한 영채는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그분의 외손자인 널 위해, 전례를 깰 수 있다. 청양부의 어느 누구든 네가 사면을 내려주면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단 한 사람, 여수우 비막간 파소이는 예외다.”

“엄청난…… 약속이군요.”

“이게 무슨 대수겠느냐?”

호도로한이 양손을 펼쳐 보이고는 걸으며 소리 내어 웃었다.

“더 큰 선물도 하나 준비했다.”

“더 큰 선물이라고요?”

“그래, 북도성은 늑대왕께서 외손자에게 주는 선물이다. 이 정도면 크지 않으냐?”

“북도성을요?”

여응양은 또 한 번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믿지 않습니다. 북도성을 차지하러 왔으면서 빼앗은 후에 내게 주겠다고요? 당신들 눈에는 내가 쉽게 꾐에 넘어갈 아이로 보입니까?”

“원래 네 것이었던 성을 돌려주는 것뿐이다.”

호도로한이 담담하게 말했다.

“네 외조부의 뜻이다. 나더러 네게 전하라 하셨지. 네 외조부께서는 늑대 떼를 이끌고 북방의 설원으로 돌아가실 것이다. 그분은 딸을 무척 아끼셨지만 네 어머니는 안타깝게도 일찍 죽었지. 그 사랑을 네게 주시는 게다. 청양부 파소이 가문과 삭북부 알이한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은 네가 곧 초원의 대군이 될 것이다!”

“내가 초원의 대군이 되면 외숙부께서는 뭘 얻으십니까?”

“사랑하는 조카야, 너는 정말 똑똑하구나. 우리가 그 고생을 하며 천리 길을 와서 수만 명을 죽이고 얻은 것을 쉽게 내줄 리는 없지. 이 외숙부가 자비와 인심을 뽐내러 온 것이 아님을 너도 잘 알 게다.”

호도로한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우리는 30년 전 늑대왕과 여숭이 맺은 맹약을 대신할 새로운 맹약을 너와 맺고자 한다.”

“청양부를 영원히 삭북부의 노예로 만들려고요?”

“아니, 아니다. 욱달한, 네 눈을 보니 알겠구나. 너는 네 아버지처럼 오만하다. 청양의 주인이 되고 싶은 너이니 당연히 청양의 존엄을 짓밟는 맹약을 수락하지 않겠지. 널 곤란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매우 좋은 조건의 맹약이다. 이 맹약에서 청양부와 삭북부는 평등하고 청양부는 영원히 북륙의 왕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대가로 청양부는 삭북부가 바다를 건너 동륙을 정벌하는 데 모든 병력을 지원해야 한다. 우리가 동륙에서 얻은 땅은 모두 삭북에 귀속되며 청양부는 이를 탐해서는 안 된다. 네가 우리의 은혜만 받고 말을 번복하는 일이 없도록 10년 동안 청양부 병력은 삭부부가 지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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