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326화 (326/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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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형제의 난 (1)

금장궁 안. 여수우가 한 손으로 머리를 짚은 채 황금 옥좌에 앉아 있었다. 몹시 지치고 머리는 떨어질 것처럼 무거워 보였다. 여수우 외에는 여응양과 여하뿐이었다. 두 사람은 이렇게 깊은 밤에 갑작스레 불려온 이유를 몰라 서로 쳐다만 보고 있었다. 불화랄이 돌아온 후로 여수우는 누구도 금장궁에 불러들이지 않았고 귀족들 역시 금장궁에 들어 일을 논의하려 하지 않았다.

“욱달한, 네 도움이 필요하다.”

여수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대군을 위해 일할 수 있음은 제 영광입니다. 한데 지시하실 일이 무엇인지요?”

여응양이 손을 가슴에 얹고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양의 사자로 삭북인의 진영에 가 교섭을 해다오.”

“교섭을요?”

여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군, 지금은 교섭이 불가능합니다. 늑대왕은 한번 뱉은 말은 절대 번복하지 않습니다!”

“귀목, 대군께서 말씀하시는데 어딜 끼어드느냐?”

여응양이 눈썹을 찌푸리며 여하를 쏘아보았다.

“대군께서 오래 고심하고 저희에게 맡기신 일이니 반드시 이유가 있겠지요.”

여수우가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었다.

“대단한 이유는 없다. 이미 북도성에는 적에 맞설 사람이 없다. 아소륵은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고 9왕은 몸져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철진, 철익 형제도 부상을 입었고 무사들도 용기를 잃었다. 한 번 더 그런 전투를 하게 된다면 우리는 완전히 무너질 것이다. 북도성을 지키려다가 모두가 전사하느니 회담의 여지가 있는지 알아봐야겠지. 조건이 아무리 가혹해도 모조리 죽어나가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여응양은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누구와든 거래의 여지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늑대왕과도 마찬가지고요. 다만, 대군께서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일는지요?”

여수우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모르겠구나. 그래서 네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욱달한, 늑대왕은 어쨌든 네 외조부이니 교섭을 원치 않는다 해도 널 해치지는 않을 것이다. 너와 귀목이 나서준다면 청양에 기회가 생길 수도 있다. 네가 내 대신 물어보고 늑대왕이 조건을 제시하면 돌아와 말해다오.”

여수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는 네게 미안했다. 너를 사면시키고 데려와 잘 지내려 했지. 한데 의심이 남아 너와 귀목에게 일도, 병력도 안 주고 내내 내버려두었다. 너희는 내가 사면해준 이유가 그저 외부에 나의 인자함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겠지?”

“대군! 감히 그리 생각한 적 없습니다!”

여응양이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저는 잘못을 저지른 죄인입니다. 대군께 불경했던 것을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압니다. 사면해주신 것만도 대군께서는 인덕을 베푸신 게지요. 한데 어찌 감히 원망을 품겠습니까.”

“원망이 없는 건 아니로구나.”

여수우가 힘없이 웃었다.

“욱달한, 나는 너를 안다. 조금의 불만도 없다면 욱달한이 아니지.”

여응양은 흠칫 놀라며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일어나라, 일어나.”

여수우가 휘휘 손을 내둘렀다.

“지금 나는 도움을 청할 곳이 너뿐이다. 너마저 도와주지 않으면 북도성은 정말로 끝이다.”

“목숨을 걸고 대군을 위해 사절로 다녀오겠습니다!”

여응양이 말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좋다. 아직 어두울 때 출발해라. 사람 30명과 빠른 말 30필을 주마.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성을 나가라. 지금 교섭에 관한 일이 밝혀지면 북도성의 민심이 어지러워질 것이다.”

여수우가 또 한숨을 내뱉었다. 며칠 사이 그는 많이 늙었다.

“삭북인과 교섭하는 자는 선조를 모독하는 죄인이다……. 너희를 말하는 게 아니라 나를 말하는 것이다.”

“절대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소식이 새어나가면 저는 반달 천신의 검에 죽을 것입니다!”

여응양은 모진 맹세를 뱉었다.

여수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른 명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귀목, 욱달한과 함께 가라.”

“그럼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죽지 않는 한 반드시 대군께 소식을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여응양이 뒤돌아 걸음을 뗐다.

금장궁 문 앞까지 간 여응양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돌아섰다.

“대군, 한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귀목과 저는 동복 형제로 둘 다 삭북 혈통이지요. 저희가 성을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 점은 진정 염려되지 않으십니까?”

“정말 그러하다면 삭북부에 남아라.”

여수우가 조용히 말했다.

“너희는 내 형제다. 살 기회가 있다면, 예서 나와 죽는 것보다 낫지……. 너희를 배신자라 말할 수는 있겠지만 속으로는 너희를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가봐라.”

“네!”

여응양은 여하의 팔을 잡아당겨 장막 밖으로 나갔다.

금장궁을 나간 뒤 여하는 여응양의 팔을 덥석 붙잡으며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

“형님, 바보 같은 짓 마십시오! 비막간이 말은 저리 하지만 교섭하러 간 일을 성안 사람들이 알게 되면 우리를 배신자로 볼 겁니다. 그때 가서 비막간이 우리를 죽여도 우린 할 말이 없어요. 더구나 삭북 혈통이라고 해도 파소이 성을 쓰는 우리가 어찌 조상을 모독하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비막간이 우리를 죽이려 했다면 그렇게까지 공을 들일 필요도 없다.”

여응양이 여하의 손을 뿌리치며 머리 위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 밤 날씨가 아주 좋구나. 어서 준비하고 출발하자.”

장막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무사 30명이 말을 몰아 다가왔다. 그들은 말 등에서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여하가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서 바람이 쌩쌩 휘몰아쳤다. 언제 또 눈이 내릴지 알 수 없었다. 마귀처럼 아주 고약한 날씨였다. 여하는 무슨 날씨가 좋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도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여하는 칼을 쥐고 여응양의 뒤를 쫓아가며 제 형을 불렀다.

“형님!”

“귀목, 더는 말하지 마라. 난 이미 생각을 굳혔다.”

여응양이 몸을 돌려 말에 올라타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누염 목륵화아 알이한을 만나보고 싶구나……. 그 사내를 보고 싶은지 아주 오래 되었다.”

산벽공과 호도로한은 장막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들 앞에는 새로 구운 양고기와 칼칼한 젖술이 놓여 있었다. 이전까지 호도로한은 멀리서 온 이 동륙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한데 눈 깜짝할 사이에 전장을 뒤엎어버리는 힘을 본 뒤에는 바로 오만함을 내려놓고 적극적으로 산벽공의 장막에 찾아왔다. 두 다리를 잃은 산벽공은 하루만에 회복했다. 전혀 고통스러워하지도 않고, 낙담하지도 않은 듯 보였다. 그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호도로한과 당당하면서도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자께서는 어떤 일에도 꺼려하는 바가 없으시군요.”

“칭찬입니까?”

호도로한의 입꼬리에 한 가닥 미소가 걸렸다.

“저를 무척 싫어하셨다고 늑대왕께 들었습니다. 은밀한 악의를 품고 삭북부에 온 것으로 생각하셨다고요. 한데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제 장막에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시잖습니까. 이는 세자께서 체면이나 오만 때문에 협력을 포기하지 않으며 불필요한 금기(禁忌)가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당연히 칭찬입니다.”

“욕하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호도로한이 태연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제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산벽공이 호도로한의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세자께서 오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벌써 밤새 기다렸지요.”

“그렇습니까?”

호도로한이 눈을 가늘이며 물었다.

“내가 왜 찾아왔다고 생각합니까?”

“협력을 위해서겠지요. 세자께도, 우리에게도 유리한 협력. 저는 늑대왕의 걸음이 북도성 앞에 멈추고 더 나아가지 않을까봐 내내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늑대왕을 지지하는 목적에 반하는 일이니까요. 우리는 삭북부가 초원의 주인이 되고 이어 구주 전체의 주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늑대 기병과 설령가 군마는 완주의 청의강까지 돌격해야 합니다. 그곳에는 감미로운 물과 아리따운 소녀들, 누각이 즐비한 도시가 있지요. 하지만 제가 관찰한 바, 늑대왕께서는 이런 것들을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더군요.”

“불화랄에게 말했던 것처럼 아버지께서는 복수를 위해 오셨습니다. 30년 전의 치욕을 씻고 싶을 뿐이지요. 수하의 무사들이 전장에서 죽고 아버지께서는 몹시 괴로워하셨습니다. 적이 피를 흘려야만 그 고통이 누그러지지요. 아버지께서는 불화랄을 속인 게 아닙니다. 삭북의 늑대왕은 누구에게도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럼 세자는요? 세자께서 원하는 것도 한낱 북도성뿐입니까?”

“아닙니다.”

호도로한의 눈은 술기운과 더불어 흥분한 탓에 반짝거렸다.

“나는 산벽공이 말한 감미로운 물과 아리따운 소녀, 누각이 즐비한 도시를 좋아합니다. 원한도 없습니다. 그저 영토를 넓히고 싶은 생각뿐이지요. 내 바람이 진월의 지지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거래는 성사되었습니다.”

“거래가 성사되었다는 건…… 진월교가 아버지가 아닌 나를 지지하겠다는 말입니까?”

“늑대왕이 아닌 세자를 지지해드리지요.”

산벽공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세자와 손잡고 늑대왕의 권력을 빼앗으려는 것은 아니니 오해 마십시오. 사실 늑대왕께 여쭈어보았는데 북도성만 손에 넣으면 삭북부의 모든 권력을 세자에게 넘기겠다 하셨습니다.”

“모든 권력을 말입니까?”

호도로한은 깜짝 놀랐다.

산벽공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세자는 늑대왕의 아들이지만 늑대왕을 모르시는군요. 설원에서 30년을 유랑한 노인이 진작 죽었어야 할 나이까지 살아남아 고집스럽게 이 전쟁터로 돌아왔지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호도로한이 눈썹을 찡그렸다.

“나이가 들어 고집이 세니까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늑대왕께서는 어떤 목적을 위해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이며 그 염원이 이루어지면 죽을 겁니다. 그 염원은 바로 우리 앞, 멀지 않은 곳에 있지요.”

산벽공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호도로한은 잠시 잠자코 있다가 입을 벌리며 씩 웃었다.

“산벽공 선생은 내 아버지를 그리 잘 압니까?”

“저도 늙었으니까요.”

산벽공이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드시지요.”

호도로한이 잔을 들려는 찰나 누군가가 장막 밖에서 말을 전했다.

“세자, 북도성에서 사자(使者)가 왔습니다!”

“사자?”

호도로한이 짙은 눈썹을 치키며 말했다.

“저들에게는 내걸 만한 패가 없는데.”

“세자의 생질인 여응양 나안과 여하 나안이 왔습니다.”

호도로한이 실소했다.

“생질? 그러고 보니 북도성에 저런 생질이 둘 있었지.”

“가보시지요. 제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선물을 가져왔을 것입니다.”

“선물?”

호도로한이 흠칫 놀랐다.

“아주 큰 선물입니다. 바로 북도성이지요. 여응양 욱달한 파소이. 저는 이자를 압니다. 속내를 아주 깊숙이 감추는 자이나, 강렬한 욕망과 불만이 늘 그를 드러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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