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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요궁(妖弓)의 화살 (19)
아소륵은 왼손으로 영월도를 쥐고 빠르게 물러났다. 늑대 기병들은 미친 듯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노인 하나가 파소이 가문의 광전사 앞에서 압도되기는커녕 도리어 우세했다. 누염의 청동 월이 막강하게 회전하며 아소륵을 한 걸음씩 후퇴하게 만들었다. 아소륵은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거듭 돌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흠달한왕에 비하면 한참 멀었구나. 이런 너도 광전사가 될 자격이 있느냐?”
누염이 무겁게 숨을 몰아쉬었다.
“의마덕, 고랍이, 납과이굉가, 이것은 내 조상의 피다!
조상의 영혼이 어둠 속에서 나를 보고, 내게 존귀한 피와 살을 전해주며, 천신의 축복을 전해주네.
우리는 초원의 왕이 될 운명이고, 세상의 황제가 될 운명이며, 신의 유일한 사자가 될 운명이다.”
아소륵은 갈라진 목소리로 선조들의 이름을 불렀다. 새빨간 눈이 이 요사한 주문 같은 말에 더욱 환하게 빛났다. 아소륵이 휙 앞으로 돌격하더니 발을 내딛고 칼을 휘두르며 대벽지도를 재현했다. 완만한 칼날이 누염의 어깨로 떨어졌다.
“파소이 가문은 망했다.”
누염이 그 말을 뱉으며 청동 월을 어깨에 괴었다.
영월이 월을 정확히 내리쳤다. 그러나 청동 덩어리는 부서지지 않았고 도리어 영월이 튕겨져 나왔다. 누염은 그 순간 손을 뻗어 아소륵의 머리를 붙잡고 높이 들어 올린 뒤 주먹으로 아소륵의 목덜미를 쳐 기절시켰다.
불화랄은 화살을 쏘지 못했다. 누염이 아소륵으로 제 앞을 가로막은 채 싸늘하게 불화랄 쪽을 쳐다보았기 때문이었다.
불화랄은 자신이 실패했음을 알았다. 처음부터 누염은 그들의 전술을 간파하고 완벽한 매복 함정을 설치해두었던 것이다. 그 깃발 두 개는 미끼였다. 누염은 자신도 미끼로 삼았다. 귀궁, 호표기, 대풍부와 비호부 무사까지 전부 죽으려고 자진해서 불속에 뛰어든 불나방이었다.
불화랄은 고개를 돌려 제 뒤를 보았다. 그는 아무도 없이 홀로 전장에 서 있었다. 임무를 마친 우인 궁수들은 말없이 장궁을 활집에 넣고 나머지 우전을 뽑아 철수했다. 늑대 기병들이 천천히 불화랄을 향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철익이 말을 몰아 백랑단에게 다가왔을 때, 늑대 기병 그 누구도 길을 막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은 철익에게 길을 내주었다. 비호부의 남은 군사들은 이미 철수했고 도살을 끝낸 삭북부 무사들은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침착하게 철수했다. 철익이 이곳에 온 이유는 아소륵을 찾기 위해서였다.
아소륵은 한 노인의 무릎에 가로누워 있었다. 그 노인은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등 뒤로 백야창랑기가 펄럭였다.
철익은 그자가 누구인지 알았다. 보아 하니 누염은 그를 기다린 모양이었다. 철익은 투구를 벗고 목례를 했다.
“청양의 철부도인가? 감히 이곳에 오다니 용기가 대단하군. 내 외손자나 데려가라. 청동의 피를 지닌 아이다. 매우 귀한 아이이니 죽게 두고 싶지 않다. 내 영채는 환경이 아주 열악해 이 아이에게 별로 좋을 게 없거든. 이 아이는 성안에서 외조부가 보러가기를 기다려야 한다.”
누염이 철익을 보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이 아이가 깨어나면 이리 전해라. 선조에게 물려받은 광혈로 살인을 하는 것은 표범 발톱을 씌운 양에 불과하다. 제 할아비보다 한참 못해 너무 실망스러웠다. 마음까지 피로 가득 차야만이 진정한 파소이 가문의 광전사라 불릴 수 있다.”
늑대 기병 둘이 아소륵을 들어 철익의 말안장에 데려다놓았다.
“뭘 꾸물대는 게지? 넌 날 못 죽인다. 신문해야 할 포로가 있으니 가봐.”
누염이 손을 내두르며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댔다.
철익이 말을 타고 떠나갔다. 겨우 남은 철부도 무사 수십 명이 멀리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말안장에 전사자의 시체를 얹어두었다. 이 진귀한 갑옷을 북도성으로 가져가야 하는 까닭이었다. 별 쓸모는 없었다. 단시간 내에 이 갑옷을 입고 전쟁할 사람을 길러내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떠나가는 철익의 뒷모습을 보던 호도로한은 마음이 살짝 동요해 허리춤의 장궁을 뽑아 철익의 뒤통수를 겨누었다. 그도 궁술이 꽤 괜찮은 편이라 충분히 명중시킬 수 있었다.
“호도로한, 뭐 하는 게냐?”
누염의 월이 천천히 호도로한의 목덜미를 내리눌렀다.
호도로한은 온몸이 뻣뻣해졌다. 날이 썩 날카롭지 않은 월이 아버지의 손에서 얼마나 많은 목을 베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누염의 외아들이었다. 하지만 그가 사람들 앞에서 누염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한다면 누염은 피에 흠뻑 젖은 월을 내리치고도 남았다.
호도로한은 천천히 활을 거두고 활과 화살을 바닥에 던졌다.
“매우 무척 위험해보이는 아입니다. 살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저들을 보내주었다. 누염 몽륵화아 알이한은 언제나 자기가 한 약속을 지킨다.”
누염도 월을 거두었다.
누염은 아소륵과 철익의 뒷모습을 보며 싸늘하게 웃었다.
“호도로한, 내 아들아. 너는 저 아이가 네 지위에 영향을 끼치게 될까봐 어떻게든 죽이고 싶겠지? 저 아이의 몸에는 내 피가 흐르니 너는 내가 저 아이를 마음에 들어한다고 여기고 꺼리는 게야.”
호도로한은 대답하지 않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산벽공, 어찌 생각하시오?”
누염이 담담히 물었다.
“저 아이는 천구 무사이지만 아직 너무 어린지라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 못합니다. 지금 놓아주면 득이 될 것입니다. 북도성 안의 대귀족들이 우리에게 의탁하려 할 테니까요. 늑대왕이 외손자까지 죽였다면 저들은 투항해봤자 살길이 없음을 깨닫고 필사적으로 싸우든지 남쪽으로 도망쳤을 겁니다. 그럼 우리에게 좋을 게 없지요.”
상도로합음의 목에 타고 있는 산벽공이 말을 이었다.
“더구나 애당초 늑대왕께서 화친으로 청양부와 평화를 거래하셨고 저 아이는 그 화친의 결과이니 핏줄도 당기셨겠지요?”
누염이 입을 씩 벌리고 소리 없이 웃었다.
“맞소. 내가 가장 아끼는 딸 늑마가 낳은 아이지. 나의 늑마는 북쪽 초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었소. 하지만 나는 퇴각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딸을 적에게 시집보냈지…….”
누염은 웃다가 안색이 돌변했다. 격노한 악귀처럼 이마에 푸른 힘줄이 불퉁거렸고 눈빛은 덮쳐들어 물어뜯기라도 할 듯 흉악해졌다.
“늑마는 여숭과 사내아이까지 낳고! 그 아이가 제 외조부에게 무기를 겨누게 했소! 이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오!”
누염의 포효성에 모두가 불안해 벌벌 떨었다.
분노한 얼굴은 한참 뒤에야 서서히 가라앉았고 누염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 아이는 자기가 아소륵 파소이라 했다……. 저 아이의 눈은 여숭을 닮았다. 호도로한, 너는 정말 멍청하구나. 모르겠느냐? 저 아이는 절대 우리 편일 수 없다!”
불화랄은 눈밭에 서 있었다. 왼팔의 잘린 상처에는 핏빛 얼음이 맺혔다. 그는 오른팔로 활을 짚고서야 간신히 바로 설 수 있었다. 그러나 불화랄은 자신이 오래 서 있을 수 없음을 알았다. 몸은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으며 그의 좋은 활도 활등에서 벌써 부러질 듯한 구슬픈 소리가 났다.
불화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눈밭에 형제들이 누워 있었다. 떼 지어 죽은 까마귀 같았다. 목려가 남겨준 투골룡은 그의 발아래 차갑게 식은 채 쓰러져 있었다. 말안장 한쪽에는 가문 대대로 전해온 화살집이 걸려 있고 그 안에는 아직 파갑전 12대가 남아 있었다. 더는 저 화살들을 쏘지 못하리라. 흉맹한 군마는 주인의 뜻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적군 무리에 빠진 불화랄에게 화살이 없는 줄 알고 화살을 주려 필사적으로 돌진해온 것이다. 투골룡은 거대한 늑대의 날카로운 발톱을 연달아 피했지만 우인의 화살은 피하지 못했다. 예리한 화살 한 대가 흰색 꼬리 깃만 남겨둔 채 말의 가슴을 뚫고 들어갔다.
불화랄의 앞에 놓인 투박한 나무 의자에 누염이 앉아 있었다. 옆으로 그의 거대한 늑대가 웅크리고 앉아 있고 누염은 제 늑대의 긴 털을 쓰다듬었다. 모든 늑대 기병이 불화랄을 에워싸고 있었다. 야수 같은 군대는 군기(軍紀)가 매우 엄격했다. 누염이 말이 없으니 늑대 기병들과 늑대도 찍 소리를 내지 않았다.
누염은 자못 흥미롭게 불화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고 불화랄은 음산한 눈빛으로 응수했다.
불화랄은 기다리고 있었다. 누염의 거대한 월이 그의 목을 베기를. 이 기대 하나로 불화랄은 쓰러지지 않고 버텼다. 불화랄은 목려가 죽던 모습이 떠올랐다. 목에서 솟구치던 핏물은 공중에서 펄럭이는 깃발 같았다. 그는 지금 자신의 가슴속 뜨거운 피도 샘처럼 새빨갛게 뿜어져 나올지 궁금했다. 이미 혈관이 다 얼어붙은 것 같았다.
“귀궁 명사수 불화랄. 북쪽에서 오는 길에 네 이름을 들었다. 누군가가 내게 목려는 대비하지 않아도 되지만 불화랄은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고 일깨워주더군. 불화랄이 나를 죽이려 하는데 나는 그자가 어디에 있는지 볼 수조차 없기 때문이라면서 말이야.”
누염이 나직하고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네게는 화살이 없으니 나도 더 이상 누군가를 조심할 필요가 없어졌다. 내 무척 기쁘니 너를 돌려보내주마. 가는 김에 청양의 주인에게 내 선물을 전해라.”
“난 당신을 위해 어떤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살아있을 때 어서 내 목을 베어라.”
“일부러 자비를 베풀어 너를 욕보이려는 것이 아니다. 네 용기를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 경의가 담긴 선물이다. 너를 보며 그 옛날 목려가 떠올랐다. 안타깝게도 마지막에 죽음을 구걸하는 늙은 개가 되어 무척 슬펐지. 너도 죽음을 구걸하려는 게냐? 더는 활을 쏠 수가 없어서?”
“아버지께 마귀의 선물은 받아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누염은 낮게 한숨을 내쉬고 먼 곳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했다.
“오늘날 초원 사람 모두가 누염 몽륵화아 알이한과 그의 무사들이 마귀라고 알고 있다. 남의 여인을 겁탈하고 낳은 아이를 빼앗아간 뒤 사람을 죽이는 늑대 기병으로 훈련시킨다고 하지. 백랑단의 이름을 들은 아이는 울음도 그친다더군. 하지만 30년 전 우리가 여숭에게 패했을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당시 내 수하의 모든 무사는 가정이 있고 아내가 있고 자식과 가축이 있었다. 그 일전으로 늑대 기병의 자손은 이것들을 전부 잃고 빙야의 외로운 야수가 되었다.”
“우리가 너희를 마귀로 만들었다는 건가?”
불화랄이 입꼬리를 실룩이며 차갑게 비웃었다.
“초원의 위대한 영웅, 늑대왕 누염 몽륵화아 알이한이 자신의 잔혹한 범죄 행위를 적의 탓으로 돌리는 건가?”
“아니, 우리는 마귀다. 인정해. 하지만 누구나 다 착한 아이로 태어난다. 안 그런가? 젊은이, 사람이 마귀가 될 때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사실 누구나 마귀가 될 가능성이 있지. 청양인만이 절대적으로 정의로운 건 아니다. 이건 전쟁이다. 전쟁에서는 적과 아군으로만 나뉜다.”
누염이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전쟁터에서 너는 적을 죽이고 자기 사람을 지킬 생각만 하면 된다. 동료의 죽음으로 외로움을 느끼겠지만 적의 피만이 그 외로움을 씻어낼 수 있다.”
“왜인지 아는가? 그게 다 당신의 야심 때문이다! 야심이 없었다면 당신의 무사들은 저리 많이 죽지 않았을 것이고 30년 전 그 패배도 없었을 것이다. 네 무사들도 가정을 잃고 야수가 되지 않았을 것이야! 외로운가? 인과응보다! 너희 스스로…… 자기 가족과…… 모든 걸 망가뜨린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