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322화 (322/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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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요궁(妖弓)의 화살 (17)

산벽공은 전력을 다해 손을 뻗어 허공에 그림을 그렸다. 손가락의 검은색 피가 매우 빠르게 암홍색 안개로 기체화되었다. 산벽공이 빠르게 그림을 그려내자 비술 문양이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영혼의 피가 스민 주문은 비술을 극치로 끌어 올릴 것이었다. 산벽공은 휙 손을 내둘러 공중에 떠 있는 문양을 쓸어냈다. 그와 동시에 양호지정이 다시 한번 폭발했다. 신의 형장(刑場)처럼 전장에 불기둥이 우뚝 솟았다.

상도로합음은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거대한 활을 들고 화살을 세 대씩 걸어 좌우로 쏘았다. 산벽공은 정면에서 다가오는 청양 기병 수백 명을 강하게 공격했고 상도로합음은 거대한 화살로 좌우에서 기습해 오는 작은 대오를 죽였다.

천부장이 이끄는 대오는 힘차게 솟아오르는 불기둥 사이를 빙 돌아갔다. 끊임없이 누군가가 무시무시한 열기에 밀려 말에서 떨어졌고, 폭발해 산산이 조각났다. 좌우의 철안과 철엽도 이미 말에서 떨어졌다. 상도로합음의 과부 동포들은 대체로 커다란 돌덩이를 던질 뿐이었으나 상도로합음의 궁술은 초원인처럼 정확했다. 그는 사람이 아닌 철안과 철엽의 군마를 조준했다. 매번 활시위를 떠난 화살 세 대가 나란히 날아왔다. 7척 길이에 달하는 화살은 내던져진 기다란 창 같았다. 이들은 고작 2척 떨어져 있을 뿐인지라 전혀 피할 틈이 없었다.

철안과 철엽은 돌아가지 않고 곧장 일어나 산벽공을 향해 내달렸다. 그들은 질주하며 화살을 쏘았다. 때문에 상도로합음은 다시 거대한 방패를 들고 방어할 수밖에 없었고 정면의 천부장을 저격할 기회를 놓쳤다. 정면의 대오에는 스무 명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성공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이전의 어느 대오보다도 멀리 돌진한 이들은 산벽공의 얼굴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지금 산벽공이 다시 양호지정을 사용한다면 거대한 충격력은 그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비호부 무사들이 포효하며 군도를 높이 들어올렸다. 그들은 저 노인을 뼛속 깊이 증오했다. 혼자서 비호부 정예병 절반을 죽였고 이는 초원에서 전례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강력한 요괴라 해도 상관없었다. 반드시 저자를 죽여야 했다.

“어리석은 인간.”

산벽공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산벽공이 살포시 한 발을 굴렀다. 바닥에 그려둔 문양이 진동하더니 산벽공의 손가락 사이로 고운 화염이 한 줄기 생겨났다. 화염은 칼날처럼 구부러져 있었다. 산벽공은 무게가 나가지 않는 그 칼을 들고 가볍게 가로 그었다. 단칼에 눈앞 모든 사람의 머리가 베어져 나갔다. 군마들은 계속 앞으로 내달리며 산벽공의 옆을 빠르게 지나갔다. 군마들은 본능적으로 이 노인을 두려워해 그에게 부딪치지 못했고 말 등의 머리 없는 시체들은 이미 산벽공의 머리를 벨 힘이 없었다.

산벽공은 손가락 사이의 화염을 불어 끄고는 스스로 만들어낸 도살장을 군왕처럼 오만하게 마주했다.

이것이 그에게 접근한 자의 말로였다.

그러나 곧 산벽공은 공중을 스치는 검은 인영에 깜짝 놀랐다. 마지막 군마 한 마리의 복부 아래에서 갑자기 사람 하나가 번쩍 나타난 것이다. 그는 말 등을 밟고 공중으로 훌쩍 뛰어오르며 몸을 활처럼 뒤로 젖혔다. 그리고 양손에 든 짧은 창을 산벽공의 정수리로 내리 찔렀다. 산벽공은 주문을 읊고 명상에 빠질 틈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큰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적군 중에서 아소륵이라는 청년 말고도 비술사의 약점을 아는 자가 또 있었던 것이다. 그는 무한한 힘을 소환할 수 있지만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시간이 필요 없는 무사들은 번개처럼 사람을 죽였다.

빛이 번쩍하며 송곳창이 떨어졌다.

“합륵찰!”

아소륵이 소리쳤다. 그 무사는 합륵찰이었다. 시체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무사를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천부장의 말이 지나갈 때 그는 말의 복부에 몸을 숨기고 산벽공에게 접근했다.

상도로합음은 본능적으로 거대한 방패를 높이 들어 산벽공의 머리를 막았다.

합륵찰은 착지하며 바로 몸을 웅크렸다. 은색 송곳창에서 날카로운 침이 튀어나오며 단창(短槍)은 바로 6척 길이의 긴 창으로 변했다. 합륵찰은 송곳창 한 쌍을 거대한 방패 아래로 밀어 넣어 산벽공의 두 다리를 꿰뚫었다. 그는 성공하자마자 즉시 창을 버리고 칼을 뽑으려 했다. 산벽공의 다리는 이미 못쓰게 되었고 과부 무사는 중요치 않았다. 합륵찰의 목표는 황금창랑기였다.

그러나 합륵찰은 칼을 뽑지 못했다. 상도로합음이 방패를 움직였고 산벽공이 손을 뻗어 합륵찰의 이마를 짚었다. 중상을 입고 쓰러졌어야 할 노인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합륵찰의 두 눈을 직시했다. 그의 손바닥이 인두처럼 이글이글 달아올랐다. 산벽공의 다리 상처에서 검붉은 피가 솟구쳐 나왔다. 송곳창이 다리의 근육과 혈관을 망가뜨렸지만 그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못쓰게 된 다리로 꼿꼿이 서 있었다.

“천구.”

산벽공이 나직이 말했다.

“철갑은 영원하리.”

산벽공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 합륵찰의 명치를 눌렀다. 손은 붉게 달궈진 쇠처럼 금홍빛을 띠었다. 산벽공은 전혀 힘을 들이지 않는 듯했다. 그의 손은 합륵찰의 갑옷과 늑골을 헤집고 곧장 가슴으로 들어갔다. 아소륵은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미친 듯이 소리치며 말을 달려 앞으로 돌진했다. 수천 명의 대오가 그를 뒤따랐다. 합륵찰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산벽공의 손이 폐부와 횡경막을 끊어버린 탓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합륵찰의 가슴에 손을 넣은 산벽공은 손바닥을 아래로 내리쳐 그의 심장을 반으로 가른 뒤 손을 뽑아냈다. 새빨간 피가 산벽공의 뜨거운 손에서 부글거렸다.

합륵찰은 힘없이 눈밭에 쓰러졌다.

“아주 잘했다. 오랜 세월 아무도 내 몸을 해하지 못했거늘.”

산벽공이 송곳창 두 개를 뽑아 한쪽에 던졌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얬다.

“상도로합음, 세자의 깃발을 챙겨라. 이곳을 떠나자꾸나.”

상도로합음은 아까부터 이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산벽공을 제 어깨에 둘러메고 한 손으로 깃발을 뽑은 뒤 질주하는 말처럼 철수했다. 아소륵은 깃발을 짊어진 상도로합음의 뒷모습을 보고 따라잡을 수 없음을 알았다. 이 전장에 시체 수천 구가 버려졌지만, 그들은 깃발 하나를 부러뜨리지 못했다. 아소륵은 달려가 합륵찰을 끌어안고 상처를 살폈다.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산벽공의 손은 그 순간 신의 날카로운 칼날로 변해 합륵찰의 오장육부를 망가뜨려버렸다.

“합륵찰…….”

아소륵은 합륵찰을 꼭 끌어안았다. 머릿속에 10년 전 그 연무장에서 희야와 대결하던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합륵찰은 힘겹게 눈을 떴다.

“대나안, 저는 이제 곧 죽습니다……. 북도성을 지켜주세요……. 장군이 동륙에서 대나안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소륵은 말이 나오지 않아 고개만 힘껏 끄덕였다.

“저는 청양인이지만 천구의 신념을 위해 북도성을 사수해야 한다고 대나안을 설득했고 그 결과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것도 부족을 배신한 것이라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대나안께서 많이 망설이셨다는 거 압니다. 전쟁은 대나안께 무척 괴로운 일이니까요……. 그래서 오기 전에 결심했습니다. 제가 죽는 한이 있어도 대나안께서 진군할 수 있는 길을 뚫겠노라고요……. 드디어 해냈습니다…….”

합륵찰의 후두가 떨렸다. 합륵찰은 오로지 성대에 의지해서 말하고 있었다.

“저는 대나안처럼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할 수 있는 게 이 정도뿐입니다…….”

“넌 대단한 천구 무사였다.”

아소륵이 말했다.

“세자……. 제가 이번 생에 영웅처럼 죽을 수 있는 것은 다 세자를 따라 동륙에 가 천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커다란 말을 타고 남회성에 들어가던 날을 꿈에서도 생각합니다. 길 양쪽에 늘어서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던 수많은 사람들, 수많은 깃발과 무기, 우리 말 아래 서 있던 비단옷을 입은 귀족들……. 정말 위풍당당했지요.”

합륵찰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해 한 마디를 뱉었다.

“철갑은…… 영원하리…….”

합륵찰을 안고 있던 아소륵은 그가 정말 숨을 거둔 것 같자 그제야 나직이 말했다.

“영원하리.”

아소륵은 묵묵히 일어나 시체가 널려 있는 전장을 보았다. 진이 다 빠졌다. 강한 신물이 비강에 솟구쳤다. 머리가 터져 나갈 듯이 아팠다. 마음은 북처럼 텅 비어 쿵쿵 치면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아소륵은 문득 알을 낳으려 회유(回遊)하는 청어 떼가 떠올랐고 제 가족에게 목이 잘린 소년이 떠올랐다. 비호부 무사들이 불기둥 사이를 뚫고 지나갈 때 사나운 불이 그들의 피를 태워버렸고 그들은 난폭한 힘에 갈가리 찢겨나갔다. 이 세상은 그의 할아버지 흠달한왕이 말했던 것처럼 진짜 전쟁터였다. 언젠가 그의 벗은 모두 죽을 것이다. 합륵찰처럼. 그들은 이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너무나도 약하고 작은 존재였다. 자신의 목숨도 부지하지 못하니 타인을 지킬 수도 없다.

전방의 비호부 기병은 벌써 백랑단과 맞붙었다. 시각과 후각이 차단된 군마들은 채찍질 아래 일체 아랑곳하지 않고 늑대 떼에게로 돌진했다. 그러나 늑대 기병에 비하면 그들은 너무나도 보잘 것 없었다. 치랑들은 공중으로 훌쩍 뛰어올랐다가 달려들며 곧바로 말의 머리를 때려부수었다. 늑대 기병은 쇠사슬이 걸린 쇠도끼와 거대한 월로 적을 베어 죽였다. 비호부 기병은 어떤 면에서도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귀궁을 위해 길을 터주기는커녕 백랑단에게 모조리 잡아먹힐 판이었다.

후방의 귀궁 1천 명은 철부도의 지원 덕분에 좌우 양봉에서 탈출해 빠른 속도로 다가왔지만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귀궁이 이미 노출되었으니 누염은 반드시 대비를 했을 것이다. 비호부는 백랑단을 갈라놓지 못했다. 좌우 양봉은 전멸 직전이었다. 철익의 철부도도 삭북 기병 대대 에 묶여버렸다. 거만한 기병의 황제가 인파에 파묻혔다. 적의 칼과 검이 이들을 해칠 수는 없었지만 그들 또한 돌격이 불가능했기에 그저 칼을 뽑아 들고 둔하게 칼을 휘둘러 벨 수밖에 없었다.

북도성 안에서는 여수우가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소륵은 불화랄에게 길을 터줄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러려면 막중한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떤 대가도 합륵찰과 죽어간 비호부 무사들이 치른 희생보다 많지는 않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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