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321화 (321/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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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요궁(妖弓)의 화살 (16)

산벽공은 전신의 피가 끓어오르듯 용솟음치는 느낌이었다. 경락(經絡)1)을 흐르는 힘이 구속할 수 없는 한 마리 용처럼 거칠고 사납게 관절에 부딪치며 몸을 박살 낼 것 같았다. 그러나 정신은 말짱했고 머릿속은 거울처럼 맑고 깨끗했다. 왕성한 힘은 계속해서 생겨났고 산벽공은 다시금 자기 힘의 극한에 바짝 다가갔다. 낮에는 보이지 않는 별들이 여전히 대지를 향해 힘을 흩뿌리며 거대한 그물을 형성해 대지 깊숙이까지 파고들었다. 복잡하게 얽힌 선은 산벽공의 몸 옆에서 뒤틀렸다. 힘은 산벽공의 명상에 호응하며 그를 터뜨리려는 듯 몸 안에 모여들었다.

산벽공은 거듭 주문을 외웠다. 노랫소리 속에서 양호지정이 찬란한 태양빛을 뿜어냈다. 격렬한 힘과 불빛이 동시에 하늘로 솟구치며 무리지어 돌진해오는 기병들을 중도에 차단했다. 세차게 밀려드는 열기는 순식간에 사람의 신체 온도를 극치로 끓어올렸다. 어떤 기병들은 현명하게 힘의 충격을 피했지만 열기에 휩쓸리고 말았다. 그들이 화염을 뚫고 나가는 순간 전신의 피가 기화되었다. 그들의 몸은 폭발하는, 피로 가득 찬 가죽자루 같았다.

산벽공은 자기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셀 수도 없었다. 붉은 전포가 하나, 하나 떨어지고 눈밭은 전부 녹아내렸다. 지면이 신의 칼에 갈린 것 같았다.

산벽공은 피로했다. 격렬한 천둥소리 같은 굉음에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 끊임없이 하늘로 튀어 오르는 흙먼지에 시야도 흐릿했다.

아소륵은 연기와 먼지가 가라앉는 순간에만 어렴풋이 황금창랑기의 반짝이는 금빛이 보였다. 무시무시한 빛에 눈이 부셨다. 벌써 몇 명이 죽었는지 아소륵은 알고 있었다. 천부장 셋이 병사를 이끌고 황금창랑기를 향해 돌진했지만 돌아오지 못했다. 비호부대 기병들은 말 등에서 화살을 빽빽이 퍼부었지만 전부 양호지정에서 솟구쳐 나온 화염에 부서지거나 상도로합음의 구리 방패는 피하지 못했다. 산벽공 근처까지 다가간 기병도 상도로합음의 거대한 화살을 피하지 못했다. 거대한 화살은 사람을 말에서 떨어뜨리거나 머리를 박살냈다.

백야창랑기도 접근해오고 있었다. 늑대 기병들은 결코 조급하지 않았다. 한 사람만 출동해도 이쪽의 수만 대군을 막을 수 있었다. 지금 이들이 전장에 들어오는 이유는 더 빨리 청양 기병의 목을 거둬들이기 위해서였다.

아소륵의 뒤편에서는 철부도가 삭북 기병들을 짓밟고 있었다. 팽팽한 쇠사슬에 죽은 자의 시체가 걸렸다. 불화랄을 위해 길을 뚫어야 했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백랑단이 전방에 도착했는데 귀궁 부대가 도착하지 못하면 늑대왕을 죽일 유일한 기회를 잃게 된다. 불화랄이 서둘러 도착했는데 그들이 산벽공의 방해를 뚫고 백랑단을 흩트리지 못해도 불화랄은 백랑단을 바라보며 한숨을 쉴 수밖에 없다. 남은 선택은 단 하나. 목숨을 걸고 길을 헤쳐 나가야 했다. 칼 한 자루, 화살 한 대면 진월 교장을 죽일 수 있었다. 눈앞의 지뢰밭 같은 법진을 뛰어넘기만 하면 되었다.

“다음!”

아소륵이 칼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다음! 호도로한의 깃발을…… 베어내야 한다!”

양호지정이 폭발하는 소리는 귀청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컸다. 굉음에 온 세상이 무너질 듯했다. 아소륵은 정면으로 덮쳐오는 먼지에 서린 거대한 슬픔이 느껴졌다. 원기 왕성한 청년들이 말을 몰고 아소륵의 곁을 질주해 갔다. 커다랗게 갈 지 자를 그리며 위험한 불구덩이를 피하려 했다. 그러나 한 부대, 또 한 부대가 낙마했고 도처는 잘려나간 사지로 가득했다. 다음 부대 무사들은 전우의 시체를 밟고 포효하며 돌격했다.

식연이 해주었던, 가을이면 운중으로 거슬러 올라가 알을 낳는 청어 떼 이야기가 떠올랐다. 청어는 위험한 한운천을 지나야 했다. 그곳에는 교활한 사냥꾼인 갯가마우지와 곰, 위험한 메기 떼 등이 1년 중 가장 풍성한 향연(饗宴)을 기다리고 있었다. 곰은 강의 모래톱에서, 갯가마우지는 수면 위를 떠다니며, 메기 떼는 물속에 가라앉아 입을 벌리고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채 고기 맛 나는 야들야들한 청어를 기다렸다. 청어 떼는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었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바다 깊은 곳에서 이곳까지 갖은 고생을 하며 왔는지 알고 있었다. 며칠이면 격류가 몰아치는 한운천은 잠잠해질 것이고 그들은 반드시 용감하게 사냥꾼들이 쳐놓은 그물을 뚫고 나가야 했다. 곰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건져 올리든, 갯가마우지와 메기 떼가 곁의 수많은 동료들을 물고 가 갈기갈기 찢어발기든 말든 전력을 다해 앞으로 헤엄쳐나갈 뿐이었다. 1촌 나아갈 때마다 운중에 더 가까워졌다. 그곳에는 따스하고 물풀로 가득한 호수가 있었다. 살아남은 청어들은 그곳에서 죽어간 동료들을 대신해 수천수만 개의 알을 낳았다. 이듬해 봄 알을 깨고 나온 새끼 청어는 제 부모를 닮았을 뿐만 아니라 사냥꾼의 손아귀에서 도망치지 못한 청어들도 닮았다. 이것이 전쟁터의 참혹한 생존 법칙이었다. 여기서도 개개인의 목숨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마지막 한 사람이 적군의 깃발까지 가 깃대를 잘라버리기만 하면 되었다. 도중에 죽는 수천수만 명의 손은 마지막 한 사람을 위해 적군의 깃발을 벨 칼을 들어 올렸다.

“이것이 장군의 도리입니다. 저들이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도 그 점을 잊어야만 하지요. 군을 이끄는 자가 명령을 내릴 때마다 그 명령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생깁니다. 하지만 모든 명령은 반드시 내려져야만 하지요.”

식연은 그리 말하며 말을 덧붙였다.

“이것이 소위 결단력입니다.”

결단력. 도살장 같은 세상 앞에서 나약한 사람은 살아남지 못했다.

아소륵은 고개를 돌려 무너지고 있는 좌우 양봉을 보았다. 9왕과 목해양은 지원군을 찾아 서로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반경 100리를 놀라게 만들었던 여표은 액로 파소이의 깃발은 먼지 속에 쓰러지려 하고 있었다. 깃발을 잡는 무사들은 매번 날카로운 화살에 심장이 꿰뚫렸고 그 즉시 또 누군가가 9왕의 등 뒤로 달려가 깃발을 곧게 세웠다. 수만에 이르는 삭북 기병이 그들을 에워싸고 질주했다. 화살이 비처럼 퍼부었고 좌우 양봉은 원형진으로 변해 진 중앙의 1천 명을 필사적으로 보호했다.

그들은 청양부의 날카로운 화살이자 늑대를 벨 장도(長刀)요, 따스한 호수에 가 알을 낳을 청어였다.

“후퇴하는 자 죽음이다!”

천부장 하나가 포효했다.

아소륵이 고개를 휙 돌렸다. 겁에 질린 비호부 무사 하나가 귀를 틀어막고 울부짖으며 전장에서 필사적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무사의 손가락 사이에서 새빨간 피가 스며 나왔다. 천둥 같은 굉음에 양쪽 귀가 먹은 모양이었다. 무사가 아소륵의 말 옆으로 질주해왔다. 아소륵은 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군령은 엄격한 것이었다. 이번에 이 무사의 머리를 베지 않으면 더는 아무도 돌격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무사는 열예닐곱밖에 되지 않은 너무나도 앳된 얼굴이었다. 아버지의 칼과 갑옷을 이제 막 물려받고 대군(大君)에게 충성하는 비호부의 무사가 된 것이리라. 그 무사의 눈은 정말로 무섭다고 말하고 있었다. 겨우 열예닐곱 먹은 소년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제 곁에서 참혹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으니 무서운 게 당연했다. 그렇다고 정말 목을 베어야 할까? 아소륵은 손목이 뻣뻣해지고 머릿속이 돌연 텅 비어버렸다. 그 찰나, 소년 무사가 아소륵 앞을 휙 지나갔다. 아소륵이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닫고 휙 몸을 돌린 순간 소년의 머리가 목에서 굴러 떨어졌다. 머리 없는 시체는 무릎을 꿇으며 바닥에 엎어졌다. 소년 무사의 머리를 벤 칼은 천부장의 손에 쥐여져 있었다. 그는 마흔 넘은 사내였다. 싸늘한 얼굴에는 일말의 표정도 없었다. 천부장이 입을 열었다.

“제가 대오를 이끌고 다시 한번 돌격하고 궁술이 뛰어난 궁수 2개 대오가 좌우에서 포위하도록 하죠. 저 요사한 인간이 어디로 비술을 펼쳐야 할지 모르도록요.”

아소륵은 천부장의 쇠처럼 굳은 얼굴 앞에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고맙다. 내가 했어야 했는데.”

“대나안을 대신해 제가 응당 해야 할 일입니다.”

천부장은 바닥에 떨어진 소년의 머리를 보며 말했다.

“우리 등격이 가문의 사내는 겁쟁이어서는 안 됩니다.”

아소륵이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철안과 철엽이 양쪽에서 툭 튀어나왔다.

“저희가 궁수들을 이끌고 좌우에서 포위하겠습니다.”

철안과 철엽은 불살라진 땅에서 기적처럼 일어나 돌아왔다. 양손과 무릎은 쓸려서 피가 줄줄 흘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은 이것이 잘못된 기적임을 깨달았다. 이 전쟁터에서는 누가 살아 돌아왔는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돌격해 산벽공을 죽이는 자만이 주목 받을 자격이 있었다. 분풍을 피한 후, 이들은 진짜 사내답게 칼을 뽑아 들고 분풍에 맞서 다시 돌격했어야 했다. 막속이 가문의 사내도 등격이 가문의 사내와 마찬가지로 겁쟁이어서는 안 되었다. 반드시 가문의 존엄을 되찾아야 했다.

기병 대오 셋이 나란히 밀고 나갔다. 그들은 아소륵의 출격 명령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아소륵은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자신은 아직 위엄으로 이 사내들을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들의 강철처럼 굳건한 얼굴과 마음 앞에서 아소륵은 아직 동륙의 진법을 배운 아이일 뿐이었다.

맞은편의 기병이 빠른 속도로 접근해왔지만 산벽공은 비술을 펼치지 않았다.

그는 잠자코 자기 가슴을 어루만졌다. 검은 도포 아래에서 새카만 피가 배어나왔다. 호흡이 가빠졌다. 통제할 수 없는 힘이 몸 안에서 흩어져 수천 마리의 뱀처럼 누비고 다녔다.

산벽공은 자신이 정말 늙었음을 깨달았다. 진월교의 괴이한 주안술(駐顔術)로 나이는 가늠할 수 없지만 생명의 불이 꺼지는 일은 시간문제였다. 비술사로서 산벽공은 이미 전성기를 넘어섰다. 매번 하늘에 반하는 금지 술법을 사용할 때마다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이 소모되어 갔다. 30년 전 진북의 작은 마을에서 천구 무사단의 ‘계시의 군주’를 죽였던 결전 이후 산벽공은 영혼이 낡은 몸뚱어리에서 흘러넘치는 것을 또 한 번 느꼈다.

“스승님, 이곳은 백랑단에게 지키라 하고 철수하시죠.”

상도로합음은 산벽공을 제 어깨에 둘러멜 준비를 했다.

“아니, 아직은 안 된다. 백랑단의 느릿한 걸음이 안 보이느냐? 늑대왕은 내 힘을 엿보고 있다. 늑대왕은 힘을 장악한 자만을 존중하며 우리는 그자의 존중을 받아야 한다. 호도로한도 마찬가지다. 그는 내 목숨과 자신의 깃발을 엮었다.”

산벽공은 거대한 방패 뒤에서 천천히 몸을 곧게 세웠다.

“우리는 신의 사자다. 아무도 우리를 죽일 수 없다.”

“스승님, 스승님의 몸이 더는 버티지 못합니다!”

상도로합음도 산벽공의 생명이 극한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 더는 못 버티겠구나.”

산벽공이 조용히 말했다.

“우리를 죽일 수 있는 것은 신과 우리 자신뿐이다.”

* * *

1) 전신의 기혈을 운행하고 각 부분을 조절하는 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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