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320화 (320/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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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요궁(妖弓)의 화살 (15)

용기와 힘만큼은 자신만만했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세상을 때려부술 듯한 위력 앞에서 뇌운(雷雲) 속을 선회하는 두 마리 새가 된 것 같았다. 귓가를 때리는 천둥소리를 들으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새.

합륵찰이 이끄는 비호부 기병 중 3할이 양호지정이 작용하는 순간 발아래에서 솟구쳐 오르는 화염에 부서지고 타들어갔다. 비호부 무사들은 분풍에 대비해 말등자를 벗어던지고 두 다리로만 말 복부를 잡은 채 질주했다. 언제든 말안장에서 굴러 떨어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산벽공이 손을 내두르는 것을 보고 바로 말안장에서 떨어지던 이들은 화염이 발아래에서 덮쳐오는 것을 알아챘다. 군마들은 이해할 수 없는 힘 앞에 놀라 당황했고 두려움에 울부짖으며 사방으로 내달렸다.

합륵찰은 멍하니 서 있었다.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기병 하나가 1장 앞에서 무참히 화염에 집어삼켜졌다. 화염이 솟구치는 순간 기병의 피부가 갈라지며 피가 빠르게 기화(氣化)되었고 다음 순간 화염 속의 거대한 힘에 의해 폭발하며 신체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천구 무사인 합륵찰은 일찍이 하당군 내에 있던 스승에게서 검은 옷을 입은 진월 교사들의 끔찍한 면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었다. 알고 있었음에도 직접 목격하자 놀라 얼어붙고 말았다. 노래하며 춤추는 산벽공이 신의 권력을 움켜쥐고 세상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벌하는 듯했다. 산벽공의 표정은 침착했고 눈빛도 평온했다. 피비린내 나는 광경 앞에서 어떤 죄악도 느끼지 못하는 듯 그저 충성스럽게 그의 사명을 집행할 뿐이었다.

“요…… 괴! 요괴다!”

합륵찰이 포효했다.

산벽공은 범부(凡夫)의 외침에 아랑곳하지 않고 깃대 주위를 돌며 느릿느릿 춤을 추었다. 그것은 신내림의 춤이었다. 자태가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고아하고 힘찼다. 숲 깊은 곳의 고목(古木)이 달빛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새로 난 가지를 살며시 흔드는 것 같았다. 산벽공은 이 대지의 가장 순수하고 가장 거대한 힘을 자신의 몸으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이 순간 그는 잠시 범인을 뛰어넘어 반신(半神)의 존재로 변신할 수 있었다. 지금 그는 하찮은 것들의 분노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신의 검이 어느새 검집에서 뽑아졌으니 다음은 학살뿐이었다.

“대나안, 적군의 주력 부대가 따라붙었습니다!”

척후가 아소륵의 말 앞으로 와 급히 보고했다.

삭북부 본진을 지원할 기병 2만 명이 벌써 좌우 양봉의 방해를 피해 고속으로 접근해왔다. 아까 비호부에 의해 흩어졌던 삭북 기병들도 다시 대오를 정돈하고 비호부를 향해 거대한 포위망을 펼쳤다. ‘쇄전진’은 이미 세 부분으로 갈라졌다. 후군의 철진도 좌우 양봉의 구왕과 목해양도 고전했다. 중간에서 보호받던 불화랄은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형세를 깨닫고 귀궁 부대와 함께 돌파해 나와 비호부로 다가가려 애를 썼지만 그리 하지 못했다. 그들 앞을 가로막은 것은 적이 아니라 사투를 벌이는 아군이었다. 좌우 양봉도 이미 사상자가 절반을 넘어섰다. 무사들은 대오를 짓고 돌격할 기회가 없었다. 그들은 군마를 붙잡은 채 군도를 내리쳤다. 말에서 내려 도보전을 펼치며 육탄전을 벌이는 무사도 있었다.

아소륵은 대오 속에서 9왕을 보았다. 투구가 벗겨진 9왕은 머리를 산발한 채 고함을 치며 칼을 휘둘렀다. 아소륵은 진안부를 멸족시킨 이 숙부에게 앙금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아소륵은 마침내 이 사내가 왜 ‘청양의 활’이라 불리는지 깨달았다. 그도 보통의 무사처럼 목숨을 걸고 공을 세우려 칼을 휘둘러 적을 베고 있었다.

“누염을 죽여라! 죽여!”

9왕은 적의 가슴에서 칼을 뽑아내며 비호부 쪽에 대고 소리친 뒤 또 다음 적에게로 달려들었다.

아소륵은 9왕의 말이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무슨 말을 했을지 알 수 있었다. 이 전장에서 그들에게는 각자의 위치가 있었다. 어쩌면 다음 순간 죽을 수도 있기에 전우를 위해 슬퍼할 시간이 없었다.

“백랑단이…… 출동했습니다!”

척후가 떨리는 손으로 전방을 가리켰다.

양호지정이 잠시 그친 순간이었다. 눈먼지가 떨어져 내리며 황금창랑기 뒤편으로 3리, 백야창랑기가 청양군을 향해 밀고 나오기 시작했다. 그 깃발을 둘러싼 것은 백랑단이었다. 백랑단의 우두머리 누염은 필시 그 안에 있을 것이다. 백랑단이 끝내 참지 못하고 출격했다. 가장 힘겨운 국면과 절호의 기회가 동시에 찾아왔다. 삭북부 주력 기병대가 에워싸기 전에 불화랄이 인파를 뚫고 나올 수만 있다면 그들에게는 누염을 죽일 기회가 있었다.

아소륵은 불화랄을 위해 길을 터주어야 했다. 그는 반드시 산벽공을 죽이고 양익에서 포위해오는 삭북 기병들을 제지해야 했다.

아소륵은 칼날을 움켜잡고서 칼을 빼냈다. 주인의 피를 빨아들인 영월은 빛살이 더욱 짙어졌다. 요사한 칼은 꿈에서 깨어난 듯 숨쉬고 박동했다. 아소륵은 칼 속에 깃든 영혼들이 불안해 으르렁거리는 것임을 알았다.

고작 한 사람이 성공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게 둘 수는 없었다. 아소륵이 산벽공을 죽이는 데 실패하면 북도성의 수십만 명이 죽는다!

산벽공은 또 한 차례의 명상을 마치고 깊게 숨을 들이쉬며 재차 손을 내둘렀다. 양호지정이 다시 한번 폭발했다. 이글대는 힘이 방원 1리 안에 쌓인 모든 눈을 녹였다. 뜨거운 물이 작은 개울로 모여들어 졸졸 흐르며 그 아래의 얼어붙은 땅이 드러났다.

“전군 공격!”

아소륵이 칼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죽여라! 모든 것을 걸고 죽인다!”

이 전술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나갈지 알지만, 아소륵은 시간이 없었다. 산벽공이 다음 비술을 펼치기 전까지 생긴 틈에 그에게로 돌진해 칼을 내리칠 한 사람이 필요했다.

“죽여라!”

비호부 사내들이 소리치며 달려갔다. 그들은 더 이상 피하지 않았다. 모두가 아소륵의 생각을 이해했다. 비술이 끔찍하긴 하지만 메뚜기 떼처럼 퍼붓는 화살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쏟아지는 화살을 뚫고 돌격하는 훈련을 했다. 화살이 언제 머리에 박힐지 알 수 없었다. 화염이 언제 자신의 발아래에서 치솟을지 모르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인영 하나가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걸어 올라와 산벽공의 곁에 섰다. 상노(床弩) 같은 거대한 활을 등에 매고 있던 그는 활을 당기고 한 번에 거대한 화살 세 대를 활시위에 얹었다.

산벽공의 과부 제자, 상도로합음이었다. 그는 키가 만족 사내 두 명만 했고 그가 당긴 활은 만족의 각궁보다 힘이 10배나 강했다.

양호지정의 화염이 재차 치솟았다. 거의 피할 공간이 없을 정도로 불기둥이 빽빽했다. 이 화염이 정말 땅속 깊은 곳에서 쏘아져 나온 것이라면 지금 이 대지는 벌써 벌집처럼 구멍이 났을 것이다. 1천 명으로 이루어진 비호부 대오 하나는 산벽공으로부터 50보 거리까지 밀고 나갔을 때 이미 모두 말에서 떨어졌다. 그들이 쏜 화살은 상도로합음의 거대한 구리 방패에 가로막혔다. 산벽공은 상도로합음의 보호 아래 전력을 다해 비술을 펼쳤다.

“대나안! 돌아가시죠! 정면으로는 못 뚫습니다!”

천부장이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로 눈먼지 속에서 미친 듯이 달려왔다. 천부장의 말은 이미 화염에 터져 두 동강이 나버렸다.

아소륵은 좌우를 둘러보았다. 좌우의 삭북부 기병이 벌써 포위망을 형성했다.

“이미 글렀다.”

아소륵의 목소리가 살며시 떨렸다.

“반드시 정면으로 뚫고 나가야 한다! 계속 돌격한다!”

비호부 천부장들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중 한 사람이 나직이 말을 꺼냈다.

“대나안, 이렇게 돌격하다간 우리 모두 여기에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아소륵은 천부장들의 눈을 보았다. 그들의 시선이 강철바늘처럼 자신을 찌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들에게 나가 싸우라고 명령할 수는 있지만 죽으라고 명령할 수는 없었다.

“그럼, 내가 가겠다!”

“파렴치한 놈!”

누군가가 아소륵의 등 뒤에서 소리쳤다.

말을 탄 무신 같은 사람이었다. 철부도 갑옷을 입은 철익이 대오에서 걸어 나와 그 천부장의 뺨을 후려쳤다.

“청양부의 생사가 걸린 고비에 이 따위 나약한 말이나 지껄이라고 대군께서 너희를 키웠느냐!”

철익은 칼을 뽑아 천부장의 목에 겨누었다.

“대나안의 명령을 못 들었느냐? 저 요사한 자를 죽이라 하셨다! 앞 사람이 죽으면 뒤에서 따라붙는다! 너희 모두가 죽으면 내 차례고, 내가 죽으면 대나안께서 가실 것이다!”

철익의 눈빛에는 살기가 그득했다.

“나는 겁쟁이를 싫어한다. 그런 놈들은 차라리 내 손으로 죽이고 말지!”

철익은 아소륵의 어깨를 꽉 움켜잡으며 아소륵에게 뒤돌아보라고 넌지시 눈짓했다. 수만 명에 이르는 삭북 기병이 1리 가까이 다가왔다. 비호부는 좌우 양봉과의 사이가 완전히 벌어졌다. 불화랄의 1천 귀궁은 호표기 진 뒤에서 앞으로 이동했지만 대규모 삭북 기병을 맞닥뜨리는 바람에 이들과 회합할 수 없었다. 양측 병력은 한데 모여 서로를 베어 죽였다. 귀궁 무사들의 활은 쓸모가 없었다. 그들은 죽은 자가 떨어뜨린 군도를 바닥에서 주워들고 휘둘렀다.

“보셨습니까? 시간이 없습니다.”

철익이 나직이 말했다.

“아소륵, 군을 이끄는 사람은 전장에 나가면 마귀가 되어야 합니다. 돌격하라 했는데 감히 후퇴하는 자가 있으면 죽여야 합니다. 대나안의 어깨에 북도성 수십만 명의 목숨이 걸려 있으니까요. 수백, 수천, 수만 명이 죽더라도 늑대왕을 죽일 수만 있다면 가치 있는 일입니다. 순간의 자비심에 흔들려 대사를 그르치지 마십시오. 제가 철부도를 이끌고 가 불화랄을 지원할 테니 대나안은 황금창랑기를 부러뜨리십시오. 그리고 제가 돌아오기 전에는 죽지 마십시오. 백랑단을 갈라두시면 더 좋고요.”

철익이 말안장의 걸개에서 묵직한 철기창을 꺼내며 소리쳤다.

“철부도!”

비호부 기병들이 흩어지며 그 안에 숨어 있던 철부도 무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천천히 질서 있게 대오를 갖추고 철기창으로 강철 가시를 만들었다. 낫처럼 구부러진 창머리가 후방을 가리켰다. 이들은 만족 기병의 최고 걸작이었다. 흠달한왕이 통솔하던 70년 전에는 수천 명에 달했다. 그들은 이동할 수 있는 초위국의 산진이자, 파괴할 수 없는 강철 산이었다.

철부도가 말을 몰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전장에 용혈마의 혈기가 끓어올랐다. 말들은 울부짖으며 점점 빠르게 달렸다. 점차 철부도 대형이 흩어지며 말 사이에 연결된 가시 쇠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철부도 전선(戰線)이 장장 1리에 달하는 길이로 펼쳐졌다. 100명이서 수만 명에 달하는 삭북 기병을 상대로 포위를 시작한 것이다.

“돌아갈 길은 없다.”

아소륵의 시선이 천부장들을 한 명, 한 명 훑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전진뿐이다.”

철익의 말이 맞았다. 지금 무사들에게 자비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늑대왕을 죽여야만 모든 희생이 가치가 있었다. 어떻게 한 사람이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그들의 결심을 저지할 수 있을까. 어떻게 단 한 사람이 청양부 수십만 명의 활로를 끊을 수 있단 말인가?

아소륵의 마음속에 돌연 분노가 치밀었다. 그는 칼을 휘둘러 산벽공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돌격! 후퇴하는 자는 목을 벨 것이다!”

“네!”

천부장들이 흩어졌다. 군령은 떨어졌고 항명은 용납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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